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2회(계 1:9) ※ 예수의 나라? 예수와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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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4 05:04:05

계시자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1:9-3:22)

요한은 계시자의 명령과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계시자인 그리스도(1:9-20)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2:1-3:22)로 구성되어 있다.

1. 계시자인 그리스도[1:9-20]

이 부분은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로 시작된다.
[나 요한]은 1:1의 주석을 보라.
[너희 형제요]는 요한이 박해와 핍박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형제]는 아델포스(ἀδελφὸς)이며,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고대 기독교의 용어인데, 유대교와 이방 종교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실상, 모든 인간은 다 한 하나님 아버지의 피조물이므로 형제로 간주되어야 한다.
[예수의](ἐν Ἰησού)는 ‘예수 안에’,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 있는’ 등을 의미한다. ‘예수 안에’란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와 같은 말이다.
‘예수 안에’나 ‘주 안에’나 ‘그리스도 안에’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특히 “바울의 특징적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신자(교회)의 연합, 즉 신자가 그리스도께 접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A. Schweitzer).① 또한, 이 말은 ‘성령 안’에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A. Deissmann).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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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trans. by W. Montgomery(Londodn: Adam & Charles Black, 1956), pp. 122-124.
2) A. Deissmann, Paul, trans. by W.E.Wilson(Peter Smith, 1972), p.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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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며,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안이야말로 영적 은혜와 복의 근원이요 통로요 영역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 생활(지, 정, 의 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다. 그의 신비주의는 일반적인 의미의 헬라적 신비주의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 점에 대해 다이스만(A. Deissmann)이 잘 설명하고 있다.
(1) 전자는 반응 작용으로서의 신비주의이며, 후자는 능동적 행위로서의 신비주의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해 오시는 것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해 가는 것이다. 전자가 하나님의 선물 또는 은혜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노력이 주도하는 신비주의이다③.
(2) 전자는 신비주의의 목적이 신과의 교제(communio)이며, 후자는 일치(unio)이다. 즉, 하나님의 현존을 통한 인격성의 성화와 인격성의 상실이다. 전자가 신의 뜻을 향한 인간의 적응인 반면에, 후자는 신화(deification)이다. 사실상 전자는 신 중심적 신비주의이며, 후자는 자아 중심적 신비주의이다. 전자는 윤리적 열정주의의 신비주의이며, 후자는 경건적 도취의 신비주의이다.④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이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참가한 신비한 연합을 요약하는 것으로, 그의 감정과 의지와 이성의 전 삶이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환난]의 [환난]은 틀리프세이(θλίψεων)이며, ‘외부에서 가해지는 철저한 압박’을 의미한다. 또한, 이 낱말은 박해나 기타의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시험이나 어려움을 포함하는 일반적이며 포괄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같은 어원의 동사는 포도를 짜는 틀에서 포도를 으깬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7:14, 마 13:21, 24:21).
예수의 [나라]의 [나라]는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ᾳ)이며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천국’, ‘아들의 나라’, ‘하늘나라’, ‘주의 나라’ 등과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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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bid. p. 158.
4) Ibid., pp. 150-151. 참조: A. Schweitzer, Paul and His Interpreters. trans. by W. Montgomery(London: Adam & Charles Black. 1956. pp. 373-374. 윤리적인 면을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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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교훈의 기본 주제이다(W. W. Wessel, H. E. Luccock). 비록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성경이나 외경에 나타나지 않으나, 그 사상은 양쪽에 풍부하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출 15:18),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사 52:7),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3)와 같은 진술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문장들에 대한 고찰은, 주님의 왕권이 현재적 실재(하나님은 지금 자기 권한을 행사하신다)와 미래의 소망(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통치하실 것인데, 그때에 그분은 자신의 통치를 거역한 모든 것을 진압하실 것이다) 둘 다임을 드러내 준다(W. W. Wessel).
현재(마 12:28, 눅 11:20, 17:21)와 미래(마 13:41-43, 20:21, 막 9:1, 47, 14:25, 눅 22:16, 18, 요 14:2, 18:36, 고전 15:50, 고후 5:1, 갈 5:21)로서의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은 예수님의 교훈 속에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었다. 즉, 유대교 개념처럼 육적이며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영원한 나라이었다(E. Schweizer). 하나님 나라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이다.⑤ 이 통치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이며, 이 실제적 구현이 곧 예수님의 인격과 교훈과 생애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움직여져야 한다.}(막 1:15의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바울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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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 E. G. Swift, “Bruce, Metzger”(in W. W. Wessel), D. W. Burdick, W. W. Wessel, W. Hendriksen, C. R. Erdman, R. McL. Wilso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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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참음]의 [참음]은 휘포모네(ὑπομονῇ)이며 {‘인내’, ‘~아래서 버티는 것’, ‘확고부동’, ‘참으며 기다리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이 낱말은 단순히 인내하는 능력만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일을 위대한 것으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하게 하는 능력이다.”라고 하였다.}(약 1:3의 주석). 찰스(R. H. Charles)는 참음은 고난을 왕의 존엄으로 바꾸는 영적 연금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인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및 복음과 관련된 신앙적인 인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영광스럽게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인내를 가능케 해 주시는 주님을 확고히 붙잡는 성도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후 2:14).
[동참하는 자라]는 요한이 위의 세 가지에 동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환난과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1:2의 주석을 보라.)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의 [인하여](디아, διὰ)에 대해 (1)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A. Clarke, C. L. Morris, “Spitta”⑥), (2) ‘하나님의 말씀인 본 계시를 받기 위해’,⑦ (3)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⑧ 등의 견해가 있으나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이 타당하다.
(3)설은, 요한 사도가 에베소에서 전도하다가 도미티안 황제(Domitian: 주후 81-96) 때에 밧모 섬에 귀양갔고, 도미티안 황제가 죽은 후에 너바 황제(Nerva: 97~98년) 때에 다시 에베소로 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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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n 이상근.
7) “Bleek, Lcke, Weiss”(in 이상근), H. Alford, H. Kraft.
8) J. Wesley, R. H. Charles, A. Plummer, “Moffatt, Vincent”(in 이상근), A. Barnes, W. Hendriksen, R. C. H. Lenski, A. Johnson, W. Barclay, M. Rist, G. E. Ladd, J. F. Walvoord,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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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전설(Irenaeus, Clement of Alex., Eusebius 등)과 일치된다.⑨
“또한, 도미시안[도미티안]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라 해서 자신의 질녀 도미틸라(Flavia Domitilla)를 포디아 섬(Pomtia)에, 갸라(Gyara)와 세리퍼스(Seriphus)를 역시 다도해로 정배 보낸 기록들(Eus. H. E. iii. 8:5)을 보아서도 넉넉히 긍정이 된다”(이상근).

[밧모](Πάτμῳ)는 에베소의 서남쪽 90㎞, 에게 해의 스포라데스(Sporades) 군도에 속하는 작은 섬이다. 남북 16㎞, 동서 9㎞, 면적 40㎢로서 전라남도의 압해도(40.2㎢)나 고금도(40.1㎢)만하다. 세 개의 산괴(山塊)가 지협(地峽)으로 이어져서 해안은 길다(60㎞). 지표는 완전히 화산암으로 되어 있으며,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재배되고 있을 정도이다. 산은 최고봉인 일리아스가 269m에 불과하지만, 전망은 아름답다.
조기(早期)에는 도리안인, 다음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식민이 진행되었지만, 로마 시대에는 범죄자의 유형지로 되고 있었다.
중세기에는 팔모네스(Palmones)라고 했고, 지금은 패트머스(Patmos), 또는 패티노(Patino)라고 한다.
섬의 남쪽은 전부 성 요한 수도원에 속해 있다. 그 수도원은 1088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메누스(Alexius Commenus)의 허가에 따라 성 크리스토둘로스(St. Christodulos)가 일리아스 산정의 고대 신전 자리에 세운 것이다. 그 아래쪽에는 ‘계시의 굴’이 있는데, 요한이 여기서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작은 교회당이 있다.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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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참조: 제 1부 VI. 기록 연대와 장소. 이상근.
10) 참조: J. E. Harry, “Patmos” in ISBE, Vol. IV, pp. 2203-2204. 黑崎幸吉, A. Johnson, 박윤선, 이상근, 김철손, 요한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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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7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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