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경기연회원들께 드립니다.

민관기
  • 2223
  • 2020-08-26 10:51:50
시흥지역 중부연회원들도 보세요.

안산명성교회 김홍선 목사님께서 그토록 애쓰신 염석주(이하, 염 지사) 지사에 대한 글을 게시판에 쓰게 됐습니다.


저는 사실 이 오늘 기록하고자 하는 염 지사에 대한 정보는 2000년 경에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1999년 안산시사 발간이 계기가 된것 같습니다.
최용신 전도사와(이하 최 전도사, 최 전도사님, 최용신 혼용해 씀) 감리교회, 안산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저와는 뗄래야 뗄 수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최 전도사님이 안산에 도래하기 600여 년전 저의 조상들이 조선이 개국하며 도래하여 살기 시작한 이래, 최 전도사님이 활동하신 샘골교회에서 1시간여 떨어진 반월교회 출신이며, 아버지와 누님이 저와 같은 삼일학원
을 졸업했고, 감신을 가서 상동교회에서 봉사하며 신학생 시절을 보낸 후, 안산 고향으로 와서 안산을 이 땅을 기반으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 저는 원주민입니다. 해서, 원주민이 좋습니다. 원주민은 텃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염 지사에 대하여는 2005년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 발간한 "감리교회 출신 독립 유공자 명부와 미추서자 명부 발간"시 염 지사를 미추서자 명부에 넣었으며, 감리교회 민족운동 연표에 특별히 염 지사의 서거를 기록하며, 내가 반드시 염 지사 훈장을 추서받게 만들고야 말겟다는 결심을 했던 차에 목사님께서 저와 다른 루트 그리고 다른 인물들과 염 지사 훈장 추서 청원 운동하심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이 글을 남기니 부디 게시판에 이름을 제목으로 썻다 책망하고 싶어도 하지 마시고 칭찬하여 주십시오.
*. 제가 염 지사님과 삼일학원 동문입니다. 봐 주십셔~
*. 저하고 하셔야지 남하고 안 대져.

기본 사항 정리
1. 염 지사는 수원 율전동 출신으로 거부이다.

2. 염 지사는 최용신의 샘골학원 이사장으로 최 전도사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샘골교회의 교인이었다.
수원과 안산 두곳에 집이 있었으며 말을 타고 오갔다.

3. 수원 신간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4. 자신과 가문의 율전동 땅 30만 여평을 처분하여 만주에 100만 여평을 구입하고, 수원의 농민 100백 여명을 이주시켜 농사짓게 하였다.

5. 자신의 땅은 몰라도 가문의 땅까지 가문과 상의없이 처분하였는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시 가문은 땅이 처분되자 군소리없이 지주 노릇하다가 소작인이 되어 콩농사를 짓고 두부공장을 차려 왜적들의 탄압을 피하고 가문의 생존을 도모하였으며, 지금도 두부공장을 경영하고 안산 접경 수원 초입의 율전동에 보면 두부마을 등의 간판이 많이 있는데 이는 염가 후손의 며느리들이 경영하는 식당들이다.
*. [추가 공개] 이건 진짜 혹시나 해서 써두는 건데 참고하세요.
이 염 지사의 당시 사촌 형제가 지금의 수원시장 염태영인데, 염 시장의 조부가 되겟지요.
지금 염 시장이 민주당의 이번 주에 마무리되는 최고위원 선거에 나왔다고 하네요. 저같은 사람이야 정치에 관계할 수도 없지만 어차피 최고위원이든 뭐든 누구든지 될거라면 훌륭한 가문 사람이나 우리 교인들이 되는게 더 좋지 않을까해서 이 사항은 추가로 공개합니다.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묵묵히 가문의 생존을 도모하며 민족운동 지원을 아끼지 않은 그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6. 생산된 것은 농민의 삶을 위해 쓰고 독립군의 군량미로 보급되었다.
농장의 이름이 추공농장이다.

7. 1945년 빛의 복구 이 전 1944년 염 지사는 서거했으며, 피체로 투옥고문 당했으나. 1944년 경의 자료는 남아있지 않아? 건국훈장 추서 청원의 큰 애로사항으로 작동되었다.

8. 2010년경 안산의 뜻있는 인사들이 마음을 모아 염 지사의 훈장을 추서 청원을 하였으나 훈장을 추서받지 못했다.
공판 자료나 신문 보도 자료가 부재하고 만주 부분의 농장과 독립군 군량미 보급 부분은 증언이지 증거가 아니기에 서훈의 증거로 불충분 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염 지사는 세가지의 공적으로 정리됩니다.
[최용신 전도사는 염석주 지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짐승을 기르는 것보다 사람을 기른 것이 중요하지 않겟느냐!]는 24 글자
["돼지만 기르지 말고 이제는 사람을 기르시지요!]는 19글자
이 20여 자의 말로 최용신과 염석주는 동지가 됩니다.
말 펀치가 아주 쎄지요.
1. 최용신 지원
최 전도사의 독립운동 지원은 독립운동에 대한 그야말로 간접지원으로 함석헌, 유영모의 경우와 같이 "건국포장" 추서의 대상이 됩니다.
2. 수원 신간회 부회장
수원 신간회 부회장으로 직책은 있으나 행적이 남아있지 않아 증거로 부족합니다.
3. 독립군 지원
증언만 있고 증거가 없으므로 역시 부족합니다.

한데, 훈장 추서 추진 그룹은 1번은 제외하고 2번과 3번에 집중하여 준비하고 만주까지 현장 조사를 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으나, 증거로 채택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고, 안산 시민 1만여 명의 추서 청원 서명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며, 추공농장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건국훈장의 등급을 3등급인 독립장으로 추서해줄것을 청원하였기에
결국, 훈장 추서가 불발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 크게 들어가는 만주지역 답사 비용같은거 목사님이 대신것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이야 말씀 안 하시지만요.
*. 저의 위에 기술한 모든 인식은 사실 관계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만하고 읽어주세요. 아래로도요. 뭐 거의 없지만 역사이니 혹.



허나, 저는 결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추진하면 됩니다.

최용신 전도사의 독립운동을 간접적으로 도운 공로를 정리하여 추서 청원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이미 최용신은 건국훈장 제 5등급 애족장 추서받았기 때문에 그 운동을 결정적으로 도운 염 지사에 대한 공로는 공로 자체를 증명하기만 하면 간접 지원에 공로를 인정 받아 유영모나 함석헌처럼 건국포장은 추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독립 유공자의 반열에 일단 올려놓고, 본디 상훈법에 추가로 발굴되는 자료가 인정되면 공적 사항의 내용에 따라 훈격이 승급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으니.

1단계 - 건국포장 서훈
2단계 - 추가 자료로 만주 추명농장 제출로 훈격 승격 활동.
이렇게 순서를 정하여 단계적으로 추진하면 그 성과를 볼 수있을 것입니다.




추가로 최 전도사와 함께 하며 돕고 계승한 이들 명부 정리하므로,
최용신의 공적 사항을 재검토하게 하여 훈격 승급의 기회를 만든다.
1. 재정을 도운 인사인 "미국 여선교부"와 "YWCA"입니다.

2. 교사활동을 같이한 "황종우" 교사(후일 장로이자 의사가 됨)입니다.

3. 샘골교회의 "장명덕" 전도사입니다.
최 전도사가 오기 전과 온 후로도 수원종로교회 "밀러"와 "힐만" 여선교사들의 지원에 따른 교육 활동을 하였습니다.
장 전도사는 시흥시 과림동 출신으로 무지내 교회 출신이며 감리교회 협성여자신학교 최용신 선배이고 최용신 이상의 공적 있기도하며 최용신을 도운것 또한 다대합니다. 장 전도사의 후손이 태화사회복지관에 근무한다하니 뵙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흥시에선 지역을 기린 인사로 기념하고 싶다는 의사가 있다 합니다.
건국포장 추서 청원같이 하면 좋을것이라 판단합니다.

4. 최 전도사가 교사를 건축할 수있도록 토지 1,050여 평을 기부한 둔대교회의 "박용덕"입니다.
1935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양주삼 총리사"는 땅을 기부하여 교단에 편입시킨 공로를 치하하여
감사장으로 표창한 바 있습니다. 지금도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 토지 1,050평 기증에 표창이 달랑 종이 한 장이어서 인지 제가 찾아갔다가 후손들에게 구박당했습니다.
거기가 땅값만 샘골교회 땅이 지금시세로 100억입니다.
헌데, 말로만 감사합니다하면 삐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신앙이 떨어진 측면이야 안타깝습니다.
어떻게든 그 분들을 위무해야 겟다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애쓴 결과인지 그 벅용덕의 본가는 군포의 향토유적 비슷하게 지정되어 매우 유명한 건축물이 되엇다 합니다.
거기엔 바로 옆에 있는 둔대케노시스교회 "강인태"목사님의 수고가 컷습니다.

5. 최 전도사의 사후 샘골학원을 이끈 "전재풍" 담임목사의 아내 "김복희" 사모입니다.
후일 대한민국 정부의 보사부 장관 표창을 받은 바 있습니다.

6. 전재풍 목사의 아들 "전의철"입니다.
조선 말 쓴다고 반월보통학교에서 제적되었는데 초딩을 제적한 최초 사례라 하고, 제적으로 수원 삼일학원으로 재입학했다고 합니다.

7. 최 전도사의 약혼자 "김학준"이 있는데 이도 최 전도사의 유지를 잇는 활동이 다대하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건국훈장 추서는 받지 못하였으므로 이도 훈장추서 공로 추가의 요건이 되기에 건국포장 그 이상의 서훈이 가능합니다.

혼인에 이르지 못하였는데도 김학준은 지금 안산 샘골교회의 최용신 묘역 옆에 같이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김학준은 후일 다른 분과 혼인을 하였으나, 혼인한 그 부인의 동의하에 최용신 옆에 묻혔다하고 안산의 최용신 기념관 관계자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김학준의 부인"과 인터뷰한 내용이 존재합니다.
*. 아무리 그래도 본부인이 있는데 처녀 옆에 묻히고자 원한 김학준이 이해가 쉽진 않습니다. 허나, 어쩔 수없습니다.
*. 김학준의 부인은 김학준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석방시키기(살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8. 최 전도사의 여동생으로 "최용경"이 있습니다. 북에 있는 원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언니의 사후 샘골학원을 김복희 사모와 경영하였습니다.

9. "직전"이라는 왜인 목사가 있습니다. 이도 최용신의 활동과 사후에 도운 증거들이 존재합니다.

10. '오야마'라는 왜인이 있습니다. 이는 두가지의 설이 있는데.
1) 우리 민족과 교회 그리고 최용신을 도왓다는 것이고,
2) 왜의 고등경찰로 최용신의 활동을 감시했다는 것인데.

1)은 중거나 증인이 넘치고 지금의 안산시 팔곡동 반월교회 인근에 송덕비도 세워졌었으며 아무리 대한인에게 잘했다해도 송덕비를 세우기까지 하는건 별로 없으나 어째든 송덕비를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웠었고..
2)의 고등경찰설은 신뢰가 잘 안 가는데 뭔 시골 깡촌 교회의 여전도사를 감시하러 고등경찰까지 배치를 했겟나 싶습니다. 당시 그렇지 않아도 반월에 지서가 있어 수시로 감시를 나왔었고 수원의 경찰서에서도 몇 번인가를 불러 최용신의 민족운동을 방해했다고 하니 오야마의 고등경찰설은 신뢰가 가지 않으므로 이도 우리 민족을 도운 왜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단입니다. 아무튼 의심은 갑니다.
*. 대한민국 정부에선 일본인에 대한 훈장 추서를 극히 소수이지만 한바가 있습니다. 3명으로 기억하는데 변호사 한 명과 자신의 나라 천황을 우리나라 박열과 함께 처단하려한 김자부자란 왜인 여성 등입니다.
일본인에 대한 훈장 추서는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고 양심적 일본인 세력을 격려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아주 조그만 공적이라도 찾아 공적을 치하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료됩니다.

11. "전희균과 전진" : 전희균은 루시고녀의 교목이며 전진의 부친으로 최용신의 신앙과 학문 그리고 삶까지 책임진 목사입니다. 이의 정신적 영향으로 최용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민족의 농촌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하게 하는 공로를 세웠습니다. 용신의 오빠들은 간호원이 되길 원했으나 전희균 교목의 지도로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합니다.
요즘의 신학생 선발을 하는 데에도 원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12. "루시와 올리버 그리고 와그너" : 루시컨닝햄 여사는 대한의 여성 교육을 위해 엄청 거액을 희사해 학교를 건축하게하였습니다. 그 규모는 앨범을 보면 압니다.
올리버와 와그너는 루시고녀의 교장으로 근무하며 학교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수 많은 인재들을 민족을 위해 양성한 공이 있으며,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총회장에서 다른 여성 선교사들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28년 최용신의 졸업 앨범이 원주제일교회 담임이자 동부연회 감독이셨던 고 윤춘병 감독님 기증으로 감신 역사박물관에 존재합니다.
*. 감신 역사 박물관엔 최용신의 부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부조는 동부연회 홍천동지방 동면교회 박순웅 목사님의 사모인 정혜레나님이 제작하여 기증하였습니다.
*. 루시고녀 동창회 세력들은 월남 세력중 유일하게 대한민국에 모교를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동문들이 샘골교회를 통한 기념사업으로 유치원을 개원했었는데 지금은 교회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어린이집으로 존재합니다. 루시고녀는 당시 여성 5대 사학으로 꼽힐만큼 수준이 높았고 그만큼 큰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루시고녀는 남하하여 대한민국의 유수한 남성들과 혼인하여 사회적으로도 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지금 사무실이 감리교회 본부 롯데관광이 있는 몇 층에 있다합니다. 마지막 루시출신이 대한민국에서 다 돌아가실 날도 그리멀지 않았습니다. 1935~40년생 정도가 제일 어린 세대일것으로 보는데 제가 본 인물은 첼로 괴동 장한나의 외조모로 매원감리교회를 다니셨는데, 김진춘 목사님께서 샘골교회를 담임하실시 최용신과 샘골교회를 지키시기 위해 쏟은 노고를 알고 계시기에 받은 감화가 있어서 가족들을 이끌고 오신것이 아닌가 합니다.

13. "이신애" : 3.1 혁명으로 투옥되어 유관순 열사와 함께 강력한 옥중투쟁으로 유열사는 유방이 터지고 이신애는 방광이 터지는 심각한 고문을 당했는데 이 후유증으로 이신애는 후일 출옥하고 혼인하였는데도 임신능력을 상실하여 아기를 낳지 못했다 합니다.
이신애는 최용신이 루시여학교 두남분교(초등 과정) 시절 교사였습니다. 이신애는 1919년 1월 손정도 목사가 원산을 방문하여 영성 특별 부흥회를 인도하고 따로 모여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사람 손을 들라~하자. 이신애는 거기에 모인 6명의 보다 제일 먼저 손을 번쩍들어 찬동을 표시하였고, 실천하여 유관순 열사와 같이 활동하였는바, 이신애는 최용신의 제일 어린 시절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신애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준재입니다. 유관순이 돌아가신 잔다크라면 이신애는 죽지도 않는 잔다크입니다. 불사신 같이 살아남아 92세 이상의 천수를 누리셨습니다.

한편, "손정도" 목사는 경술왜란 이 후 감리교회 민족운동 세력을 재편하여 배치하는 과정에서 하디와 최병헌은 감신의 교수로 인재를 양성하며, "현순"은 장년주일학교의 총장으로 지명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직하고, 전덕기 목사는 병상 목회로 사투를 벌이는중, 전국 순회 부흥사가 되어 하디의 영성운동으로 정갈한 영성으로 무장한 대한인들의 신앙이 민족신앙으로 견결히 무장할 수 있도록 한 천하의 뛰어난 부흥사였음이 이신애의 결전 선언으로 증명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죽을 자 손을 들라~" 13글자에 6명이 죽음을 각오하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14. "황애덕과 김노득 그리고 김활란" : 황애덕은 감리회 협성여자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농촌지도사업과를 설치하여 민족과 교회의 여성지도자를 양성하였습니다. 최용신과 김노득이 그가 빛다림해낸 민족의 빛여성들입니다.
*. 황애덕은 3.1혁명 참여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습니다.
*. 김노득은 무훈입니다. 최용신 이상의 민족운동 공로가 있습니다.
*. YWCA 관게로 김활란도 최용신을 적극 지원하였다.

15. "채핀과 케이블" : 채핀은 여자 신학교의 교장으로, 케이블은 남녀합동 협성신학교의 교장으로 민족인재를 양성햇으며 특히, 최용신 재학시의 교장으로서의 공이 있습니다.

16. "정인보. 전영택, 김창준"이 교수로 최용신의 신학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역사신학과 실천신학 그리고 사회학 등입니다.
*. 정인보는 민족주의 사학자로 신채호의 뒤를 거학이며 양명학을 통해 그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 전영택은 최초의 현대소설가로도 이름을 날린 목사로 유명합니다. 동경 2. 8 독립선언 참여 예정이었다가 신병으로 물났으나, 아내인 채헤수가 3.1 혁명에 피체되어 유관순, 이신애, 어윤희 등과 투옥생활을 했습니다.
*. 김창준은 3.1 혁명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참여한 영걸인데, 1945년 남북정치협상회의차 북측을 방문하였다가 다시 월남하지 않고 북에 남아 자신이 뜻하는 사회주의 조국건설에 매진하다가 운명했다 합니다.

17. "조민형"은 농촌사회구제책이란 농촌운동 전문서적을 저술발간하여 수 많은 농촌운동가들에게 교재로 제공하였습니다.
이 책보고 다 배운바입니다.

18. "최병헌과 하디" : 최병헌과 하디가 이루어 놓은 신학의 바탕 즉 신학세계 등을 통해 신학의 지평을 넓혀 민족운동 종사의 자양분을 얻었습니다.
*. 탁사 최병헌은 제천출신으로 실학을 기반을로 한 양명학을 연마하였으며, 감리교회의 목사이자 감리사로 상동교회와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여 교회가 민족의 기반위에 정착하도록 하였으며, 서울, 인천 지역의 감리교회 민족운동 진영의 총괄적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은퇴후엔 감신의 교수가 되어 서거하기 직전인 1927년까지 수고하셨다. 수다히 많은 저술로 감리교회 목회자들이 민족운동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한 최고의 민족운동 인재 양성의 공로자입니다.
*. 하디 : 영성운동으로 대한인의 영성을 정갈하게 빛다람한 하디는 1907년 부흥운동을 정리하며, 감신 교수로 일하기 시작, 1909년엔 교장이 되어 그야 말로 감리교회를 최고의 민족운동가 집단으로 양성한 최고봉입니다. 이 시기 감신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한 이들은 자신의 영성운동으로 변화된 사람들이었으며, 바로 그들을 지성을 겸비한 목회자로 민족운동가로 벼려냈던 것입니다.
이것의 증거가 3.1혁명에 목회자와 교사 153명이 구속된 것입니다.

지도자의 지도자를 양성한 공로 어디에 비기겠습니까?

19. "수원농전 학생들" : 최용신은 약혼자가 유학해 있으며, 오빠가 사업차 일본에 있을 시 고베여자신학교로 유학을 가기 전 자신이 하던 역할을 부탁하기 위해 수원의 농림전문학교를 방문해 대한인 학생들에게 샘골학원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학생들은 이에 흔쾌히 동의하고 참여하였습니다. 사회주의 게열의 학생들도 있었다하며 수원농전이 더욱 민족주의화의 길을 촉진하는데 기여했다고 후일 학생들은 증언하였습니다. 이 학교가 후일 서울대학교 농과 대학으로 발전하여 대한민국 농업과학의 총아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 수원 농전 학생들은 일찍이 개화하였음은 물론 신앙적으로도 돈독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디의 대부흥 운동은 수원으로도 밀려와 수원농전 학생들은 수원종로교회에 가서 강력한 성령체험을 하였고, 이들은 학문에 더욱 정진하고 민족 공헌을 위해 성심을 다했다 합니다. 이는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으로도 이어져 김상진 학생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며 칼로 배를 갈라 자결하므로 그 전통을 이엇다 합니다.
지금 대학은 서울로 이전했고, 고등학교는 수원에 있으며 이 전에 있던 농촌 진흥청은 이전하였고 무엇으로 개발하려는지 빈땅으로 있습니다.
한편, 최용신이 들러 학생들을 만났다는 여기산 자락 그 자리에는 명성황후 시해범 우범선의 아들 씨없는 수박의 "우장춘"이 묻혀 있습니다.

20. 최용신의 서거 : 유학을 갔다가 병에 걸려 유학을 중단하고, 다시 샘골로 온 최용신은 병이 도져 수원의 도립 의료원에 입원하여 "김하중 박사 등"의 정성어린 치료에도 회생하지 못하고 서거하였습니다.

21. 최용신의 장례 : 여성 최초 민족의 사회장으로 1,500여 명의 장례객들의 애도속에 성대히 치러져 민족의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를 다하였습니다. 이 부분도 방대하므로 생략하고 다른 글로 대신합니다.
다만, 2010년경 감신대 안산지역 동문들이 유사이래 딱 한 번 최용신 선배의 서거일 날 샘골 기념관에 모여 추모모임을 가졌었습니다.
*. 부고를 알리는 공은 "여운형과 노천명"이 수고하였습니다.

22. 최용신 훈장 추서 청원 공로자 : 최용신의 제자인 "고 홍석만 장로"와 둔대교회 출신 "고 김우경 장로" 그리고 장로교회 청년이었던 "최** 청년"입니다. 이들도 고마운 이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했으며, 감리교회가 감사를 안 해 이 청년과 고 김우경 장로는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23. 기념관과 기념행사 : 제자인 고 홍석만 장로의 기부금과 안산시의 예산으로 샘골교회 옆에 기념관이 2008년인가? 완공되어 수 많은 시민들과 국민들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제공되고 있으며(연 인원 10여 만명으로 지금가지 도합 100만 여명이 기념관과 묘소를 방문) 2009년엔 최용신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안산시에서 9억원의 예산을 들여 대대적인 행사를 하여 감리교회의 위상을 드날린바 있는데, 이 일엔 "제가 종합 컨설팅"을 하였습니다.

이 때 3권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최용신 평전" '최용신 화보집" "기념 논문"입니다. 제가 모든 정보를 제공했고 감수를 하였습니다. 물론, 무료봉사였습니다. 비매품으로 발간되어 1만권 보급되었고, 기회를 만들어 개정증보하여 더 보급할 수 있습니다.

기념관은 애초 안산시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안내되었습니다. "루시고녀 동창회"와 김우경 장로 그리고 여타의 사람들이 기념관 운영에 개입하려 했으나 제가 다 차단시키고 기념관의 안정적 운영이 가능케 하였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는 명예 관장을 두는것까지 반대하였으나, 이젠 기념관을 욕심내는 사람도 없으니 좀 개방적으로 운영하도록 안산시에 제안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24. 샘골교회와 낳은 교회들
1) 1세대 교회 - 멀리서 교회에 오는 순서대로 교회를 분산 설립했습니다. 둔대교회, 야목교회, 반월교회, 반월중앙교회, 부암교회, 본오교회, 성천교회, 벧엘교회가 1세대 교회이며, 서북방향으론 군자교회, 성광교회, 선부교회, 수암교회 등이고
2) 2세대 교회로는 만족교회, 평택제일교회, 대소원교회, 영화로운교회, 동대구교회, 성안산형제들교회 등 전국에 수 십개 있다.
*. 타교단 목회자들로부터도 타종교인으로부터도 무종교인으로부터도 최용신은 자신의 어릴적 삶의 롤모델이요 따라 살아야할 모범이었다는 사례를 수도 없이 들었는데, 앞으로 이런 증언들은 이런 소식에 감리교회에 오게 됐어요하는 소식들이 넘치길 소망합니다.
*. 한편, 안산이 도시화되며 샘골교회 주변이 개발되며 인구는 아파트가 들어서며 폭증을 하였는데, 샘골교회는 아직 몰려드는 교인들을 수용할 길이 없었고, 이는 당시의 교회는 200여 명 수용 가능햇으나 한 주에 새로이 몰려드는 교인은 50여 명이라 감당을 못하고 결국 주변의 다른 교파 교회들에게 교회만 크게 지어놨던 교회들에게 큰 기회를 주고 말았다. 교회 땅을 수호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미쳐 준비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당시 몰려들었던 주변인들은 최용신 전도사가 활동하였었다는 소식을 알고 왔던 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다고 호소해야 별 무 소용입니다. 약발이 다 됐어요.

후 일 "기수철 목사님"에 의해 대형 교회가 건축되어 어느 정도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였으나 큰 기대에는 못미쳤습니다.
샘골교회 100년사를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감신 86학번 구인성 목사가 재작년 부임하여 성공적 목회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잃어버린 선교 대권을 감리교회가 반드시 되찾는데, 샘골교회는 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25. 샘골교회와 안산의 감리교회
1900년대 초 이미 감리교회는 안산시 전역에 10개 이상이 설립되었습니다.
샘골 교회를 모교회로 안산지역은 5개 지방으로 130여 개 200여 목회자가 목양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 최 전도사에 대한 느낌은 감리교회 선교를 위해서 도음이 될 것은 같다. 그러나 정확히 내 것 같지는 않은 그런 상태입니다. 아주 밀접하게 접근시켜야 합니다. 일단, 샘골교회와 기념관과 그리고 묘역을 1년에 1회 이상 반드시 참배하게 합니다. 정서적 접근이 매우 중요합니다.

26. 생골교회 안산의 개신교회
3.1 혁명 기념예배를 드리는 때가 되면 안산의 수 많은 목회자들과 정치, 시민, 여성 주요 지도자들은 샘골교회로 모여듭니다.
해방 이 전에는 감리교회 이 외에는 존재하는 기독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해방 이 후에도 1960년대에서야 5~6개이었고, 1990년 이 후에야 늘기 시작. 950여 개 정점을 찍은후 지금은 650여 개로 조절중.
*. 감리교회를 경계하는 마음이 있으나 감리교회가 튀는 선교전략을 구사 안 하기에 아직은 경계 모드가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 감리교회 130교회 45,000여 명
*. 장로교 통합 45,000여 명
*. 장로교 합동 45,000여 명
*. 기타 개신교 5만여 명
총 20여 만 내외로 추산.
*. 세밀한 기타 개신교 분석이 필요합니다.
*. 안산에서 최용신을 주목하는 단체는 [YMCA, YWCA, 안산통일포럼 등]입니다.
*. 최용신기념사업회를 최용신과 아무 상관없는 이들이 임의로 조직해 활동하였던 적이 있었고,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가지 했습니다.
*. 최용신, 용신, 상록수와 관계된 수 백, 수 천의 간판단 호칭이 있습니다. 상록회란 친목회만 수 백개는 될겁니다.

27. 샘골교회와 안산의 타 종교들
*. 천주교회당이 현재 15개 45,000여 명
*. 불교는 자체 건물 5개? 내외로 미미하며 총 1만 이하의 교세가 있다.
*. 원불고 1개소로 100여 명
*. 여호와의 증인, 안상홍 교단, 안식교, 신천지가 있다.
*. 대순진리회, 몰몬교, 증산교, 천도교가 아주 소수있다.
*. 경신연합회는 점쟁이들 연합회다.
*. 아마도 모르긴 모르지만 최용신 대놓고 불만을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 민족의 국가 유공자이니까요.


&. 안산의 종교는 감리교회, 통합, 합동, 천주교회가 거의 대등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 감리교회는 100년의 역사성과 충청인과 강원이 그리고 강화인천인의 결합으로
-. 통합은 호남인의 공고한 결합으로
-. 합동은 영남인과 보수반공 인사의 결합으로
-. 천주교회는 호남의 기대중 전 대통령 따라.

그런 것이다.

28. 샘골교회와 일반 시민들
*. 안산 지역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1년이 한 번은 들르는 기본 코스입니다. 이들을 통해 부모에게 영향을 끼칠 방략을 연구해야 합니다. 사실 시의원급 몇 명은 꼬셔 놨습니다.
*. 어린들에서 초중고로의 영역을 확대하애 합니다.
*. 청년과 여성들을 위한 어떤 대책도 필요합니다.
*. 사실 최용신 빛갈이 고운 처녀로 인식되어 있어서 남성들에게 마음속의 큰 인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비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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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자료는 샘골교회 출신이며 동탄교회 소속이신 "홍석창" 목사님께서 가지고 계시며
언제든지 활용 가능합니다.
홍목사님은 물론 훈장 추서운동을 위해 자료를 연구하고 준비하신건 아닙니다.
황종우에 대한 자료는 애국목사 김진호의 손자인 애산교회 "김주황" 목사가 가지고 있으며.
전재풍과 김복희 자료는 인천에 유가족들이 존재합니다.

이들 모두도 공적 사항을 정리하여 정부에 건국포장 추서 청원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고
감리교회가 안산지역 사회에서 그 선교적 위상을 드높일 수있으리라 봅니다.

*. 건국포장은 건국훈장이 아닙니다. 다만, 독립 유공자의 반열에만 드는 것입니다.
하여, 건국훈장이 아니기에 친일과 친북행적에 관한 증거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할 일이 없다 보여집니다.
하나, 건국포장 독립 유공자라하여 정부의 연금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적지만 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선진들의 민족과 교회에 대한 공로를 일일이 찾아 보훈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부여된 작은 소명이라 생각하여 이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기타 과제 정리
*. 진정한 "용신 봉사상"제정을 위해
전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제정하여 표창하는 '용신 봉사상'은 적절해 보이나
안산시에서 제정한 '용신봉사상' 재검토케 하여야 합니다.(웬지 둘 다?)

최 전도사가 무슨 봉사를 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며 예전에 하던 새마을 운동하거나 하던 부류들이 나도 최용신처럼 봉사하였노라 자랑질하는것이 눈꼴이 시어서 도저히 못봐주겠습니다.
두 단체의 용신 봉사상 수상자를 전수조사해 보면 알지만 정말 웃기는 수상자들도 있습니다.
하며, 손정도 목사의 며느리이자 손원일 제독의 아내 홍은혜 권사님도 수상을 하셔서 참 적절한 수상이다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안산에서만 이라도 새마을 운동 표창식의 용신 봉사상은 근절되어야 합니다. 이는 안산지역 감리교회 목사들에게 주어진 기본임무라 봅니다.

안산에서 이런 일이있었습니다.
지금의 반월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대략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일인데 이 글의 내용은
진정한 용신 봉사상 제정을 위한 실질적으로 필요한 기획이기에 다른 글로 남기고자 합니다. 일단 최용신을 기리는 일은 여성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 여성만? 최용신과 같이했던 이들이나 계승했던 이들은 남녀의 구별이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부터 혁파하면 되는것입니다.

*. 소설 상록수의 저자인 심훈이 당진 필경사에서 집필을 하였나 봅니다. 하여, 최용신 부분을 가지고 뭐를 따로 추진한다 합니다. 확인해 보려 합니다. 무슨 딴 짓을 할지도 모르거든요.

*. 소설의 이름으로 전철역이 지어진 사례가 없습니다.
이는 이순신역이라 하지 않고 거북선역이라하거나, 남궁억역이라 하지 않고 무궁화역이라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상록수역은 당연히 소설의 탈을 벋고 명실 상부한 애국지사 "최용신역"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아주 매우 중대한 과제입니다. 만일 이를 이룽낸다면 다른 문제는 일도 아니게 다 해 낼 수있습니다.
도대체 정신이 있다면 우리가 소설을 기려야 되는 것입니까?
무슨 소설이 신이라도 되는건지 더운 여름 열받습니다.
왜 받드냐고요~

*. 상록수 단편 영화 축제.
일찌기 상록수란 제목으로 영화가 찍힌 사례가 많으나 -. 교인 최용신을 기리는 작품은 없었다 판단하므로 이것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터무니없는 자원이 투입되어 고인이나 선교와는 아무 관계없는 완벽한 비교인들이 행사를 주관하거든요

*. 내용은 제대로 썻다는 유달영의 최용신 평전도 그러합니다.
활동의 의미나 내용은 다 맞는데 일반인들에게도 읽기가 편하게 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종교성은 뺏다는 겁니다. 유달영의 증언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최용신은 이유불문 192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미 조국의 농촌을 위해 헌신하겟다는 결심을 당시 조선일보에 쓰기까지한 루씨고녀의 감리회 출신 군계일학의 빛여성이며, 전용재 감독회장의 고모인 대한수도원 전진 원장에 따르면 뭔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서울 서대문 충정로 죽첨정의 골방에 올라 새벽마다 기도를 하였다는 그 증언이나 남아있는 새벽의 기도문을 보십시오. 하여, 전진 원장도 선배인 최용신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았노라고 하며 신사참배를 피해 어디로든 돌아다녀 결국 신사에 참배를 안 합니다. 심지어 정신대 모집에 왜적들이 나서자 혼인까지 해버립니다. 어떤 경우에도 왜적들과 역이는 것은 싫다 결심했다는 일 증거입니다. 이것으로 대한 수도원 원장의 삶을 살게했다 여겨집니다. 바로, 후배가 그런 결기를 갖고 살도록 고무 격려한 이가 최용신입니다.

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진 원장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최용신 평전은 완전한 감리교회 신앙인의 입장에서 다시 저술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2009년 제가 감수하여 저술되었는데도 맘에 안 듭니다.
1대 평전 - "유달영"
2대 평전 - 동아일보기자 누구이며 감수 민관기
3대 평전 - 다시 저술해야. 나 저자로 예약 ㅎㅎ


&&&. 최용신 전도사님은 앞으로 5년후 2025년이면 서거 90주기가 됩니다.
이 때를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감리교회의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지길 소망하여 이 글을 드렸습니다.
사실 이 일의 총체적 부분은 감리교회 본부의 성원하 연회가 앞장서서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총동원하고 압박하여
최소한 안산은 감리교회 선교 부분에 있어서 끝을 봐야 합니다. 안산의 선교대권을 갖는건 기본입니다.
하여, 우리가 절대 사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최용신 전도사님, 최 전도사님, 전도사님]이란 호칭입니다.
입에서 달달~ 거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선생, 여사 다 필요없습니다.
오로지 [최용신 전도사 마케팅]을 향하여 전진합니다.

독립 유공자 25,000여 명중 인지도 순위 10걸 안에 듭니다.
(니가 조사해봣니? 우째 아니??)

여성 독립 유공자 350여명중 인지도 순위 1~2위 입니다.
(1~2는 유관순 아니면 최용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작업을 한 뒤엔 유관순도 1위를 자신 할 순 없어요. 유관순은 감동과 눈물이지만 단순해요, 연구도 부족하고 1920년 서거 이 후 25년 이상이 지나서야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최용신은 완전히 달라요. 유열사의 장례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불과 20여 명이 치렀어요. 최용신은 어머어마합니다. 모든 것이 스페셜 베스트 스텍터클합니다.
유관순의 '항거'는 재미 황 무대박, 최용신은 관심 뿜뿜~ 최은희 주연 대박. 뭐 대충 이렇습니다.)
허나, 전 남자현, 유관순, 최용신은 3걸은 같이 가는 3걸로 선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건국훈장에서의 순위는 1만등도 넘습니다만.

[돈을 벌어야 합니다.]

위의 모든 내용을3가지로 요악하면 이렇습니다.
1. 최용신의 공적을 재조사하여 훈격을 재조정해야 한다. 현재 훈장은 생전의 공적으로 훈장을추서한 것으로 사후의 공적은 전혀 평가되어 있지 않다.
2019년 유관순 열사는 3등급으로 훈격이 2단계 상승한 점을 주목하라.
2. 최용신과 관계되어 그의 공적을 빛나게한 모든 이들 곧, 염석주 지사를 대표로 정리하여 훈장을 추서를 청원하자.
감리교회를 필두로 경기도를 배경으로 안산과 수원의 두 자치단체가 공동으로 추진한다.
연대와 협력 그리고 독자 전술을 잘 결합해야 한다.
3. 기타 사항으로 용신 봉사상 내용 제고 상록수역 개명, 최용신 평전 3간 추진 등의 사업을 준비한다.

다시 짧게 요약하면
하나. 최용신 훈장 훈격 승격
하나, 염석주 비롯 훈장 추서
하나, 그 동안의 문제 해결과 더 빛나게할 주변 변화

효과를 간략 요약하면
1. 일단 훈장과 표창의 직접 대상이 60여 명이 달하므로 그 후계 가족들만 하여도 수 천에 달하므로
그 가족의 직접 전도와 간접 전도의 효과가 다대하므로 정신적 풍요로움을 줄 수있다.
2. 시민사회에 주는 충격은 엄청나다.
그 집단이 그 집단이었단 말인가? 니네도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으면 하면 된다고 방법을 알려준다.
적이안 생기게 하려는 전략이다. 우리가 받는 헤택을 당연히 여기게 하야하는 것이며 당신들도 이제부터 라도 사회에 기여하며 살라는 선한 메시지 전달력이 강력하다. 실제적 사회계몽효과가 대단하다.
3. 어떤 것을 계기로 상품화의 게기로 삼는다.
뭐 대충 이렇?



이를 추진해가는 추진체가 있어야 하며, 기본을 기획하는 소단위 토론이 먼저 조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획하고 로드맵 잡고 추진 출바알~



오늘과 내일은 아주 매우 깡려칸 바람 바비가 온다 하니 잘 맞이해야 겟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셔!요 하면 너부터 조심하라고 하시겟네요^^
바디야~ 문 잘 닫아라.
바람과 비의 준말인가 바비가 온댄다.
엄청 쎄댄다.



추신) 이주익 목사님 이 글을 경기 연회원들에게 헌정해도 될까요?
이건 정말 참고인데요.
최용신은 성호 이익의 200여년 후 제자입니다.
이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야~ 말이 되는 소릴해라~ 니 미친나?]
이렇게해서 유학과 감리교회를 엮어 선교의 지평을 넓히자는 뜻이 있어요.
이는 향 후 탁사를 통한 선교의 지평을 유교 문화권과 전 세계 종교권을 향한 학술대회가 열릴시
를 대비하는 전략적 투척하여 선점하는 전략입니다.

하여, 저는 감리교회 신학의 100여 년 탁사의 사 후가 아쉽습니다.
탁사를 제대로 선양도 못하면서 토착화의 우물에 가두고 문화 신학화하여 책상머리 신학자들의 말의 성찬으로 전락시켜 결국 감리교회 신학의 세계화에 역행함으로 말미암아 신앙 선진들의 뜻을 반듯이 받들어드리지 못하엿다는 그런 자책.
허나, 거기에 머믈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붉은 옷을 입고 오셔서 시퍼런 말로 근엄하게 우리를 질책하시어 우리를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외롭고 슬프기도 하지만 주님의 사랑하시는 형제들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전진하겠습니다.

저는 탁사가 되어 묻습니다.
감리교인님들아~ 내가 니들은 종교학자인줄 알지?
난 감리교인으로 민족학자야. 민족을 위한 목적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소. 민주주의를 독립협회 참여 이후로 지향했고,
목회와 교수할 때도 교인이나 신학생들이 목회자들이 청년들이 민족을 기반으로 민주의 원리로 민생을 위해 살게하는 것.
이게 그냥 다야. 생명체인 사람을 빛을 혼을 위한 것. 아무것도 없어. 알았으면 아프로 잘해라~ 그리고 충청도에 연락해서 내가 고향 충청도 제천을 이 하늘에서도 무척 사랑한다고 전해줘. 충청도를 선비들의 학문의 고장으로 키우는 일에 성심을 다해 달라고 말이야.


오늘의 주인공인 [염석주와 최용신 그리고 이익을 탁사 최병헌으로 엮어 공자 노자 그리고 원효와 이이]까지 소환하여 동양 사상계에 불을 지르렵니다.
니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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