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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도 학연도 없다.
민관기
- 2384
- 2020-09-02 08:18:56
아래의 내용들을 잘 살펴 감리교회 발전에 해악인 학연의 타파가 이루어져야 겠다.
-. 정서적 간극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좁혀야
-. 감리교회 목회자들의 민족운동에서의 공로와 위상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제공하여 자긍심을 불어넣어 학연간의 차이는 아무 소용이 없는 그냥 모두 다같은 감리교회 목회자임이 당연함을
-. 감리교회 목회자 독립유공자 명부 정리 신속히 속독토록하여 공동체성을 더욱 함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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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신대 설립자인 아젠젤러, 존스, 리드/ 스크랜튼과 대부인, 헐버트, 캠벨의 민족 공로 선양
(북남 감리교회의 초대 남여 선교사들)
-. 목원대 설립 공헌자의 민족 운동성 선양 : 스크랜튼과 대부인 헐버트, 알벗슨/ 채핀, 황애덕/스톡스, 이호운, 도인권 등
-. 협성대(삼일학원과의 역사 통합) 설립자의 민족운동성 선양
1) 스크랜튼과 대부인, 헐버트, 하란사, 이하영과 임면수, 나중석은 초기 삼일학원 설립 운영
이하영 목사 삼일학원 교명 작명
2) 버딕, 밀러, 힐만 등의 선교사와 수원종로교회 멤버 송득후 목사와 염석주, 차준담 등 중기 삼일학원 운영
3) 박설봉 – 신사참배 반대 등 - 후기 삼일학원 운영 = 3기 정도로 나누어 삼일학원을 볼 수있다.
다시 설명하면
1) 협성부인학원 - 스크랜튼과 대부인 헐버트, 하란사로 시작해 알벗슨과 채핀으로 감리회 협성여자 신학교는
-. 한편으론 협성 신학교와의 합동으로 남녀 공학 대학 = 감리회 신학교가 되어서 지금까진 여기만 있는줄 알았던 90여 년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하여, 지금껏 구분을 못해왔던 것.
-. 한편으로 농촌지도사업과의 목원대로
-. 한편으론 50여 년 역사가 중단되었다가 삼일학원을 인수하는 것과 같은 때에 상동신학교를 열었다.
2) 삼일학원도 역시 스크랜튼과 대부인이 열어 시작했다가 중기 과정을 거쳐 후기에 다시 상동교회가 인수하므로
합하여 합동된 삼일학원이 탄생했다.
3) 서울과 수원에서 따로 시작된 협성부인학원과 삼일학원은 70여 년의 세월을 지나 하나의 수원과 화성의 新삼일학원이 된 것이다. 삼일중, 삼일상고, 삼일공고는 120년전 그 자리 수원 매향동에, 협성대는 화성에 교사가 따로이나 한 학원이다.
학연을 깨부셔야 한다. 이는 조국통일 전선에 중차대한 문제이다. 사실상 감리교회만이 모든 종교 영역에서 남북대화의 주역이다. 이 외에 대종교와 천도교 정도가 잇으나 이 종교들은 현 남한내 세력이 너무 약해 의미가 없다. 하여, 감리교회만이 해낼 수 잇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북과 지나치게 적대적이었고 타 기독교는 거의 의미가 없다. 달랑 세 개 밖에 안되는 신학교(감목협) 출신이 학연으로 나뉘어 마치 다른 이들처럼 서로 상관있으나 없는듯 그냥 그저 그러한듯이 민족과 교회의 일을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능함이라는 것을 말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전반적이진 않으나 감목협 출신 목회자들 간에 옅게 누구에게나 자리잡고 있다.
*. 주님나라 이룰 민족의 하나됨과 인류 선교를 위한 한국 감리교회의 대장정은 학연타파로부터.
*. 허나, 어찌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해 내리오.
어렵다. 쉽지 않다. 허나, 노력하자. 신앙의 선진들처럼 하면 된다.
[감리교회 통합의 역사]
1. 북남감리교회 갈라져 10년차로 들어와 단 한번도 사운적이 없다.
2. 남감리회가 1895년 10년 늦게 내조선햇으나 스크랜튼이 리드에게 남자 전도인 2인(김흥순 등), 캠벨에게
빛여성 전도인 2인(백헬렌 등)을 보내주었다.
3. 선교본부로 서울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4. 남녀 신학교를 북남 공히 공동 운영했다.
5. 본국에선 남북전쟁으로 원쑤 사이이다.
6. 원산, 개성, 해주 등 강원과 황해지역을 이유없이 무조건 선교구역으로 양보햇다.
교회와 병원 학교 등 모든 시설과 교인들을 어떤 조건도 없이.
7. 1930년 북남감리교회가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통합되기 15년전?부터 통합전권위원회를 조직해 천천히 준비했다.
본국에선 아직도 으르렁~ 거리는 북남감리교회가 합동을 위한 자리부터 마련한것은 거대한 진보였다.
8. 기독교조선감리회 감독인 총리사 선거시 교인 총수 5,000여 명의 남감에서 총리사가 배출되었다. 당시 북감은 교세가 45,000여 명으로 남감보다 9배 많았다. 이걸보고 뭘 느끼시나요? 숫자로 이기던 세상이 아니라 품격으로 판단하는 감리교회엿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 남성도 빛남성이나 오랜기간 여성이 빛이 아닌줄 알고 박해받아 온점을 고려하여 여성에게만 빛을 붙여 빛여성이라 한점 양해하고 보시면 된다.
[하여, 감목협은 서울 감신, 대전 감신, 수원(화성) 감신으로 호칭]
[학교별 같으나 다른 정체성 정리]
-. 서울 감신 : 1887년 배재학당내 신학회로 시작했으며 여느 대학을 막론하고 제일 오래된 대학이며 대한민국 최고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대학이고 세계 최초의 남녀공학 대학이다.
항왜 구국 성전기 서울 감신은 대학령에 따른 대학으로 예과 2년 본과 3년의 과정으로 영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을 강의햇으며 들을 학생도 강의할 교수도 있었고, 심지어 영어만으로 학습하는 ‘영문신학과’도 있었다. 당시 다른 대학은 경성제대뿐이었으며 경성제대는 친일 매국의 소굴로 민족 반역자 양성의 소굴이었으나, 감신의 위상은 민족지도자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이 말을 보고 딱 느껴야 한다. 뭐지?
*. 배재학당내 시작했다함은 같이 시작했다는 의미이지 배재가 감신을 품었다가 따로 독립했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당시 배재의 학생과 신학회의 학생은 같았다. 수가 많아지며 분화의 길을 걸은 것이다. 처음의 신학회는 배재학생도 모두 같이 성경과 신앙을 가르치는 수준이었지 진전된 신학교육엔 아직 이르지 못했다.
그것도 남자만이 아니라 빛여성 지도자까지 목회자로 양성하였다. 한편 장로회신학교의 1920년대 모집요강을 감신과 비교해보면 장신은 자격여건이 ‘무학됨’이엇고, 감신은 고등보통학교 및 전문학교 이상의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입학할 수 잇엇던 것에 비추어 보면 그 차이는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잇는 것이다.
서을 감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항왜 성전기 정신방면 최고의 민족 지도자 양성기관이었다. 이는 먼 옛날의 국자감, 대학, 성균관에 비견되는 것이며, 최고의 항왜 군사 지도자 양성기관은 민족과 감리회인들의 상동교회내에 가졋던 신민회 주도의 신흥무관학교와 한미항공학교이다. 이를 대한민국 최고 군수권자인 대통령은 근자 육사의 전신이라 하였으며, 공군참모총장은 미국의 한미항공학교를 공사의 전신이라 칭송하였다.
*. 숭실이 최초의 대학이라 호칭했었으나 대학령에 따른 것은 아니었고, 후일 전문학교령에 따라 숭실전문이라 하며, 여타의 연희, 이화, 세브란스, 보성, 경성의전 모두 다 전문학교령에 따른 학교이다.
-. 대전 감신 : 감신이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 졸업생 이상자로 입학 자격을 제한하다보니 올 학생들의 숫자가 적은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엇다. 그 수가 모자르니 졸업생들은 주로 큰 도시를 중심 교회로 졸업생들이 우선, 파송되엇다. 실상 농촌으로 가야하나 갈 인력이 태부족햇던 것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감리회 협성여자 신학교 교장 채핀은 1928년 미국 유학중이던 독립운동가인 ‘황애덕(콜롬비아 대학 교육학 석사)’을 교수로 초빙하여 감신 안에 특별과로 ‘농촌지도사업과’를 설치하였고, 이를 통해 1928년부터 16년간 꾸준히 전개되어 황애덕 스스로만 여섯 개의 학교와 두 개의 교회를 세웟으며, 가는 곳마다 예배처소와 강습소를 설치하엿고 이는 만주로 까지 확대되었다.
*. 당시 농촌과 농민은 90% 이상을 차지하여 민족 생존의 보루였다.
*. 협성여자 신학교의 시원은 1903년 상동교회내 협성부인학원의 스크랜튼 대부인과 헐버트에 시작되어 알벗슨과 채핀으로 이어져 1928년이 되기까지 25년간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여 왔고, 출신들이 선교사들이 명하는 바에 따라 도시와 농촌의 교회로 흩어져 사역을 감당하여 왔슴으로 말이 1928년 농촌지도사업과이지 그 이전부터 그러한 성격의 일은 당연히 하여왔던 것이다.
*. '협성 여자신학교'나 '농촌지도사업과"나 입학자격은 여전히 고등보통학교 및 전문학교 이상자였다.
*. 채핀과 황애덕은 숫자를 늘리는 방법이 아니라 특수교련을 통해 일당 만의 전사를 양성하는 전략을 썻다. 이 여성들은 정말 특별하다.
우리 민족 역사상 신문명으로 무장한 최초이자 최고의 빛여성 전사들이며 군계일학의 여성 집단이었다.
이를 위해 헌신한 이의 대표적인 이가 최용신, 김노득, 윤홍림, 장명덕 등이다. 이들은 감신에서 발행한 하디와 탁사 최병헌의 신학 세계와 채핀의 여성 신학 그리고 황애덕의 사회학, 김창준의 실천 신학, 정인보의 역사학, 전영택의 문학 등을 수강한 당대의 여걸들이다. 그들은 특히 조민형 교수의 ‘조선 농민 구제책’이란 자료를 주교재로 탐독하엿음이다. 이것이 사실상 대전 감신의 전신이 되는 '농촌 지도 사업과'의 학풍 출현이며, 인물 또한 그러한 것이엇다.
최고의 목표를 가진 이들에게 온 이들도 최고였고, 최고의 교수진과 커리큘럼이 준비되고 시행되었다.
장로교측의 남성목회자 양성과 똑같이 여성전도인 양성은 그냥 글을 몰라도 아무나 전도에 대한 열정만 가지면 한글만 가르치고 찬송부를줄 알면 현장 목회로 내보내는 그런 수준과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최용신이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조선 5대 여고녀인 루시고녀를 수학한 용신은 고녀 졸업부터 농촌에의 투신을 결심하고 이를 조선일보에 기고(교문에서 농촌으로)한다. 그가 한 행위는 농촌의 아이들과 아낙들 300여 명에게 신앙과 글을 가르치는 등의 것이어서 그가 현재 능력만으로도 농촌민족운동에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것이나 웬지 그는 일본의 고베여자신학교 유학을 결심하고 사회사업과에 입학까지 한다. 왜 그랫을까?
그의 민족에 대한 소망은 단지 농민들에게 글이나 배움을 주는 수준으로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지 않았다. 사회문명 강국의 실현 이것이 최용신 전도사가 바라보던 민족의 앞날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대학을 나와 글가르치는 능력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농촌의 건설 비전을 보라. 한 처녀도 그러한 비전을 품었고 그러함을 실천하려다 병고로 서거하였다. 이 비전을 대전 감신인이 이었고 이루어 냄이 아닌가?
*. 일본 고베여자신학교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여자 대학으로 그 선비성이 제일 뛰어나다. 지금은 세화여자대학으로 교묭이 변경되었다.
그것은 단순하게 농촌에서 글을 가르쳐 아는 정도의 인재 양성에 그치지 않겟다는 결심의 발로였던 것이었고, 그는 사후에 민족에 매우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엇다. 조선 역사상 한 처녀의 부음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사회장으로 치러진 예가 없었으며 장례 상여꾼이 1500여 명으로 치러졋다는 것이 뭘 의미하며,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소설 상록수의 출간(현재까지 1억부 발행, 이북도 발행)과 최용신 소전은 2000부 발행이 되었는데 이를 1권당 평균 200여 명 이상이 탐독하니 20여 만명 이상이다. 이가 20여 만에만 영향을 미쳤을까?
사실 이를 통해 항일 성전 말기 민족 생존이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민족은 이 나이 어린 처녀도 이런 어려움을 견뎌내고 이런 일을 이루어냇는데 조금 더 참고 견디자며 민족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엿으니" 용신의 민족 공로는 300여 명에게 글배움에 그친게 아니라 그의 사후 민족의 마지막 보루인 생명 자체를 지켯다는 의미가 잇는 것으로 이것이 ‘대전 감신’의 정신이다.
[브 나로드 운동 - 이름만 폼난다 - 이라는 유명하나 별거 아닌 운동이란 것은 방학이 되어서 농촌을 방문해 가르치는 아주 일시적인 것으로 아주 농촌에 이주하여 하는 최용신과 김노득의 농민 민족계몽운동과는 질이 다른 것이다]
[한편 최용신의 동기 김노득은 일지기 춘원 이광수가 간파한대로 이같은 여성 100명이면 조선이 완전히 뒤짚힐것이라 햇을 정도의 빼어난 역량의 빛여성으로 학교 재학중 황해도 수안에 농촌 실습을 갓다가 다시 학교로 온 후 다시 수안으로가서 16년간 그야말로 뼈를 묻은 농촌계몽 전문 민족운동으로 해방후와 전쟁후엔 전쟁 미망인을 위한 일로 여생을 보냇다. 이 교회가 마포의 성광교회이다.]
이를 이어 받은 이들이 스톡스, 나애시덕, 이호운,(차경화 부부 : 대전 YW) 도인권(독립운동가)으로 대전에 서울 감신에 잇던 농촌지도사업과의 민족운동 전통을 이어받아 대전 감신을 설립하였다.
솔직히 말하자.
사실 이래서 대전 감신이 기분이 뜨아했다. 우린 농촌 교역자 전문 양성기관이며, 서울 감신은 도시 교역자 전문 양성기관이냐는 그런 생각이다. 맞다. 허나, 민족의 현실에 부응한 지도자 양성위한 전문적 학교의 설립은 매우 중요하고 엄청 긴박했고 미룰 수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서울 감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당시가 6. 25 한국전쟁 후임을 생각해보라.
하여, 특별하게 인재들의 지역적 계층적 사용처까지 명시하여 세워진 세계 유일의 신학 대학이다.
*. 당시 농촌은 대학 출신 지도자가 거의 전무했다. 면장도 미대학 출신이다. 심지어 학교 선생도 미대학 출신이 즐비했고, 그나마 그들은 학교의 교사 생활로 농촌의 전반을 살피는 지도자상을 가지기는 불가능했기에, 감리회 농촌 교역자는 모든 농촌을 통털어 지도자의 지도자이다..
하니, 감리회 농촌 교역자란 대한민국 농촌 최고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한민국의 현재이며 미래였었고, 지금 도시들의 대발전이 되게 한 배경엔 대전 감신인들의 노고이다. 도시의 교역자들은 수많은 경쟁자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일구엇으나 타교단과의 경쟁으로 인해 사실, 농촌 교역자들보다 상당히 힘들었다. 사실이다.
지금식으로 이해하면 잘 이해가 안간다. 70여 년전으로 돌아가 상상하고 회상해보라. 그 실상이 무엇인가를..
*. 당시는 여성이 가족이 없는 경우가 많아 실제적으로 농촌으로 이동하기가 수월하였다. 남성은 딸린 식구에 필요한 것들이 많아서 어려움이 있었다. 하여, 여성 고급 인력(고졸이면 최고 학력)이 거의 없는 농촌에 가면 여성 지도자들은 심한 경우(실제적으로) 여왕급으로 대우를 받기도 했었다.
농촌 교회의 사모 또한 그러하였는데, 목사만큼이나 사모는 엄청 중요한 존재였고 실제 역할 또한 그랬다. 단순한 가정주부가 절대 아니다.
*. 추억으로 떠오르는 분들 많을 게다.
이로서 감리교회 신학 교육과 목회자 양성은 1887년으로부터 시작하여, 1903년과 1928년을 시원으로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원 체제로 재편되었다.
-. 화성(수원) 감신 : 학교의 태동이 상동교회이다. 간단히 말해 상동교회는 감리교회만이 아니라 민족운동의 모든 부문을 관통하는 최고의 민족교회이다. 여기에 부임한 설봉 박근수 감독에 의해 협성 신학이 발기되엇다. 그는 교회의 어려움 중에도 민족 중/고등학교인 1903년(스크랜톤대부인, 이하영, 임면수, 나중석 등)설립된 삼일학원이 불교재단으로 넘어가려고 하자 옛 1900년대의 스크랜튼과 스크랜튼 대부인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학원을 인수하엿고, 또한, 1970년대 상동교회 내에 상동교회의 민족정신을 잇는 목회자 양성계획으로 신학교를 설립하니 이것이 화성(수원) 감신의 시작이며, 유수의 목회자들과 함께 지금은 더욱 융성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 삼일학원은 1903년 수원종로교회와 삼일남여학교로 부터 시작
2) 1903년 상동교회내 협성부인학원 - 감리회 협성 여자신학교 ------- 세월을 1930년부터 1970년대까지 중간의 50여 년 간극을 뛰어넘어 상동신학교 등과 - 협성대학교로
= 스크랜튼과 스크랜튼 대부인의 정신을 잇기위해 삼일학원을 인수하고, 감리회 신학교 그리고 협성부인학원과 감리회 협성 여자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상동신학교 설립해 협성대를 이루게 하다.
1과 2가 1970년대 합동하여 지금의 삼일학원을 이루었다.
*. 매우 어렵게 재탄생되었다. 재래의 삼일학원과 협성신학교의 결합으로 협성대학교가 포함된 신삼일학원 탄생.
*. 오랜 간극이 있어 따로 라 생각하였었으나, 그렇지 않다. 역사는 그렇게 면면히 흐른다.
*. 1970년대 학교 초기 학생들은 주로 공부의 때를 잃어 사회생활을 하다가 오신 분들이 대부분으로 굉장한 사회경험과 재정 능력을 갖춘 분들도 다수 있었으며, 학생때부터 교회를 개척해 목회를 한다든지 하였고, 은혜와 목양 일념으로 무장한 복음의 전사 집단이었다. 지금도 보면 놀라운 면모가 있으며, 그 성정은 변함이 없이 유지되고 있다. 보면 고집스러워. 근데 속엔 이런게 들어있단 말이다.
그리곤 지금까지이다.
한편, 항왜 성전기 삼일학원 설립 대한인들은 이러하다.
*. 초기엔 수원종로교회와 같이 학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향동에 아담스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1) 이하영 : 빼어난 유학자. 목사로 평안도지역 3. 1혁명을 지도하였다.
2) 임면수 :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으로 삼일학원은 민족의 초등 군사기관이었음을 증명한다. 얼마전까지 그때 쓰던 목총이 남아있었다. 상동교회에 있던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와 같은 교육 과정을 거쳤다.
3) 나중석 : 수원의 거부로 학교의 운영 자금을 대었다. 나혜석은 최초의 서양화가이며 오라버니와 함께 3.1 혁명에 참여했다.
4) 김세환 : 삼일여학교의 교감으로 3.1혁명시 서울이남지역 운동의 책임자였다. 올해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정부로 지정받은바 있다. 33인과 더불어 48인이라 일컷는다.
5) 염석주 : 수원의 거부. 삼일학원 출신으로 학교의 운영비를 대었음은 물론이고, 독립 운동가로 수원신간회 부회장과 최용신 전도사의 샘골학원 이사장으로 그를 도왔으며, 자신과 가문의 토지 30만평을 팔아 만주에 100만평 구입하여 추공농장을 설립하고, 독립군의 군량미를 대었다.
이 때 땅을 팔아 만주에 농장을 설립할 때 가문의 일원과는 아무하고도 상의하지 않았는데, 가문 그 어떤 누구도 이의를 제기히지 않았다. 염가들은 즉시 지주의 신분에서 소작인이 되어 땅을 일궈 콩농사를 지어 두부공장을 설립 가문의 생존을 왜적의 탄압으로부터 보위하고 염 지사를 옹위하는 가문이다. 참 대단한 가문이고 감리교인들이다.
6) 차준담 : 황왜 성전 말기 학교 운영비를 책임졌다.
*. 후일 삼일학원 학교명 작명자 이하영에 대해선 따로 상세히 기술한다.
삼일학원 이름의 작명자이기에 특별하다.
*. 상동의 민족정신은 스크랜튼과 대부인 그리고 헐버트, 최병헌과 전덕기, 현순과 손정도, 이필주, 최성모, 신석구, 오화영, 김진호의 목사와 평신도인 이승만,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장지연, 남궁억을 잇는 것으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대한민국 그 자체이며, 현 서울 국립 현충원을 비롯 대전의 국립 현충원의 실제적 주인이 우리 기독교 대한 감리회임을 증거한다.
*. 민족 지도자 양성과 더불어 신앙 선진들을 추모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이다.
이로서 감리교 신학과 목회자 양성은 제일 안정적 체제라는 3두 체제를 완성하엿다.
세 학교가 다른것 같지만 그건 차이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웨슬리언 신학 집단들이었다.
주님 나라 확장과 조국 발전을 위한 단 하나의 필승카드.
합동계열 잡동사니 총회 신학교류와는 비교의 대상도 100년부터도 안되고 지금도 안되는 집단.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같고, 백제의 두레 집단, 신라의 화랑과 같아 그 맥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1000년이
끊어졌다가 20세기에 부활한 민족의 복음의 투사들~ 바로 그들이 우리이다.
민족의 신성지역
세 소도에서 빛다림 받은 이들
지금 몇 명?
현역 10,000여 명.
원로 1,500여 명.
예비 목회자 신학생 700여 명.
더욱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으로 다려져야 하리니.
근데 난 돌아가신 우리 세 소도 출신들은 헤아려보지 못했다. 송구하다.
이제부터 하겠다. 최소한 추도의 예는 올려야 하겟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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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울 대전 수원 감신은 137년의 역사속에 한 차에 세 바퀴로 형성되어진 것이다.
이에, 나는 서울 감신, 대전 감신, 화성 감신의 세 제위들께 제언드리기는 우리들 세 모교에서 애씀으로 민족의 지도자로 배출한 공로 한 분(설립자, 교수 등)들을 정리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건국훈장 추서 청원 운동을 하기를 원한다.
하여, 세 학교는 공히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공로를 세운 교육기관이었음을 증명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 감리교회 선교의 새날을 준비하자.
그렇다.
감신은 자신들의 전신으로 배재 안의 신학회를 시원으로 한다고 2007년 밝혔고, 이에 설립 120주년 학술 심포지움을 열었었다. 여기엔 이주익 목사님, 성백걸 교수님, 유은식 목사님 그리고 나 이렇게 심포를 담당했었다.
이 사실은 서울 감신이든 대전 감신이든 화성 감신이든 조금씩의 차이만 있을뿐 그 시원도 차이가 거의 없고 연원도 목적도 차이가 전혀 없음으로 세개로 나뉘어진 하나의 학교이며, 하여 한 교단의 목회자로 활동하여 온 것이다.
하나로 시작하여 셋으로 나뉘어 지금껏 왔었으니 앞으로 하나의 신학교육 체제와 목회자 양성체제로 환원하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우랴~
*. 다 선교윤허로 시작된 복음의 전파과정에 있어 온 존재들일 뿐이다.
하나님 - 선교윤허 - 선교사 - 우리 민족 - 신학과 목회자와 성도들 - 대한민국의 하나님 - 모두 다의 하나님.
*. 한 마디 덧붙이자.
1. 1948년 감신엔 미군정의 영어군사학교도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의 전신격인 학교다. 학교부지와 시설만 사용한 것인지 어떤 체제였었는지는 100%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감리교회와 감신이 한미동맹의 확실한 한 축이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 영어가 유창하게 되는 거의 유일한 집단이었다.
당시 류형기 박사는 한영사전을 발간하여 떼돈을 벌어들였는데, 그 사전 하나끼고 다니는 것이 대유행이었단다.
류 박사는 그 떼돈을 작은 교회 목회자들에게 다 퍼주었다.
1952년 종전 후엔 더 큰돈을 미국에서 가져다가 다 퍼주기도 했다.
2. 감신에 1970년대에 아주 잠깐 야간 과정이 있었었다.
이 출신들은 자신들을 가르켜 멜기세댁?이라 하여 좀 다르게 인식하였다. 아무 구분도 없는데 그런거다.
지금은 아는 사람도 없다. 잊혀져서. 이런건 잊어도 된다.
문제도 아닌 문제에 집착하지 말자는 말이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