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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회(계 1:10-13) ※ 일곱 교회? 일곱 금 촛대? 인자?
최세창
- 1310
- 2020-08-24 05:05:44
[주의 날](τῇ κυριακῇ ἡμέρᾳ)은 문자적으로 ‘주께 속한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식 후 첫날”(막 16:2, 눅 24:1, 요 20:19, 행 20:7), 혹은 “매주일 첫날”(고전 16:2)과 같은 뜻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현재의 주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주일이 초대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를 위해 모이는 날로 언급된 것①은 아니다.
초대 교회는 안식일에 유대인들과 같이 모였고, 바울도 선교 여행 때에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행 15:21, 16:13, 18:4 등). 오어와 월터(W. F. Orr and J. A. Walther, p. 355)는 “예배가 주일로 공식화된 것은 2세기초였다(참조: Didache 14:1, Ignatius, Magnesians 9:1, Justine Martyr, Apology 57).”라고 주장하고 있다.② 그렇기는 하나, “일주일의 첫 날에 관해 말하고, 연보를 위한 날로 일컫는다는 사실은 주일(일요일)이 주님께 대한 특별한 섬김을 위해 정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③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일찍부터 습관적으로 주께서 부활하신 ‘주의 날’을 지켰음을 보여 주는 첫 증거이기도 하다(참조: 요 20:19, 26, 행 20:7, 계 1:10).}(고전 16:2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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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rysostom”(in J. Calvin), A. Clarke, C. Hodge, S. L. Johnson, F. J. Dake, N. Hillyer, D. S. Metz, 박윤선.
2) 이상근: 4세기 초엽이었다고 본다. 아무튼, 교회가 공식 예배를 안식일에서 주일(월요일)로 바꾸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들로 미루어 매우 타당성 있는 결정이었다. ① 그 날은 주께서 부활하신 날이다(마 28:1-, 막 16:1-, 눅 24:1-, 요 20:1-). ② 그 날은 부활하신 주께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안을 빌어 주신 날이다(요 20:19, 26). ③ 그 날은 요한에 의해 주의 날로 불렸다(계 1:10). ④ 그 날은 이미 초대 교회 때에 종교적 행사를 위해 모인 날이었다(행 20:7). ⑤ 그 날은 성령 강림의 대 역사가 있은 날이다(행 2:1-).
3) J. Calvin, H. Alford, J. A. Bengel, F. W. Grosheide, G. D. F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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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을 일 년에 한 번 기념하지 않고, 매주일 기념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당시 매월 첫 날 또는 매주의 한 날을 ‘황제의 날’(σεβαστή)로 지킨 데에 자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날을 주께 바쳐 예배일로 고정했다는 유력한 학설이 있다(Deissmann).④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ἐγενόμην ἐν πνεύματι: 4:2)는 ‘내가 성령 안에 있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령을 받았다거나,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요한이 신비한 영적 상태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이어(Lohmeyer)는 “성령 안에 있다는(롬 8:9) 관습적 상태가 아니고, 일반적 입신도 아니라, 황홀한 영계에 옮겨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⑤라고 하였다.
이 요한의 체험에 대해, 김철손 님은 “이 체험은 보통 사람이 자의적으로나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특별한 종교적‧영적 체험을 말한다. 요한이 성령으로 본 환상은 자신의 주관적‧심리적 이상 상태에서 본 것도 아니고, 자의적 추리로서 구상한 것도 아니며,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느낀 환영도 아니고, 초이성적인 상상도 아니며, 심령술에 의한 현상도 아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이 요한에게 직접 보여 주신 계시를 말한다. 그리고 이 계시에 대해서 응답해야 할 책임 의식을 가지고 환상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가 본 환상에 대한 기억력과 신앙적인 판단력이 조금도 흐리지 않도록 신중한 마음 자세를 갖추어 모든 환상을 대하게 되었다.”⑥라고 하였다.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의 [나팔 소리]는 믿음에 의해 택하신 자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뜻을 전하거나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것이다(참조: 출 19:13, 16-19, 민 16:2, 시 47:5, 사 27:13, 슥 9:14, 마 24:31, 계 1:10 등. 참조: 겔 33:5: 파수꾼의 경고. 겔 7:14: 전쟁 때. 레 23:24: 절기 때). 바울은 나팔과 관련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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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 Deissmann, Bible Studies, 218ff, in R. H. Charles.
5) in 박윤선.
6) 김철손, 요한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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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살전 4:16-17)⑦라고 하였다.
[같은(호스, ὡς) 큰 음성]⑧이라고 했으므로 진짜 나팔 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1:13. R. H. Charles, A. Plummer, 김철손⑨)의 큰 음성일 것이다.⑩ 아무튼, “깨우는 영음(靈音)임에 틀림없다”(박윤선).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에 대해, 요한은 【11】[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라고 하였다.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보내라]는,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보는 환상을 혼자 간직하지 말고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본서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는 1:4의 주석을 보라.
환상을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로 대표되는 모든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을 들은 요한은, 【12】[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라고 하였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는, 본서가 하나님의 환상의 계시를 귀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확신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촛대]는 뤼크니아스(λυχνίας)이며 {‘등대’, “등잔불”(A. Barnes), “휴대용 등불”(C. K. Barrett)을 의미한다.}(요 5:35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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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필자의 고린도전서 15:51-52의 주석과 데살로니가전서 4:16-17의 주석을 보라.
8) 본서에 자주 나온다(1:10, 5:2, 12, 6:10, 7:2, 10, 8:13, 10:3, 11:12, 15, 12:10, 14:7, 9, 15, 18, 16:1, 17, 19:1, 17, 21:3 등).
9) 김철손, 요한계시록.
10) 비교: C. L. Morris, R. H. Mounce “Swete”(in 이상근): 천사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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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는 스가랴 4:2을 방불하게 한다. 스가랴 4:2의 등대에 있는 일곱 등잔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슥 4:10)인데, 여기의 일곱 금 촛대(금 등대)는 1:20에 해석된바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11절)와 더 나아가 온 세상의 보편적인 모든 교회들을 나타낸다.⑪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마 5:14. 참조: 빌 2:16).
일곱 금 촛대(금 등대)는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만들게 하신 금 촛대(금 등대)와 일곱 개의 금 등잔에서 유래한 것이다(출 25: 31-40, 37:17-24, 민 8:4).
이어서 요한은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하였다.
[인자](υἰὸν τού ἀνθρώπου)는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호칭한 것으로 문자적 의미는 ‘사람의 아들’이다. 이 용어는 본서에 2회(1:7, 14:14), 마태복음에 30회, 누가복음에 25회, 마가복음에 14회, 요한복음에 12회 사용되었다. 인자란 장차 심판자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니엘 등이 사용하였다(단 7:13-28, 에녹서 46).
[같은 이](호모이온, ὅμοιον)는 “묵시 문학의 하나의 특수 용어로 계시록에서 20회나 사용되었다”(김철손).⑫
그리스도가 인자 같은 이로 묘사된 것은 인격적인 존재이나 인간과 똑같은 존재는 아님(참조: 빌 2:7)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자 같은 이], 즉 그리스도께서 금 촛대(금 등대) 사이로 움직이시는 것은, 그분의 대제사장적 임재와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R. H. Mounce).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는 첫째,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참조: 출 28:4, 29:5, 레 16:4, 집회서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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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A. Johnson, R. H. Mounce, H. Kraft,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12) 김철손, 요한계시록.
13) 필자의 빌립보서 2:7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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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관점에서 대제사장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론의 혈통과 정결법의 준수, 계명들에 대한 신실성과 개인적 경건이다”(참조: Josephus, Ant. XX 224-251; 마하 3:1, 4:13).⑭}(히 2:17의 주석). 인간에 대한 자비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제사장의 필수적인 덕목이다. 특히,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표현하고 있다(히 4:14-10:18).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롬 8:34, 히 7:25).⑮
둘째,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참조: 삼상 18:4, 24:5, 11, 사 22:21, 겔 26:16).
셋째, 하나님의 최고 사자(messenger)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참조: 왕하 1:8, 렘 13:2, 단 10:5-6, 마 3:4).
[가슴에 금띠를 띠고]는 대제사장과 왕과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과 사랑과 존귀와 위엄과 권세와 힘을 나타내는 것이다(참조: 출 29:5, 삼상 18:4, 욥 12:18, 사 6:1, 22:21, 왕하 1:8, 렘 13:2, 단 10:5, 시 18:39, 65:6,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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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in Otto Michel.
15) 필자의 로마서 8:34의 주석과 히브리서 7:25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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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80-85.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