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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사회학. /박영은
장병선
- 1193
- 2020-08-23 06:08:15
광기의 사회학.
광화문집회후에 코로나가 급속도로 퍼지고 이재명지사는 이를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쓰나미 대 충격(재앙)이 시작되었다"로 표현했다. 우리가 그동안 뉴스에서 보아온 미국과 인도, 이란이 겪고 있는 대 참사를 우리도 겪게 될지도 모른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확진율이 20프로에 달하는 집단이 광화문에 집회를 하고 이들이 다시 전국으로 흗어 지면서 코로나균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광훈과 미통당(대표 주씨), 그리고 극우매체들은 반성은 커녕 1면 톱기사를 내고, 연일 정부의 음모라든가 검사방식에 문제가 있다, 전씨가 하는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방역실패다, 단정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 마치 신도들에게 끝까지 싸우라거나 계속 퍼트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어리석은 행각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언론들과 정치인들까지 이에 가세하거나 모른 척 분노할 줄을 모른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판단력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진리란 것 자체가 믿음 즉 정신적 의지(의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진리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에(정치적으로) 그렇게 믿고 생각(판단)하는 것(진리,존재)이다. 이는 사람들이 그런 불합리한 믿음들을 유지하려하는 이유는 주로 공포라고 한다.
종교(제사장,목사,권력을 가진자)는 근원적인 죽음의 공포를 팔고, 정치(독재자 또는 제사장)는 그 시대에 직면한(겪은) 외부의 적이란 공포를 팔면서(탓으로 돌리면서) 오직 자신만이 그러한 공포를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한다(종교는 천국을 약속하고 독재자는 지옥을 보여준다). 이는 세계 어느나라를 봐도 마찮가지이다. 그러한 홍보(거짓)에 쉽게 믿어 버림은 판단이 아니라 그냥 정신이 그냥 지배되는 것 즉 닮거나 순종하는 것(내면화)이다.
이사회가 점점 광기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과거 정권이 만들어 놓은 헤게모니, 즉 맹목적 자본주의숭배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때문일 것이다. 지금 공산주의가 여기 현존하고 있으며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지금도 보수 유투버들과 이에 속은 전ㄱㅎ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소위 말하면 음모설이다.
이러한 음모설의 특징은 우리가 가끔 TV에서 의처증환자의 편집증에서 발견한다. 그래서 조금만 제스쳐를 취해도 상대는 그것을 어떤 징표로 판단한다. 내면화된(무의식적인) 공포에는 반드시 그가 그렇게 생각해야(억압하고 왜곡) 하는 편집증을 유발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를테면 누가 그대를 잡아가두고(살래 죽을래) 선택을 강요한다고 해보라..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형태의 극단적인 공포보다는 굶어 죽거나 빈곤하게 살게 된다는 내면화된 공포가 더 효과적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과거 독재정권에서 부터 주호영과 자한당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서 공산주의란 공포를 유발(해서 내면화)하고, 아마 전ㄱㅎ도 그럴 것이다(섬나라의 아베도). 만약 그것이 의도가 아니라면 그들은 이러한 편집증적 상태에 있는 것이다. 아마 정치적인 수사나 정치적 목적(욕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 많은 언론인들 지식인들과 목사님들, 각종 보수단체들 왜 이들의 이런 광기에 현혹되는 것일까? 정말로 문정부가 공산주의 아니 사회주의의 '사'짜라도 닮은 것이 있다거나 그럴만한 의도를 가지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문정부는 정말로 유럽(프랑스나 독일)의 사회당의 절반도 미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많은 좌파진보들이 문정부에 대해서 갖게되는 불만의 이유이기도 하다.
문정부와 민주당의 주요 정책수준의 이념수준은 유럽의 보수당정도의 수준밖에 안됨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의 보수들은 이러한 이념의 굴레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일까? 이는 이들의 욕심때문이다. 지나친 욕심은 빼앗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낳고 변화에 저항하는 극단적 보수성(극우)을 야기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누리는 그 특권(기득권)의 부당함(즉 절대가 아님)내지 헛됨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어렸을 때 형제간의 경쟁을 통해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때 형제들은 규칙을 정하게 되지만 가장 큰형이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을 정하게 된다.
더 많이 가지려는 인간의 욕심이 이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과 분열증은 따로 올수도 있고 같이 올수도 있지만 이러한 상태를 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다. 분열증이란?(더 알려면 오배건^).
편집증이든 분열증이든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갖고 살아간다. 우리가 확증편향이라고 말할 때 바로 이런 정도의 편집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어떤 불편을 야기할 때 이를 병적인 상태, 즉 병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나라가 바로 이러한 상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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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부추김(거짓)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우리나라의 무비판적인 권위적인 교육방식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나라를 이끌고 있는 지식인들 정치적인 인물들(검찰과 언론인 등)이 높은 자리에 앉아계시는 분들, 모두 이런 정도의 교육을 받고 대단한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천문학적인 년봉을 받고 살아가면서도 변해야 할 때 변하지 못하는 억지(혼란)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말기에 그랬고 지금은 다시 벌어지고 있다.
이들이 권력을 가지면 사회변화에 대한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의지 그러한 세력 즉 좌파의 씨를 아예 말살하려는 것이다.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들처럼...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미디어는 방송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마찮가지다. 중국과 세계(유럽과 중남미 등)에서는 지금도 이런 '분노하라'는 투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지난번 광화문촛불집회와 서초동 촛불집회에서 처럼). 물론 불합리한 사회일 수록 변화에 저항하는 극우활동도 매우 강하게 일어난다(지금 남미나 개도국처럼).
미국의 경우는 좌파활동에 비해 우파활동이 극에 달하지 않는 것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그래도 합리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진보보수의 이념싸움보다는 인종싸움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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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길게보면 이세계 이 우주는 변화의 과정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나 결코 멈추어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짧은 삶을 사는 인간이 그 순간의 이데아만 보는 것이지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물질은 변해간다. '에브리싱 이즈 더스트 인 더윈드'. 이는 불교에서 부처님이 가르치려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아니었는가? 예수 또한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말했다면 같은 말일 것이다..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의 구체적 진실에 대한 탐구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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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나 헤겔 또한 인간의 의식을 구분짓지만 오성(지식에 의한) 즉 범주적(카데고리) 인식을 이성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기존 지식('배운 것', 가르쳐지는 것)에 의한 범주적 인식은 인간이 어떤 대상에 대해 무차별적인 규정(폭력)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죽은 지식들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죽은 지식들을 배우고 이를 능력이고 말한다.(그래서 유럽 특히 독일은 그러한 배움에 대해서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즉 학력간 임금격차가 크지 않다.) 오히려 학자들은 그러한 체제 지식에서 폭력적 인간성을 본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과 일본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등, 그리고 이 땅에서 벌어진 수많은 학살의 역사들이 모두 이런 규정적 폭력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세계적인 (인종과 소수자, 빈곤에 대한)혐오주의에 의한 죽임과 무시와 차별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체제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성은 판단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항상 전체를 보면서 그 범주의 가치를, 가치(관)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즉 판단의 가치를 따지는 것을 진정한 이성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권위주의적 교육은 규정적 가치(범주)만을 가르칠 뿐 그 가치와 그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도록 가르치지 않으며 맹신과 맹목적 믿음을 암묵적으로 전제(강요)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교회와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교육에서도 그러하다. 오늘날 유럽(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교육방식은 정답을 구하지 않으며 왜 그래야 하는지를 묻는다. 즉 전체 즉 맥락(즉 가치의 가치)을 묻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가치에 대해서 가치적인 판단을 다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식이란 함정, 그 나르시즘의 함정에 빠져 죽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흐름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로 이미 60년전에 생겨났다. 우리나라도 한때 80년대에 이 사상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이에 관한 엄청난 문화예술물들이 쏟아졌었다. 이는 지금도 마찮가지다. 우리나라의 예술물들의 경향과 서양의 예술물들을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나의 페친들 상당수가 예술가이고 문학을 좋아하기에 그 차이를 나중에 주로 쓰게 될 것 같다). 서양의 예술가들이 자유롭다면 이나라의 예술가들과 정치인들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관행적이고 전통지향적이다)
이나라는 점점 보수화되어 침몰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적 변화의 필요성에 따라 변화와 진보로 나아갈 것인가의 기로(갈등)가 바로 지금 이 혼란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는 이중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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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지질학적 연대기를 나타내는 사진은 내용에 상관없이 눈에 띄기 쉽게하기 위해서 첨부한 사진이지만 최초의 인류(직립보행의 호모)가 나타난 기간은 지구의 전체 나이(45억 오천만년)에 비해 지금부터 300만년은 전체 지질학적 시간의 1/1500 에 불과하다(사진에서 공룡기 한참이후). 이 시간동안에 내가 살아가는 시간(70세)은 또 1/50,000에 불과하며 이를 다시 100분율(약분)을 세대로 나누면 1/5000, 즉 한 인간의 나이를 70세로 약분하면 내가 살아 있는 시간은 겨우 8시간 즉 우리 인간에 대해 하루살이가 그러하듯 하루도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