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에 꽂힌 비수.

민관기
  • 1749
  • 2020-09-06 11:16:01
우리 민족과 감리교회 등에 꽂힌 비수.
아프다.
빼라.
지금까지 등에 꽂혀 있어서 못봤다.
왜 아픈지도 몰랐다.



반도 식민사관이다.
이것의 완전한 청산과 민족정신의 회복이 우리의 과제이다.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를 영구지배하려고, 조선정신 말살을 위하여, 우리 역사를 축소, 변조, 신화로 말살한 조선사 35권을 쓰고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우리 학생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켯다.


증거 1.

일찍이 일본이 패망한 후 1945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가 폐지되고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도망가면서 남긴 연설문은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이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한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국민이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놓았다. 결국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여,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 아베 노부유키의 발언이 아베 정권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증거 2.

[먼저 조선인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러므로 조선 민족의 혼, 조선 민족의 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되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모 조상들을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이 기풍이 되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서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갖게하고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하라. 그럴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요사에서 발췌.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가 있습니다.
1. 원구단과 황궁구입니다. (현 조선호텔 터)
원구단(圓丘壇)이란 고종이 1897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건설한 천제단(天祭壇)이며, 황궁우는 같은 자리에 있던 하나님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고종은 문무백관과 백성 그리고 내외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원구단에서 천제를 드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했으며, 황제가 되어 연호를 광무라 하고,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국임을 세계에 선포한 자리입니다,
광무황제는 자신의 아내인 명성황후가 1895년 왜적들에 의해 살해 당하는 을미사변을 격자 극도의 불안감 속에 감/장 선교사들에게 의존하여 살다가 아관파천을 하여 남의 나라 공관에 3년여 간 삽니다. 미 공사관으로 가는 춘생문 사건은 실패하였고, 임금은 살해의 위협속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었습니다.

때에 독립협회는 조직되어지고 감리회인이었던 이들과 후일 감리회인이 되는 이들이 이 독립협회와 독립문의 건립, 독립신문의 발행 그리고 독립공원 조성할 때, 아펜젤러와 벙커 선교사 그리고 배재의 학생들은 공식 행사에서 기도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황제는 이 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특허장을 내주고 내탕금까지 내립니다. 이는 황제와 백성 그리고 선교사들의 합작품입니다.
*. 서재필, 최병헌, 전덕기, 남궁억, 주시경, 김가진 등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을미의병의 발발) -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발기와 발행 – 아관파천 - 원구단과 황궁우의 건설과 황제국 선포 – 감리교회 선교의 개입 그리고 여기에 독립신문에서 민주공화정을 최초로 우리 민족에게 소개하는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절대군주제와 입헌군주제 그리고 민주공화정이란 여려 개로 분화/발전된 정체가 존재한다는걸 최초로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이에 응답하여 독립신문을 전국에 퍼트립니다. 한 부가 발행되어 배부되면 백성들은 순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50~100여 명까지 돌려보았다 합니다. 그리곤, 1907년 상동교회에서 발기된 극일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강령으로 민주공화정은 선택이 되며, 이 인사들에 의해 조직된 상해 임정의 정체로 선택된 후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신문의 발행은 서재필과 아펜젤러였으며, 주시경은 한글판을 헐버트 목사는 영문판을 편집했습니다.
*. 독립신문 기재 민주공화정 보도 - 신민회 강령 선택 - 신민회 인사 상해 임정 민주공화정 선택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일본은 1910년 침략하여 강제로 합병했다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햇다는데. 1913년 우리 민족정신의 구심점인 이 원구단을 파괴하고 철도호텔을 짓고 어쩐 일인지 황궁우는 남겨놓았습니다. 그들도 신을 섬기는 족속이기에 천벌을 받을까 남겨놓았나 봅니다.
우리는 저들의 항복후 제일 먼저 원구단을 복원하고 민족정신에 따라 하나님께 천제를 올려야 했으나, 아직까지 복원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릅니다.


-. 명성황후와 광무황제는 감리교회에 특별한 은혜을 내려 선교윤허를 하신 분들입니다.
-.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그리고 시병원과 보구여관이란 황실기관명도 하사하셨고, 우린 황제와 황태자의 탄생축하예배와 황후의 죽음에 “명성황후 추도예배”로 그 은혜에 보답하였었습니다. 황제는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특허장을 주고 내탕금을 내렸습니다.
-. 황제는 변복을 하고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하셨으며, 왕자는 미국의 웨슬리언대학교로 유학을 보냈고,
-. 외교 특사로
1차로 1905년 해외 외교 특사로 감리회인 대신인 민영환과 한규설 등이 이승만을 을사늑결 저지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였고,
2차로 1905년 감리회 목사 헐버트를 미국에 특사로 파견하며,
3차로 1907년 외교 특사로 감리교회의 목사와 평신도들인 전덕기, 이회영,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하였고,
4차로 1919년 자신은 해외의 신민회 영수 이회영과 국내 신민회의 영수 손정도의 기획으로 북경 방면으로 망명 접부를 수립하려 내탕금을 내려 북경에 동궁을 마련하고, 아들 이강과 감신과 이화의 교수이자 이강의 유학동지인 김(하)란사를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합니다.
*. 감리교회에만 유일하게 충군애국과 외국어 능통자가 동시에 존재


여기엔, 1918년 무오독립선언를 했던 감리교회 망명세력들이 1906년경부터 해외에서 의병운동과 해외 무장운동기지 건설(신흥무관하교)에 나선 결과 이 즈음엔 만주와 연해주엔 5,000여 명의 장교급 무장 병력과 200여 만의 동포 등이 민족 정부를 구성할 만한 수준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정무적 보고와 그에 따른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선교윤허로 조선에 들어온 감리교회는 조선의 국력을 강화시키며, 황실과 백성 그리고 교회를 일체화시키는 선교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이 시기에 일어난 모든 민족 얘국계몽운동엔 감리교회가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언어와 문자생활이 점차 일치되어가 민도는 급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감리회인 만 유일하게 동시에 충군애국과 외국어 능통자가 있습니다. 다른 세력, 곧, 종친, 타 종교들인 유교, 동학, 천주교, 불교, 장로교는 외국어 상용자가 아무도 없거니와 충군애국자도 없습니다. 심지어 언어와 문자생활도 일치하지 않는 상태의 반 문맹상태자가 대다수였습니다.



3.1 혁명의 폭발은 언어와 문자생활을 일치시켯던 감리교인에 의해 주도된건 당연한 일이며, 여성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함도 같은 이치입니다. 일자무식은 독립선언서 100장을 줘도 아무 짝에도 못씁니다. 천도교는 3.1 혁명의 자금을 대었습니다. 감리교회의 감리사 노블은 상해 임정의 건설 재정을 대었습니다.



정리합니다.
선교윤허 – 교회와 학교 병원의 설립 – 민족계몽운동 – 독립애국정신 발양 - 외교투쟁과 무장투쟁 준비 – 3.1혁명 발발과 정부 수립 성공 – 무장투쟁 수행과 독립/광복/항복 달성의 전 과정에 감리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의 결과물은 해방정국과 제 1공화국에서 여실히 나타나 미군정의 대한인 인사들 대부분은 감리회인이고, 제 1공화국의 정/부통령의 출마자, 당선자, 낙선자의 모두 다가(함태영 장로교 목사 제외)감리회인으로만 채워진 것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 정/부통령 = 이승만, 신익희, 조병옥, 신흥우, 조봉암, 이시영, 김성수 이기붕 등이 그들입니다.
*. 미군정 = 안재홍, 윤치영, 유억겸, 황애덕, 최현배, 류동열, 정인보
이묘묵, 오천석, 백낙준, 최규남, 하경덕, 류형기, 정일형, 조병옥, 송흥국 등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와 대한민국은 선교윤허자에 대한 감사의 예를 다하여야 합니다.
선교윤허자가 감리교회를 감리교회는 대한민국을 책임진 것이기에, 이것은 기본도리이고 그들의 뜻을 담은 원구단의 복원은 우리 교회의 과제로 있습니다.
일본의 총리 아베가 국회의원 시절 조선호텔에 묵엇는데, 그 이유가 자신들이 없앤 원구단의 상태를 보려 했다는 것이고, 복원이 안 된 상태를 보고, 아직도 식민지 노예정신 상태로 있음을 알게 되어 침략에 대한 사과는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식민지 반도사관의 실체입니다. 그 실체는 감리교회의 독립운동사를 괘적을 알지 못하게 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민족의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려는 던 조선사 편수회의 술책입니다. 감리교인들은 단 한명도 매국역적이 없으며, 중우원의 고문이나 의원을 지낸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우린 경찰 출신이나 검찰 출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리교인들은 중추원, 경찰, 검찰, 군인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하면 감리교회 나오지도 못합니다.
최소의 기본 정서도 안 맞습니다.]

곧, 조선의 역사를 왜곡함과 동시에
= 감리교인의 독립운동의 실상인 황제와의 운동을 감추는 것.
황제가 감리교인이엇다는 것을 감추는 것.
감리교회가 황제의 뜻을 이었다는 것을 감추는 것과
= 감리교회와 타종교와의 차이를 그냥 비슷한 것처럼 버무리는 것 = 군종제도 설치시 민족운동 미참여종교인 천주교 군사제를 둔 것이 그 사례.
=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등으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식민사학자들의 계략입니다.



2. 반도 식민사관과 민족정신 말살
1922년 왜의 천황 대정은 조선총독부에 명하여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사 35권을 편찬하엿다. 이것이 반도 식민사관이다. 그 내용인즉 우리 민족의 역사는 2,000여 년에 불과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다이며, 일본의 역사는 2,600년으로 엿가락처럼 늘려놓았다.
하여, 우리의 고구려 이 전의 고조선, 부여, 북부여, 진한, 마한, 변한 등의 근 수 천년의 역사는 신화라고 치부하고 말살하였다. 그 수없이 많은 고인돌과 비파형동검과 빗살무늬토기가 뭘말하는지는 관심도 없다.

1945년 광복이후 조선사 편수회 일본학자 금서룡 밑에서 보좌하던 이병도는 광복 후 서울대 교수가 되어, 35권을 우리 말로 번역 정리 [국사대관]이라 하여 발간하니 지금껏 이를 바탕으로 초중고대의 교과서를 만들어 써왔다. 민족정신 말살위해 공드려 만든 그걸 우리가 이렇게 사용하니 민족정신이 제대로 박힐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 세뇌한 대로 출세와 돈, 단합보다는 분열. 그들이 심어놓은 반도 식민사관이다.
민족의 웅혼한 기상은 사라졌고, 맨날 당파싸움이나 했다는 역사는 귀가 아프게 떠든다. 그러니까 너희들고 화합하면 안되고 싸워야 한다. 작은 차이가 어딘데 그냥 넘어가느냐며 선동질을 한다.

허나, 우리에겐 신채호, 장지연, 정인보, 남궁억 등의 감리교회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정신과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 남아있다. 이들의 정신으로 반도 식민사관을 타파함으로 대한인들을 다시 민족의 품으로 감리교회의 품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3. 우리 사회와 교회에 편만해진 반도 식민사관의 2가지 실체가 있다.

%.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이병도 일파는 신사참배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굴복한 것이라 끝임없이 세뇌하였다. 그것은 강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어째든 니네는 우상에게 굴복하였으니 회개하라고 한다. 니네는 죽을 죄를 지은거라 지금도 우긴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부르짓으며 하디까지 동원하여 회개질하는 통에
이병도 일파는 저쪽애서 빙긋^^하고 웃습니다.”


미안하다. 병도야~
*. 신사참배
이젠 안 속는다. 우린 단 한 번도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응한 사례가 단 한 번도 없다.
당연히 회개하지도 않는다. 당시 교인들은 2,200여 개의 신사를 단 3일 만에 다 부숴버렸다. 너희들이 강제로 정신 고문한 신사가 3일이 지나지도 않아 다 부숴진 이유가 뭐겠니? 그것은 우리가 원한 바가 아니며 너희들이 강제한 것 이 외엔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란다.

하여, 우린 신사참배를 강요한 너희의 우두머리 천황에게 정신 고문을 한 죄를 물어 사죄와 배/보상을 청구하겠다.


*. 창씨개명
전 국민이 안 한 사람이 없다고, 전 국민이 다 친일파냐고 우기는 식민사학자들아~
이 전략이 바로 민족 반역자 노릇한 너희들과 우리를 같은 반열에 놓으려하는 전략임을 안다.
이는 또한 반민족 부역질과 변절질한 자들을 옹호하고 보위하기 위한 논리로 개발되었음도 안다.
창씨개명은 다했으니 죄가 아닙니다. 친일은 다 죄가 아닙니다. 다 한 겁니다. 이게 니들의 논리잖아~

우린 정신고문을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으로 당했고, 너흰 민족위에 앉아 꿀을 빨았고, 지금은 그것을 감추고 너희들은 나와 똑같은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이라고 우기는 너희들의 정체를 이제는 똑바로 알게 되었다.


정리하면,
신사참배는 죽을 죄라 생각하게 하고.
창씨개명은 누구나 다 한 건데 다 죄도 아니라고.
하여, 민족 반역자들의 위장막을 만들었다.



[신사 한 개당 얼마 그리고 민족 성원 창씨개명 1인당을 합하여 정신 고문한 댓가를 일본의 천황인 소화에게 묻겟다.]
[강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사죄하고 배/보상을 하라]
강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당한 우리 민족의 성원들은 모두 다 나오시오.
당연히 죄가 없다 할 것이다.
창씨개명 한 것도 부끄럽다하여 그 증거를 대부분은 없앳으나, 남아 있는건 남아있어 역사를 증언한다.
별거 아니고요. 한데, 별거 아닌 이 뒤에 숨어 우린 창씨개명한자들과 비슷하다고 구라치는 민족 반역자는 다 안다고요.
*. 나의 큰고모가 창씨개명하고 보통학교 졸업장을 남겻다. 민병희인데 평촌병희라고.
우리가 동네 학생과 민족 반역자도 구분을 못하겠나?


하여, 우린 이중에서 민족 반역자와 친일 변절자 그리고 친일 부역자는 구분하여 그에 걸맞는 처분을 할 것이다.
내 인간적으로 너희들이 우리의 등에 꽂은 비수는 너희들의 머리에 꽂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따질거 있거나 궁금하면 전화.
010 3082 7004.

빙긋^^


참고)
강제 신사참배에 우린 위장항복하여 건국동맹을 건설하였다. 너희들이 속은 것이다.
감리교회 장로교회의 학생, 농민, 노동자, 지식인 등은 여운형, 이만규, 심명섭 등의 지도자들과 건국을 준비했다.
우린 이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의 망령을 벗어날 것이며, 민족 반역자들에겐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겠다.

이 글과 서울연회원에게 헌정하는 글 2개를 참고하면 일목요연해진다.

이전 홍성호 2020-09-06 저는 여전히 선관위가 안녕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다음 김영민 2020-09-06 닥치고 법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