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종교계 민족운동성과 반역성 개요.

민관기
  • 1208
  • 2020-09-07 02:25:11
각 종교계의 민족운동을 실상을 파악하려면
황실에 대해 선교사/목회자가 어떤 입장을 가졌는가 보면 그 진의가 명확해진다.


보충/궁금한거 있으거나 이의있으면 언제든 글로 말씀하시라.
문자나 전화를 주셔도 된다.
010 3082 7004


*. 선교사와 황실과의 관계 설명

1. 감리교회 – 선비집단이다.
애초에 선교윤허 받은 당사자이다. 충군애국을 기본으로 삼앗다. 나라가 부패하여 썩엇다고 비판하고 무너뜨리려 하지 않앗다.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불경을 저지르지 않았고 황제에게 충성하는 충성심은 옛 절대군주를 추종하는것과 똑같앗고 하나님을 숭상하는 차원과도 같앗다. 나라의 상황을 보존해 나가는 방식의 선교가 감리교회 선교의 기본방향이엇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제로 황제는 감리교회 인사들을 절대 신뢰하여 자신의 신변보호 그리고 외교에서 감리교인들 절대 활용햇으니 이는 충군애국과 어학이 되는 것을 확인햇기 때문이다. 아펜젤러, 스크랜튼 모자, 노블, 헐버트, 하디, 무스, 홀 가족, 무어, 채핀, 리드, 캠벨, 베델, 엘러즈, 전덕기, 이회영, 손정도, 하란사, 이준, 이위종, 이상설, 양기탁, 박은식 등이 황실과 민족운동을 도모한 이들이다.

어느 나라 선교역사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파송된 선교사이나 선교사 본국의 입장과 반대로 피선교인 편을 들엇던 유일한 종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본국 국무부의 훈령을 받은 감리교회 미국 선교본부가 이런 저런 훈령을 내리거나 말거나 니넨 돈이나 보내줘라. 조선 선교는 조선 선교사들이 책임진다는 어떤 이상한 고집의 소유자들이엇다.
심지어 북감리회의 조선 친왜 감독인 해리스를 선교사들이 탄핵하여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도 결행하여 성공시켯다. 스크랜톤과 노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당당한 집안 출신의 강골 선비들이기에 가능햇다.
근데, 이런 사람을 꼴통이라고 한다.


2. 장로교 – 장로회는 본시 능력은 선비이나 하는 짓은 잡상인들이다.

-. 언더우드 – 본시 가문이 장사꾼 집안으로 조선에 와서도 석유, 석탄, 농기구 대리점을 운영하며 자신이 발행하는 조선그리스도신문에 자신 사업의 광고를 항시 1면에 실엇다하는데, 이를 현재의 장로교 사가들은 우리 민족에게 자본주의 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엇다고 한다.

-. 알렌 – 천하의 시정잡배이며 질투로 무장한 사나이다. 성격이 화통하다. 거침이 없다. 광혜원이라는 황제 기관명을 하사받은 알렌은 황제의 하락도 없이 싸가지 없게 자기 맘대로 제중원으로 기관명을 고쳐 불럿다. 자신을 위해 댓가없이 도운 스크랜톤을 엄청 시기햇다. 자신보다 더 좋은 대학 나와서엿다. 알렌은 병원의사보다 미공사관 서기직이 더 좋은 월급을 주자 주저없이 자리를 옮겻다. 알렌이 비운 자리는 캐나다 의사 하디가 담당하다가 빈튼에게 넘겨졋다.

이 후 알렌은 하와이 한인 노동이민 이권사업에 개입하여 송출 두당 얼마씩의 중개 수수료를 받아창겻고, 평안도 운산광산을 미국인에게 채굴권을 주면 이 후 미국정부가 조선을 보호해주는데 핵심역할을 할것이라 알렌방귀를 뀌어 채굴권이 미국인에게 넘어가게 해 결국 1,300만원이라 거금을 미국인이 벌어가게해 대한이 빚을 왜에게 많이지게 되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동인을 제공햇다.
알렌의 일기를 남겨 자신의 사적과 남들의 사적도 정확히 묘사하여 귀한 사료는 남겼다.
[언더우드는 황실하사 선교기관명을 못받아 구세학당이라는 고아학당을 새문안에서 운영햇다.]

-. 빈튼 – 최악의 양아치 싸가지다. 제중원의 공의로 부임하여 치료를 하다가 제중원에서 치료하면 치료비가 병원에 귀속되자 병원문을 일부러 닫고 환자들을 자신의 개인 집으로 오게해 치료해 치료비를 착복하엿다. 그리곤 조선에서 공사관 보다 더 큰 돌집에 살앗다 한다. 미국 남부의 국회의원보다 더 잘살앗다나..

-. 그레함 리는 압록강변의 아름드리 목재 3000여 그루를 베어 밀반출하려다 들켜 세금을 내라고하자 적반하장으로 우리보고 세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자신들에게 조선이 벌금을 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 인사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기독교가 제3세계 가난한 나라 제국주의 착취하는 첨병종교라는 인식을 천주교와 함게 심어준 대표 종교이다.

경기도지역 장로교회사는 한신대 교수 서굉필은 이렇게 증언한다.
수다히 많은 교인들이 31혁명에 참여햇는데 그 증거로 선교사를 돕는 조사 2명이 선교사에게 신고도 없이 사라진 것이 그 증거라고 제시하며, 장로교회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감리교회 장로인 이등박문 안중근의사와 공동저격자 우덕순(우연준 개명 전 이름까지 게시하여 많이 아는척하여 내용의 객관성 높이려는 수작질)게시하며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설명도 못하고, 남궁억의 찬송가를 부르며 애국의지를 다졌고,, 최용신의 이야기을 들어 그를 닮기를 소망했다며 등을 유력한 장로교인으로 설명하는 참 천치같은 짓을 한다.

장로교에 잇어서 황실이란 그저 어떻게하면 영양가잇게 뜯어먹을가가 항상적 연구과제엿나 보다. 선교사 닮아 그런가 정인과란 자는 감/장 공동 발행 찬송가를 자신의 명의로 발행하여 판매하는 만행도 저질럿다.

장로교의 선교사들의 면모가 이러하여 장로교인들은 감리교인들의 인도와 지도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상동파 장로교인들이다. 탁사의 학문으로 전덕기를 지도자로 여운형이 역할을 하여, 이승훈, 안창호, 김규식, 조만식 등이며, 간도의 정재면을 통한 김약연 등이 있다.

*. 미국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여서 황실의 우대를 받았으나, 그에 걸맞는 충성심을 가지진 않았다.


3. 천주교 –
100여 년간 불법선교를 하다 극심한 박해를 받은 천주교는 선교의 합법성을 감리교회를 통해 얻은 다음 지금의 명동에 종현성당을 지으며, 황실보다 높은 위치에 건축하여 황실의 대노를 사 선교중지에 또 극심한 탄압을 부를뻔한 아찔한 상황을 연출햇으며, 성당 건축을 구경하던 상동교인들을 우리 교회 건축 구경을 하는건 불법이라고 죽어라 두들겨 팻고, 황해도에선 장로교인들을 강제 착출하여 성당 건축에 노역을 시켯고, 이재수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제주도의 난에서 제주인의 정서를 개무시하는 선교전략을 구사햇는데 소위, 건방선교이다.

곰방대를 물고 교자를 타고 다니며 부자 행세를하고 거드름을 피어야 가난한 조선인들이 전도가 될거란 또라이 전도법.

황실과는 웬수지간으로 총독부 편에 바싹붙은 친왜 종교의 총아이다.


4. 유교 –
위정척사 입장으로 의병운동에 나섯으나 병력의 열세와 세계사의 조류를 읽지 못하는 오류로 연전연패하여 조선의 민족 아비들의 빛을 낭비시키는 한계를 노정햇다. 허나, 의병전은 민족의 국혼으로 남앗다. 대표 의병장으로 면암 최익현, 운강 이강년, 왕산 허위, 의암 유인석 등이 잇는데 특히 운강 이강년은 의병의 열세를 느껴 연해주와 만주로 이거한 의병진을 방문하여 다시 국내진공하여 싸우자하나 이거 의병들은 힘을 키워 진공하자 하니 운강은 지금 집안에 강도가 들엇는데 언제 힘을 키우고 잇단 말이오~하며 국내로 다시 진입하여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 피체되어 순국당하신다. 운강의 국내 진입시 안중근이 두만강까지 배웅을 나왓다하니 민족의 아비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엿음인가?

결국, 감리교회의 입장인 개화를 받아들여 함께 독립운동 전선으로 상당한 일부의 척사유림이 개신유림화한다.

허나, 3.1혁명시까지도 머리깍은 자들관 국사를 논할 수없다. 독립 선언서에 황제의 복권을 말하지 않는단 수구적인 이유를 들어 민족대표로 유림은 1명도 참여 안햇다. 다만, 혁명후 뒤늦게 깨달은 심산 김창숙이 민족대표로 유림이 하나도 없음을 통탄하고 유림을 대거 모아 파리장서운동인 독립청원운동을 벌인게 고작이나 왜는 그마저도 민족운동이라하여 놀랏다. 그 동안 경학원을 통해 작위, 은사금, 공작한게 얼마인데..
3.1민족대표의 선언서는 독립을 우리 맘대로 선언한것인데, 반해, 유림의 파리장서는 우리 독립시켜주세요~하고 왜에 독립을 부탁하는 운동이엇다.

하물며, 민족대표중 장로교 길선주 목사는 혁명에 참여하고는 피체되엇을 때 자신은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않앗고 인장을 남강 이승훈에게 맡겻더니 맘대로 남강이 찍엇다 햇으며 다만 독립을 원해 청원하는 부탁을 햇노라 법정증언을 하여 무죄방면 되엇으며 이를 본 민족대표들과 교인 등에게 한없는 실망감을 안겨준 이가 길목사이다.
하여, 길선주 목사는 장로교를 대표해 민족대표로 참여햇음에도 건국훈장을 추서받지 못햇다.

당시 길목사에게 화가난 청년들은 길목사를 강단에서 끌어내 내동댕이 쳣다하며 결국 그 교회는 분립되엇다.
*. 헌데 새문안교회 역사관은 길목사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받앗다고 전시하엿다.
있을 수 없는 역사왜곡이다.


한편, 유림은 경술왜란후 왜가 주는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주는걸 10,000명중 6,000여 명이 작위를 받앗고 은사금도 수령하엿으며,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호칭이 변하여 왜의 친왜 유교 기관화되엇을 때, 거기에 주저 앉아 [기독교는 제사를 안드린다. 에미 애비도 몰라본다, 연애당이라느니하며 교회를 비방하는 일]에나 열중한 것이 유림의 대표라는 작자들이다. 천년 유학 맛이갔다.

척사유림과 매국유림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며 아주 일부의 개신유림은 감리교인들과 민족운동을 공동수행햇다.
[감리교회는 구 황실우대라는 보황파의 입장이고, 척사유림은 복벽파라 완전한 절대군주제의 부활을 주장햇다]
-. 위정척사 유교, 복벽 유교
-. 개신 개화 유교
-. 독립 부탁 유교
-. 매국 유교중
감리교회와는 위저척사 유고는 개신 유림화하여 개신 개화 유교와 독립 부탁(청원) 유교가 민족운동을 함께 하였다.


5. 불교 –
1,000여 년 이상의 불교 융성후 조선 500여 년의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는 대부분 폐사되엇고 부분적으로 남아 명맥을 유지하던중 불교대국인 왜와의 수교와 갑오경장으로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정책이 해제되자 불교 승려들은 춤을 추며 좋아햇다. 북한산 일원에는 왜의 왕과 왕족 그리고 귀족 등 총독부 간부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불사가 불같이 일어나 수 천개의 사찰을 헤아렷다 한다.

1909년 경기도의 승려수가 900여 명이엇으나 1912년엔 1,500여 명으로 승려수가 급증햇는데 이는 총독부에 아첨하여 살려고하는 일자 무식쟁이들이 대거 승려가 되엇다는 것이며, 1911년 데라우찌라는 작자가 사찰령을 교시할 때 1) 앞으로 조선불교는 조계종이라한다 2) 조선 불교 대표는 나다 3) 사찰 주지는 내가 임명한다. 4) 앞으로 승려도 고기먹고 혼인해도 된다하자 조선 땡중들 난리치며 기뻐햇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이 딸이 잇엇나?]
불교 승려들은 어쩌다 총독부의 정무총감이 불러 총독부에 다녀오거나 하면 감읍하여 눈물을 흘렷다니 요 근자 무슨 대통령인가 국가 조찬기도회다녀왓다고 뻐기는 목사들들 보다 엄청 더 햇단다.

이 때 친왜화되가는 조선불교에 맞서 불교자주화 운동인 임제종운동이란 것을 일으킨 만해 한용운 선사는 불교의 매국화를 저지하여 불교의 자존감을 수호하려 몸부림쳣다.

왜는 조선에 왜의 불교 일파들을 파견하여 조선불교를 장악하려하기도 햇다. 왜의 조동종이라는 종파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를 짚어먹으려다 실패하기도 햇다.

항일 구국기 불교 평신도 대표는 유명한 이완용이엇다하며, 1900년경 가난한 여성중심 100만 여의 불교가 1930여년경엔 300여 만명의 불자가 잇엇다니.. 그것의 최고 핵심 도량이 서울의 봉은사라 한다. 수원의 용주사, 평창 월정사 등도 그런 차원이엇다 한다.
여성 중심의 민중불교가 남성 지배층 종교화하엿단 증거이다.

300여 만 불자중 독립운동에 참여해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이는 10여 명인데 이는 만해 한용운이나 백용성 승려 이 외에는 거의 참여자가 없엇다는 증거이나, 불교사가들은 셀 수 없는 수다한 불자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햇노라 말로만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데, 심지어 만공 승려가 무엇인가를 누구에겐가 전해주 엇는데, 그것이 독립군 자금일것이라 생각되어 건국훈장 추서를 청원한다니 참 재밋는 인생이구려 들~

거기에 이등박문을 감리교회 인사들 안중근과 우덕순이 처단하자 감리교회 인사들인 양기탁 등은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르고 잔치를 햇으나, 불자들은 안타까이 여겨 장충단에 사당을 세워 박문사라햇으며, 심지어 천주교회는 인천의 여학교 이름을 박문여고라 햇다니 참..
동학에서 떨어져 나온 시천교 놈들은 왜에 사죄단을 보내야 한다며 난리를 ..

게다가 산중종교이며 충군애국도 안하며 어학도 안 되는 불능자들이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엇다.

황실은 눈 안에 없다.


6. 동학 – 천도교 - 시천교
최제우에서 최시형으로 다시 3대 교주 손병희로 교명이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되고 중간에 시천교도들을 교단에서 제명하기도 햇다.
동학은 인류역사에 유일하게 어느 것에 반대해 만든 종교이다. 그냥 우린 서학에 반대하는 동학이다. 세상에 다시 없을 종교명이다.
하여, 위정척사, 개화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조선정부의 부패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하에 조선의 국력을 최고로 갉아먹은 멍충이 종교이다. 우리 감리교회와는 반대로 정부를 돕는 방향이 아닌 그냥 사회변혁이라는 명분하에 반란을 일삼앗으며 민족의 동력을 헛되이 소비하엿다.

이들은 나중에 자신들을 반성하며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개화를 받아들여 청년들을 유학보내기도 햇는데, 이는 감리교회를 보며 반면교사로 삼은 결과이다. 그래 우리가 틀렷어~ 감리교회가 옳앗어~ 근거 잇냐구요?
네.
있습니다.

이겁니다.
전녹두는 봉기 실패후 피체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엇을 때. 내가 오판햇다라고 고백햇다. 무슨 말이냐? 내가 봉기한 것은 오판이엇다. 왜?
왜는 조선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약한 고리가 과연 어디일까를 불철주야 연구한 결과로 조선정부에 제일 불만을 품은 농민이자 종교세력이며, 권력을 잃은 대원군파(쇄국햇기에) 지지자들인 동학에 주목하여 잘 훈련된 간첩을 동학진 안에 침투시켯다.
-. 간첩은 야~ 니네 정부 썩엇어 갈아엎어~를 입에 달고 다닌다.
-. 간첩은 야~ 우리 정부 썩엇어 갈아엎자~라 주장을 한다.
사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정조 사후 거의 100여 년간 부패한 정부에 수탈당한 농민이자 동학도들은 부패척결이란 당연한 의제에 찬성하엿고 반봉건투쟁에 올인하나 그것이 왜가 처놓은 덫이엇다. 조선의 국력을 조선이 갉아먹게하는 전략. 전녹두는 봉기가 끝난후에 이를 깨달앗고 아~ 내가 오판햇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황제 입장에서 동학은 정말 패륜집단이다.
뭐 하나 도움이 된 것이 없엇다.
감리교회처럼 정부를 도와 부국강병과 충군애국으로 나라를 살리는 방향에서 가만히나 잇다가, 유림의 개화에 발을 맞추어 동학의 종교적으로 조직된 힘으로 전민항쟁에 나섯다면 을미왜란. 을사왜란, 정미왜란, 경술왜란은 없엇을 것이라 생각한다.

민족이 갈라져 다른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고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 나중에라도 깨닫고 참회한 천도교는 3. 1혁명시에 주로 농촌의 교인들의 동원하는 능력을 발휘하엿고, 교단의 교주가 교인들의 헌금을 맘대로 사용하는 천도교의 특성상 기독교같이 교회재정을 목사 맘대로 한 푼도 사용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코자 천도교가 거사 자금과 가족원호금을 손정도 목사의 부탁으로 감당하엿다.
근래들어 감리교회와 장로교에 준 자금 만원을 갚으란다. 개인 가족원호금으로 준돈이니 지금의 유족들에게 재주껏 받아가라.

인내천. 사람이 하늘이니 황실이 보일리는 없고.
여성과 어린이도 같은 하늘이라 주장만하고 여성/어린이 교육은 전혀 안해 일자무식으로 방치햇고.
태화관 기생 주옥경을 애첩으로 맞이한 손병희.
해서 거기가 3. 1혁명 독립 선언서 낭독 장소로 결정이 되엇다는.

*. 시천교는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일파로 천하의 매국노질을 했다.


7. 대종교
독립운동 역사상 종교와 운동을 제일 최고로 일체화시킨 종교이다.
허나 대중세가 약햇던 대종교는 스스로만으론 민족운동의 전면을 감당하는건 어려웟기에 감리교회와의 능동적 결합으로 특히 무장투쟁분야에서 특기할 만한 성과를 내엇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인데 감리교회 사령관과 장교들을 지휘관으로 대종교 사병이 중심이 되어 승전햇으며, 이는 대종교 지도부의 군수조달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는 대종교 세력이 대중세를 너무 급격히 잃어 존재감마저도 희미한 실정으로 전국에 수 백여 정도만 남아잇다. 그나마 천도교, 증산교, 기타 민족 종교 등으로 역량이 분산되어 잇다.

황실에 대한 입장은 불분명하며 공화제를 주장한 것 같다.


8. 기타 침례교, 성결교, 성공회, 구세군, 안식교, 기독동신회 등
1890년대 경 감리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선교를 시작하엿으나 민족운동에 기여한 바는 없다. 그저 종교의 존재감만 연명한 정도로 본다. 물론 따라서 민주화과정에도 아무런 공이 없으며 침례교는 오히려 수구군사정권의 수호자가 된 측면이 더 강하다.

그냥 우린 종교로에만 한정해서 봐주세요 종교들이다.


9. 왜색 개신교 조합교회 –
유일선은 조합교회 참여만으로 친일인명사전 등재됨.. 구체적으로 무슨 친왜 행적이 잇는지 잘 모르면서 친왜 종교에 주도적으로 참여만으로 사전에 등재되엇다.

하면 천주교나 불교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것 자체로 친일 매국노여야 하며 조합교회 교인은 3.1혁명엔 민족의 양심으로 수명 정도가 참여햇으나 민족의 거부로 얼마 안 되어 소멸되엇다. 그들은 왜의 주요 기업들인 미쯔비시 등은 조합교회를 적극적으로 키우고자 기부금을 쏟아부엇고 돈 몇 푼에 눈이 먼 얼간이 조선인들이 조합교회에 입교햇으며, 왜적들은 정상적 교회를 출석하는 감리교인들을 겁박하여 조합교회로 강제 개종을 시키기도 햇다

이 자들은 이등박문의 지시대로 아이들에게 눈깔사탕이나 주며 임금(황제)은 오줌싸개라는 서동요를 부르고 다니게 하는 망동을 저질럿다.


10. 무교회주의 - 김교신
유영모, 함석헌, 남강 이승훈(장에서 개종), 유달영 등과 더불어 제도권 교단을 거부한 이들은 비록 왜인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앗으나 민족운동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김교신은 유달영을 통해 최용신의 삶을 엮어 ‘최용신소전’을 펴내 민족의 마지막 생멸의 위기때에 민족을 구하는 건곤일척의 싸움을 이끌어냇다.
2000권 발행해 20여 만명이 돌려 읽엇다하며, “아니 이 어린 처녀도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이겨냇는데 우리도 마지막 힘을 다해 고난을 극복하자”는 뜻에 민족이 공감하엿다 한다.


11. 독립교회 –
만주지역 정통 감리교단을 떠나 우리 교단의 민족운동을 약화시킨 역적 집단이다. 왜적들은 서양종교의 힘을 이용하는 기독교를 적극 경계하여 조선인과 미국인을 결별시키는 일을 항상적으로 추진햇다. 여기에 자주적 한국인들의 교회 형성이라는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 몇 몇 독립교단 교회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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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라 언급의 필요도 없지만 본인들은 상관있다하고, 주류이고 싶어 안달이니
조금만 언급해주면.
12. 해방 이 후 생긴 종교
개신교론 기장과 순복음 등의 오순절 계통이 잇다.
해방 후에 설립된 종교로 민족운동과정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종교들이다.
허나, 기장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특이한 역할을 감당햇는데 이는 교회의 주력이 호남에 기반한 원인과 기장의 원초 주력이 감리교회의 영향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한다.

순복음/은진은 내용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정권의 비호를 받아 급성장한 후 민중빨아 꿀먹기 바쁘다.
천하의 재수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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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욱~ 읽어두시면 각 종교는 대략 이러했구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빙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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