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배를 가르기에 충분한가?

장광호
  • 1551
  • 2020-09-01 02:54:16
시대의 배를 가르기에 충분한가?


2003년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은 수랏간 최고상궁이자 조선 중종의 주치의였던 서정금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일부 사실에 바탕을 둔 픽션으로서, 대충 500년 전 한국 최초 최고의 여의사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생각하면 기억하기가 쉬울 것 같다.

54부작 드라마의 엔딩 장면이 인상 깊다.

당시 여자로서는 감히 꿈꿀 수도 없는 최고의 의사 장금이 중종에게 그 때까지 한 번도 시술된 적이 없는 장 절제수술을 권하게 되는데, 관습에 얽매인 중종은 신료들의 반대 등으로 인하여 수술받기를 거부하다가 죽어가게 되지만, 난산으로 고통 받고 있는 가난한 여인은 장금으로부터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아이와 산부 모두를 살게 되는 장면이 그것이다.

조선 최초의 수술에 성공한 뒤 장금은 자신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면서 따라와 준 남편인 남자에게 “왜 아니 된다 하십니까?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는 멘트를 날린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 드라마의 연출가가 대장금의 입을 빌어 ‘가부장적 세계의 틀 속에 갇혀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더 나가지 못했던 조선의 시대정신을 그 때 수술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시대의 배를 가른 수술!

500년 전에 외과수술을,
그것도 여성이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더라면?

400년 뒤에야 비로소 이화학당에 다니던 김점동이 미국 유학을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3번째, 여자로서는 최초의 정식 여의사가 된 점을 감안한다면 너무나도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는 여성인권 상태에서 이 시대의 배를 가를 수 있는 칼날을 쥐게 된 장금은 당시의 시대적 터부 편견과 맞서 싸우면서 때로는 거대한 벽을 깨야했고 때로는 타고 넘어야했는데 그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신분제도와 사회적 관습에 의해 재산 정도의 취급을 당하는 여자의 소리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를 향해 묵묵히 달려갔던 그 여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대적 난제와 과제 앞에서 멈추지 말고 달려가라며 분발을 촉구한다.

그 장금은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그 시대의 배를 가르는 칼날을 쥐게 될지 전혀 몰랐다. 그런 의도나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알든 모르든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훈련 과정을 묵묵히 다 견뎌내었다. 

때로는 호기심과 배우는 즐거움으로 다가가기도 했지만 때로는 목숨을 수업료로 요구하기에 너무나도 벅차서 거부하고 반항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런 좁고 험한 길을
기꺼이 따라가고 있기는 하는 걸까?


500년 전이나 지금, 
모두 마찬가지로 시대의 배를 갈라서 막혀있는 부분을 절제하는 수술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그 수술 칼은 누가 쥐고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 주어져 있을까?

교회와 목사가 시대의 배를 갈라 막혀있는 것들을 도려내는 칼을 쥐고 있기는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근원적인 물음을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히려 지금의 목사와 교회들은

하나님이 내미시는 칼날을 받아야 되는 존재들로 전락된 것은 아닐까?

교회라는 나와 우리의 장속이 탐욕과 교만으로 찌들고 가득차 있어 아무 것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았기에, 수술 받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는 쓰레기 따위가 되어버린 상태라면?

 
만약
이미 쓰레기로 전락되었다면
.
.

이제 버려져야 한다.


왜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100년전보다 퇴보하고
500년전보다 더 후퇴하려는 것일까?

여성을 해하는 자를 감독으로 만들어준
감리교도들.

교회세습자들을 감독으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 난 감리교도들.

교리와 장정을 짓밟아가면서
감독회장에 등극하겠다고 춤추는 감리교도들이 즐비한 한

국민들은 우리를 쓰레기라고
불러도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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