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

민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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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8 20:50:31
삼일 빛 선언서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 빛으로 빚어진 우리 자녀들은 빛사람이 모인
빛민족이다. 우리라는 말은 나는 나아가니 상대가 넣어주어 너가 되었으며, 나아가고 서로가 넣어주니 울림이 일어나 받침이 탈락하여 우리가 되었으며, 여러곳에서 울림이 일어나니 모둠 현상이 일어나 모두가 되어 빛민족이 되었다. 삼족오는 동물의 상징이 아니다. 셋의 족속과 다섯의 무리가 합해졌다는 것의 상징물이다. 울림이 느낌이 서로 같아 한나라인 고구려를 세웟다는 것이다. 빛민족의 시원은 바이칼호 인근이었다하며 지금도 브리야트족이 사는데 이는 “빛을 이은 알족이 크게 트여졌다”는 뜻으로 현 대한인과 99% 세포구성이 같다 한다. 그러하다. 5만여 년 전 시베리아는 온대기후였던 것이 아기 매머드 화석의 먹이로 완전히 증명되었으며, 소빙하기가 도래하자 빛사람들은 서서히 남하를 시작하여 지금 빛동반도(한반도)로, 섬 곧 이어진 빛사람들인 닛뽄=일본으로, 타이완과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과 현 중국 영토에 각 족속으로 살아가고 있다.

빛은 반짝이는 라이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이프인 삶이다. 빛은 삶이다. 본질적 삶에는 세가지만 있다. 삶과 삼은 같다.
1. 빛삶은 관계를 삼는 것이다. 친구, 벗, 동지, 동료 등 그 관계가 공동체인 씨족과 부족 그리고 나라를 형성한다.
2. 빛삶은 짚세기를 삼는 것이다. 생명체인 빛이 살아가기 위해선 필연적 물질 필요하니 짚세기를 삼는 창조 즉 만듬은 생명들 숙명이다.
3. 빛삶은 빨래 삶기이다. 살다보면 모든 옷이나 인간관계엔 때가 끼기 마련. 비눗물을 사용하여 빨래를 삶듯 인간관계도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 단, 빨래를 삶을 때 기름을 넣어 삶으면 옷감이 쭈그렁해지기에 하면 안되듯, 인간관계에선 끝까지 가는 싸움. 화산같이 폭발하여 온 세상을 태우는 싸움이나, 파란 불꽃이 튀는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듯 싸워서 조율하면 안된다. 그저 숯불처럼 잔잔히 타 검정이 하양으로 점차 사위어 가듯이 1~2미터 앞에 두고 점잖이 대화를 나눔으로 조율해야 함이 마땅하다. 근데, 인류는 그러하지 못했나보다.


빛사람들은 빛마음을 가지고 있다. 머리엔 생각, 가슴엔 느낌, 배속엔 마음이 있다한다. 허나, 손엔 마음은 없으나 배속의 마음을 손에 담아 악수를 한다. 우리는 빛으로 생각, 느낌, 마음을 빛다림하여 온 사람들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느 정도 찌그러지게 되어 있다. 그것을 다리미로 다리듯 다림질을 하는 것이 빛다림이다. 빛다림은 명상이라 불리는 기도로 한다. 기도는 사람의 인체 장기인 기도를 반듯이 유지하므로 가능하다. 마음은 맏/움이란 말이 변한것이다. 처음으로 움틔어 냇으며, 우리에게 말씀이 있음은 세종대왕이 처음 만듬이 아닌. 말은 있었으되 문자는 없을 당시 말씀은 글로 쓰여진 것이며, 쓸개와 같이 써서 쓴소리도 경청할 줄 알아야한다는 의미이며, 말씀은 또한 맏/숨이 변한 말로 곧, 처음 숨이다. 지금 현재 숨을 한숨 한숨 쉬고 잇는 모든 생령들은 맏/숨인 처음/숨을 주어 살아가게 하는 환경 자연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간의 교만 거만 오만이 환경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환경이 생명들을 보호하여 살게한다. 우리는 다만 감사함이다.


빛사람들은 추위를 피해 남하하며 온 곳인 하늘로 다시 돌아가시는 선조들을 땅에 묻고 나무를 심었다. 선조들의 유언은 “내가 죽으면 나무 한 그루 심어다오”였다. 수 만년 전은 빙하기뿐 아니라 화산과 지진 활동이 훨씬 강성하였다한다. 하니, 선조들은 지금의 단전호흡이라 불리는 명상과 기도로 공기중의 유해한 중금속이 흡입된 몸을 스스로 정화시키고 또한, 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 공기 정화에 한 몸이라도 기여케 했다. 동네의 야트막한 산에 있는 큰나무를 보면 빛사람들은 옛 선조들의 뫼라하여 예를 갖추었다. 직계 선조가 아니면 누구의 뫼인지도 모르긴 하나 같은 족속의 뫼임을 의심치 않았다. 이것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대한민국 제 3호 독림유공자 미국인 헐버트 목사가 처음으로 채보한 ‘아리랑’으로 광무황제도 즐겨 불럿다 한다. 아리랑은 “알잇낭”이 변한 말이다. 선조들은 나의 알이다. 낭구인 나무는 선조들의 뫼이니 [알을 이은 낭구]란 말이다. 나무가 곧 세상의 살림이며 생명줄로 또한 우리들의 핏줄임을 선언한 것이다. 나무 앞에서 정성 들여 예 올리는 것을 본 타민족들은 나무의 우람하고 늠름한 모습을 빛사람들이 숭상하는 줄 알고 남근숭배사상종교를 만들기도 했고, 나무의 싱그럽고 푸르른 모습 숭상하는 줄 알고 여근숭배사상종교를 만들기도 했다. 참으로 오랜 세월 착각이 사람들을 고되게하며 종교 갈등이 지금도 계속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하여, 세상은 부드러움과 온화 온유함이 아닌 힘센 숫컷들의 세상으로 점차 바뀌어져 가니 그것의 총화가 제국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군사팟쇼 등이며, 힘센 자가 대장으로 지배하고 숫컷 중심문화로 가부장, 남아선호, 여성천시시대가 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인류가 처음 격엇을 숫컷들의 쿠데타엿다.

허나, 이젠 바뀌어야 한다. 요즘 미투로 세상이 바뀌어가지만 이 땅은 20~30여 년전부터 그 징조가 있었다. 이혼의 폭발적 증가이다. 수 천년간 억눌려온 여성들이 지성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법의 자문과 보호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막을 도리가 별로 없다. 남성들의 자중만이 길이다. 여성들에 의해 수 천년 누적되어온 세상이 재조정되고 있다. 더 빠른 진전을 요구하나 이혼을 부축이진 않는다. 누가 누구를 천시 천대함은 안된다. 지금 전 세계는 전쟁과 폭력의 참화에 시달리며 거기에 아이들과 여성들이 더 큰 고통속에 있다. 모스크나 종탑 그리고 탑으로 상징되는 남성성기 상징물로 나타나는 남성우월문화종교는 하루 속히 시정조율되어야 한다. 제국주의 타승과 극복의 시대는 여성성이 열며 여자가 여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된다.


200여 년전 태어난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했다. 하지만, 우리 빛사람들은 “만국의 여성들이여 일어나라”외친다. 여성은 희생과 헌신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언뜻, 세계 성자들이라 일컷는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의 삶과도 같다. 그들은 우리에게 새 삶 즉, 인간다운 삶인 빛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해준 서있는 빛님들 곧, 선빛이다. 빛은 자빠져 있지 않고 서있다. 나도 너도 우리도 모두가 선빛이었으나 왕조국가가 탄생하며 민족의 선빛인 성직자들이 소도에 살앗엇으나 지금은 완전 소멸되었으며, 솟대와 신성지역이라는 호칭만 남아있고, 소멸되어가며 사라져가며, 군자들이 왕위를 이음이 아닌 못난이도 아들이면 되는 세습이 자행되었기에 빛은 점점 빛을 잃어가 어둠과 차가움 사람으로 전락하여 온 과정이 있다.
허나, 항왜 구국성전기 소도는 다시 교회로 부활하엿으며 민족의 성직자들은 목회자로 다시금 나타낫다.


단군신화를 기록한 일연 승려는 빛사람들을 곰웅 후손이라 했다. 우린 진실로 베어의 후손인가? 그렇지 않다. 곰은 물론 매우 영리한 동물이다. 100가지 이상의 식물을 독초를 구분하여 섭취하는 유일한 동물인데, 소나 토끼 염소 등은 20여 가지의 식물을 섭취한다. 또한, 곰은 자연산 꿀과 로열제리를 인간과 더불어 먹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한데, 사람들은 독초와 독버섯도 제대로 구분 못하여 매년 사망사고가 일어난다. 곰이 사람보다 나은것인가?
일연은 한문어는 알았으나 빛말은 하되 빛글은 몰랐기에 “몸이 고운 빛여성”을 동물로 표기했을 뿐이다. 곰은 [ㅁ몸이 고운]의 줄임말이다. 한문어엔 숫컷 웅과 곰웅 이 외엔 없었기에 곰 웅자를 써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이 그 한계이다.
한편, 곰은 위계가 엄청 중요한 동물이다. 곰은 곰을 보면 서로간 곧바로 서열을 알아차린다 한다. 누가 높은지 알아 싸움을 할 일이 없는 동물이다. 이들은 산란하러 강가로 올라가는 연어를 작은 폭포에서 잡아먹으려 기다릴 때 1등이 젤 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잡아먹고, 2등이 아래서 3등이 그 아래서 연어를 잡아 내장은 먹고 살코기는 버리면, 4등이나 5등은 그 살코기를 주워 먹는다 한다. 영악스럽기 그지없는 동물이다. 이 곰의 후손하고 싶은 사람들은 하면 된다. 웬지 곰의 후손도 좋은 것 같긴하다. 사람보다 나은 측면이 많으니까.


한편, 지금 한글이라 호칭되는 빛글은 세종대왕이 본디 발음되던 빛말을 빛글로 성삼문, 신숙주 등의 학자들을 집현전에 모아 학문케하며, 만주 일원을 방문케하여 어문학을 연구케한 결과 “빛글”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 반포하엿는데, 이는 실용신안특허를 받은 격으로 아예 없던 언어를 글로 새롭게 창제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언문으로 암클로 400여 년을 지내왔나 보다. 조선은 왕의 나라라기 보단 유학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가 전 사회를 지배했다. 빛사람들은 오랜 기간 어둠에 눌리고 덮여있었다. 대몽항쟁기 황폐화되었던 민족은 세종기 살아낫으나, 다시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망가졌다가 병자호란으로 더 망가졌다.
외교안보국방의 중대성을 말해준다. 조선은 숙종기부터 생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대몽항쟁기, 임진왜란기, 병자호란기에 상대적으로 덜 피해를 받은 호남 들녘의 풍요로움 덕분이다. 하여, 민족은 겨우 허기를 면하는 수준은 되었다. 1700년대 들어 조선의 세종을 이은 제 2의 르네쌍스 문화융성기인 영조/ 정조기엔 청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병자란으로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뜻을 펴지 못한채 일찍 서거한다. 아쉬움이 남으나 청국과 교류를 활발히 하던 외교관 역관 상인 들 등이 서학을 유입함과 북학파가 되니 조선이 유학의 공리공론에 빠져 새대안이 민족에게 필요하던 때 실학이 이수광, 유형원, 이익, 정약용, 채제공 등이 연구하기 시작하여 새 조선 건설의 바람이 경기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열풍이 불었다.


하곡, 정제두는 정몽주의 직계후손이다. 하곡의 양명학과 실학 성호 이익 지금 안산 일원에서 만나 서학은 본격적으로 새 조선 건설 대안으로 급부상한다. 허나, 불행히도 영조 정조기는 1800년으로 마감 되며 순종, 헌종, 철종기가 도래하여 66년간 유지된다. 이 시기는 민란의 세기라 한다. 한 해도 그치지 않고 민란이 일어남은 김가나 조가의 세도부패정치 너무 심하여 국력은 점차 쇠잔하여져 갔다. 고종임금 1866년 등극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쇄국을 통한 개혁정치 도모하였으나 그것은 세대 흐름 읽지 못한 오류로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는 면암 최익현을 통해 이하응 탄핵시키고 국가발전전략으로 개화 선택하는 마음 가지게 되었다. 이는 서학, 실학, 양명학의 공이다. 왜가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이라는 조일수호통상조규를 강제 억지로 맺었다하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국제정세엔 약했으나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민족 대안 찾아야 한다는 논의나 연구 재야 선비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일어났기에 강화도조약 10년전인 병인박해로 천주교 서학 신자 8,000 여명을 박해 학살한지 1876년 황제와 황후의 결단이 개화엿다.


한편, 수신사로 도왜한 김옥균 일행. 진일보한 산업 종교 병원 학교 등을 살펴보고 구미제국과의 수교를 건의하는 정무보고 하였을 것임은 자명하다. 1882년 필두로 구미제국과 수교가 연속적으로 이어졌고 보빙사절단 단장으로 미국에간 민자영 명성황후 사촌 동생 민영익은 워싱턴으로 가던중 기차안에서 조선어 왜어 영어를 하던 통역사와 같이 미국인 가우쳐 목사 만났다. 그는 선교 가능성 언급했다. 일개 사절이 국제외교 중대현안 중 하나인 선교 가능성을 언급함은 이미 조선국에서 논의를 거쳤음을 의미하며, 사절단은 외교 경로 통해 미국 방문하였던 것이다. 하여, 조선에도 공식적 허락된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다. 천주교는 100 여년간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선교를 하다 박해 당했다. 남의 나라 사람이 남에 나라와서 나라가 하지 말라는거 하다가 나라의 법을 어겨 처벌받아 죽은걸 순교라고 해야하나?


미국 기독교가 조선에 전래된 이후 조선사회는 대격변 격는다. 1885년 공식적 합법적 선교사로 입국한 선교사 스크랜턴 부부와 모친, 아펜젤러 부부 그리고 총각이던 언더우드 등은 조선 사회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지배층의 자제들이나 하던 학문이 백성 배움화되기 시작. 그것이 곧, 한문 배움에 머물던 서당 향교 성균관을 뛰어넘는 빛글, 한문, 왜어, 영어 등의 배움터 배재학당으로 교명은 고종임금이 현판을 하사하셨다. 또한, 정조임금이나 명성황후도 빛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았으며 명필이엇고, 여성중 일부도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았으나 전면적 여성 배움은 명성황후가 교명을 하사한 스크랜턴 대부인의 이화학당을 통해 일구어져가 여성들은 수 천년 어둠 뚫고 여성 선빛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람함과 늠름함 그리고 힘셈이 판치던 세상에서 군계일학의 여덕장, 지장, 용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기독교파인 감리교회는 여성과 어린이 전용위한 병원을 설립했다. 처음엔 중구 정동에 있다가 민중들이 모여 사는 동대문으로 동대문부인병원을 설립했다. 그곳은 미아리 용두리 왕십리 등 가난한 백성들이 성안에 살지 못하는 지역이다. 로제타 홀이란 미국인 여의사는 일찍이 제임스 홀이란 이와 혼인하였으며 제임스는 1895년 청왜전쟁의 참화를 격은 평양에서 청과 왜를 가리지 않고 부상병들을 치료하다가 질병에 도리어 걸려 사망한 이이다. 로제타는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일할 당시 화상으로 손이 들러붙은 소녀가 왔는데 그 보호자들에게 환자의 엉덩이 살을 떼내 수술울 하여야 한다고 하자 한국인들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였다. 결국, 로제타는 자신의 엉덩이 살을 떼어내 그 소녀의 엉겨 붙은 손을 수술하여 대한인들을 엄청 놀라게 해 동대문교회는 부인병원과 학교와 더불어 융성기를 맞으니 그 담임목사들은 헐버트, 손정도, 이하영 등의 독립유공자로 그 교회엔 전설적 민족 형님 김상옥의사도 그 때에 개종하였다. 교회 근처인 효제동에 살며 효제초등학교를 다닌 김의사가 어찌 감동 안 할 수가 있으랴!


로제타에 의해 대한인 최초 여성 서양의사 탄생했다. 박에스더=김점동이다. 당시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의 관습이었나보다. 본명은 김점동이나 남편인 박유산의 성을 따라 박으로 세례명인 에스더로 박에스더이다. 그녀는 지금의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어 대한인들을 치료한 공으로 광무황제로부터 은장을 수여받았으며, 하란사로 알려진 김란사는 황제의 아들 이강과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언대를 수학한 대한인 최초의 문학사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부인학원 교수와 이화학당의 기숙사 학감을 하며 유관순 열사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이로 하란사는 황제 아들 이강과 “파리강화회의” 참가 공작의 밀명을 황제와 손정도 목사로부터 특사로 임명받았고, 왜에 발각되어 이강은 국내로 송환되고 하란사는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이등박문 첩으로 왜 밀봉교육 받은 배정자란 년에 의해 독살당한다. 배정자는 태평양전쟁기 만주 일원 위안부 운영하던 민족 개년으로 명명한다.

황제 내탕금 내려진 파리강화회의 참가 공작과 북경방면 망명수립 수립 계획 책임을 물어 왜는 1919년 1월 29일 광무황제를 윤덕영을 교사하여 독살하여 붕어시키는 만행을 저질럿다. 당시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듯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듯이 울었다 한다. 강화회의 참가나 망명정부 수립은 해외 신민회 영수 우당 이회영, 국내 신민회 영수 손정도 목사의 기획으로 이루어 졌다. 왜 1918년경부터 망명정부 수립이 논의 결정되엇을까? 그것은 만주 일원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양성한 독립군 장교 4,000여 명과 동포들이 2백만 여 명 거주하여 독립전쟁의 토대가 마련되엇다 판단하엿기 때문으로 이는 1907년 설립된 신민회의 해외무장 운동기지 건설 노선에 의해 달성된 성과엿엇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문 조소앙 작성,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 신채호 작성 추정, 1919년 2.8 동경 대한인 유학생 독립 선언서 춘원 이광수 작성, 1919년 3.1 선언서 육당 최남선과 만해 한용운 작성. 1910년 경술왜란후 절치부심한 민족은 그나마 살아남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보호 받는 교회 중심으로 민족자원 조직을 교회학교 장년 500여 교회 조직하므로 한번도 인정하지 않은 왜라는 존재 즉 식민지 지배를 당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왜 타도 투쟁을 조직 준비했다. 헤이그 특사 정사인 부재 이상설은 일찍이 양명학 연마하고 의정부 참찬 역임한 지금의 부총리급이다. 이준열사 자진 순절자결 하는 등 특사활동 실패후 특사 이전하던 서전서숙 등의 교육활동을 이어가며 1915년 대한 광복군 정부를 구성하나 황제가 아직 살아계신 상태이므로 역모의 의미가 잇어 활동은 정지하니 1903년 홍승하 목사의 하와이 신민회와 같은 성격으로 새백성이라면 역적의 소지가 있어 해산한 것과 같은 것이다. 요즘, 부재의 고향인 충북 진천은 서전학교를 세워 그를 기념한다 하며, 특별히 부재는 왜에 의해 헤이그 특사에 대한 보복으로 일성 이준과 이위종은 무기징역, 부재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미 서거한 이준을 뭘로 무기징역을 살리겠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이상하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세 의사는 특사활동 이후 국내엔 들어와보도 못했으며, 제4의 특사인 헐버트는 자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빛사람들의 각 상징을 주석한다.

태극기를 말한다.
하양빛갈 바탕. 양태극. 4궤로 이루어져 있다.
1. 하양은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했듯 무색무취이나 무색을 표현할 길이 없어 하양을 택했다. 파랑 빛 초록 빛 빨강 빛이 생명체의 근본 세포이며 빛의 본질이다. 이는 33.33000,,3%씩 세가지가 구성되어 있고 0.000,,,1%의 빈틈이 있어 생명체인 빛을 유지한다. 이 빈 틈이 없이 꽉차면 생명체는 돌지 않고 죽는다. 빈틈이 생명 빛유지의 핵이며 생명체 그 본질 자체를 말함이다.
2. 삼태극은 빛이 아닌 빛깔이다. 빛은 빛깔이 없다. 빛깔은 빨강 파랑 노랑 초록빛깔이다. 초록이 빛에서 빛깔이 되었다. 이것이 생명체에서 줄기세포라 불리는 간세포로 초록빛깔이며 약 60조 여개의 세포중 30 여만개라 한다. 본래는 3태극이나 2태극은 노랑빛갈이 탈락한 것으로 33.000....3%에서 3/1이 빠진 것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이 태극은 생명체인 사람의 몸을 뜻한다. 빛인 하양을 바탕으로 몸이 태극으로 표현되었다.
3. 세가지의 빛깔의 합성이 까망이다. 생명체인 빛몸이 4궤로 분화함이다.
1) 3궤는 평민의 삶을 뜻한다.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삶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2) 4궤는 중인의 삶과 같다. 자신의 소득과 재산중 일부는 나누어 주는 삶을 뜻한다. 기부문화의 예이다.
3) 5궤는 선빛의 삶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삶.
4) 6궤는 성직자. 직함의 호칭이 성직자를 말하는건 아니다. 삶이 그러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아낌없이 전 재산과 전 가문 그리고 전 생명을 스스로 내어 놓는다. 그 가문으로 유관순가, 구연영가, 이규갑가, 이회영가, 이강년가 등이 있다. 스스로 하는자만이 스승이다. 스스에서 스의 ㅇ이응이 빠졋다. 스승에서 스님과 승려가 분화되엇다.


무궁화이다.
남궁억 장로가 전국으로 보급했다한다. 전국 무궁화 나무는 100년이 넘은 나무가 없다. 이는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왜에 의해 제거되었는데 다행히 인천 강화에 거의 백년의 나무 그리고 경기 안산에 70~80여 년생 나무가 있을 뿐으로 나무들은 남궁억 장로가 전국의 학교와 교회에 뽕나무로 위장하여 보급 이후 다 제거햇다. 하여, 없다. 무궁화는 끝없이 무수하게 꽃을 구워낸다는 이름 뜻을 가지고 있다.
*. 강화는 모르나 안산의 무궁화 나무는 심은 이가 밝혀져 잇다.


애국가이다.
작사는 명확하진 않지만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윤치호이다. 작곡자는 안익태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분이다. 둘다 친일의 행적이 있다하는 의심을 받고 있긴 하다. 하나, 국민의례로 항시 불려진다. 국민은 황국신민의 약자이다. 백성이라하면 웬지 봉건적인것 같긴 하나 백성이 맞다.


대한민국이다.
1919년 상해임정 창립시 이름지어졌다. 대한제국기. 발행인 아펜젤러, 책임 송재 서재필, 빛글 편집 한흰샘 주시경, 영문 편집 헐버트 등의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갑신정변으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한인 처음으로 미국여성과 혼인하고 미국 의사가 되고 이름까지 필립 제이슨이라 하였고 수배가 해제되어 입국 독립협회 결성, 독립문 건립, 친청 사대의 상징물 영은문 허물고 독립관 건축, 독립공원 조성. 이에는 광무황제의 내탕금이 내려졌다. 이 신문엔 절대군주제, 입헌군주제, 민주공화정이 소개되었다. 조선을 민주공화정으로 바꾸고 싶은 아펜젤러의 의도였다. 일종의 역적질이었다. 황제가 엄연히 살아계신데 보도한 것이다.

새 백성모임. 신민회는 1907년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봉운 전덕기, 운강 양기탁,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도산 안창호 등과 외국인으론 헐버트와 베델이 참여했다. 일설에는 이들이 운영하던 학교의 학생과 부모를 합해 왜는 회원수를 30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방향은 맞았지만 국사를 함께 황제와 논의하지 않는 미공개 비밀조직으로 극일결사를 추구하며, 민주공화제를 강령으로 채택했다. 당시는 을사늑결 이후로 나라가 외교권을 잃은 상태였으며, 헤이그 특사, 그로 인한 황제 강제 퇴위와 융희황제 즉위, 군대 강제 해산으로 인한 박승환 대령의 자결로 인한 대한제국 8,000 여의 군사들이 의병진에 참여하여 의병운동이 전쟁의 수준으로 격상된 시기이기도 하다. 황제와 외교를 의논하며 국정을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전환하는 강령을 채택한 것이다.

하여, 대한민국이란 국호인 “큰빛백성나라”가 건국되엇다. 이걸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라하니 좀 어렵긴하다. 정체는 민주공화정 대통령제로 우남 이승만 대통령,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와 대부분(최재형 재정총장 제외) 과거 신민회 인사들이 각 부총장과 차장이 되었으며, 단 며칠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석오 이동녕에 의해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해석-바다의 돌 “독도”를 호로 하는 손정도가 의정원 의장을 곧바로 이었다. 그리고 경무국장은 역시 신민회 출신인 백범 김구가 하여 실질적 사법부의 수장이 되었다.
*. 초대 수반
행정 : 이승만. 입법 : 손정도. 사법(검경 기능) : 김구 = 모두 감리교인이다.

한편, 임정은 상해에만 건설되엇던건 아니다. 한성과 연해주 등 총 6개의 임정이 설립되었엇으나 상해로 33인에 의해 미리 특파되어잇던 현순 목사에 의해 통합되엇는데, 이는 각 정부에 관계하던 인물들이 대개의 경우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민회원들이엇으며, 현순이 전덕기 목사를 도와 상동교회의 부담임목사를 역임하엿엇고, 노블 선교사에 의해 장년주일하교 총장에 임명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갖춘 리더쉽이 작동된 결과이다. 또한, 33인과 현순 그리고 손정도는 31선언 이전 북경방면에 망명정부 수립을 추진하다가 황제의 붕어로 좌초되자 급 방향을 상해로 조절하여 정부를 수립하기로 내약을 한 상태엿다.
이로보아 상해임정은 경술왜란으로 민족정부를 잃은지 10여 년만에 민족정통 정부를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건국되엇다는 의미가 잇다.


현 대한민국 헌법 효시이다. 앞서 말했듯 을미, 을사, 정미, 경술왜란. 그리고 또한 앞서 말한 전국 교회의 장년주일학교 조직. 그렇게 민족은 1919년 3월을 행해 나아갔다. 물론, 이는 광무황제의 급붕어로 준비된것에 한서린 민족의 봉기이며, 독립을 해달라거나하는 구걸이 아닌 우리는 우리가 국가간 합병을 찬성한 적이 없이 찬탈 당한것이므로 3.1선언서로 선언한 것이다. 왜의 동의를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선언하엿으니 그에 맞는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대한민국 신대한국으로 1919년 4월 13일 건국되엇고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왜적은 항복한 것이다. 광복절 아니다. 항복절이며 전승절이다.


빛사람들은 중요 행사때 의례를 한다.
1.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 또한 요즘엔 민주영령이나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추모도 한다. 허나, 25,000 여명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식적 인정받아 훈장 추서된 독립유공자중 순국선열은 3,500 여명이다. 순국선열은 왜에 의해 직접 살해를 당한 선열로 병사하거나 광복 이후 돌아가신 선열은 순국선열이 아닌 애국선열이다. 하여, 순국선열, 애국선열, 호국영령, 민주영령, 세월호 희생자 구분하여 호칭하고 추모되어야 한다. 지금 옛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사이엔 옛 독립관을 복원한 “순국선열위패봉안소”가 잇고 거기에 위패가 3,500 여명 안치되어 있다.
하여,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만 하면 나머지 21,500여 영령은 빼고 추모하는 격이 된다.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정확한 워딩은 “순국선열과 애국선열 그리고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이 잇겟습니다. 묵념”해야 정확한 것이다. 실수로 모욕하지 말고 국가보훈 개념을 정확히 인지하고 실행하자.

기분 나쁘지만 왜의 야스쿠니신사와 같은 격이다. 그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전범이고 우린 피를 흘려 조국 사수한 인류평화 전사들이다. 허나, 순국선열은 3,500여명 일수가 없다. 이름없이 돌아가신 의병들과 3.1 선언으로 돌아가신 7,500 여 영령들은 이름도 사진도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수 만중 3,500여 명만 위패가 봉안된 것이다. 더욱이 자리가 50여 평 밖에 안되어 더 이상 순국선열로 밝혀 진다하여도 위패를 놓을 자리조차 없다. 순국선열 추모관이 대규모로 안정적이고 상징적인 장소에 건립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찾자. 이름이라도. 초기 의병운동가들. 초기 민족운동 서거하여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이들.
왜의 전범 봉안소 야스쿠니는 50,000여 평이란다.
우린 무명 선열과 무후 선열을 어떻게 기려야 하나?

2. 애국가 제창 한다.
4절까지 전 국민이 아는 바이다.


3. 태극기에 대한 예를 표하며 이렇게 맹세한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4. 또한, 우리는 삼일절 노래를 부른다. 기미년 삼일일일 저엉오~하눈 정인보 작사 노랫말이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민국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의 우리의 의요란 가사로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여 이 날을 길이 빛내자이다.


5. 유관순 누나 언니 노래도 부른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여성들은 언니로 바꾸어 부르라. 옥속에 갖혀서도 만세를 이신애와 어윤희와 부르던 누님. 10대의 나이에 왜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 투쟁 정신은 어찌 나왔을까?
유관순 누이의 기도문이 독립기념관 뒤편의 어록비에 잇다.


보라. 이제 세계 인류여~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지만 대한은 세계의 등불 = 빛이라 했다. 다만, 빛에 대한 인식이 천박하긴 하지만 말이다. 빛은 라이트가 아니며 라이프이니 등불민족이란 높여준다는 의미로 부르긴햇으나 본질에선 벗어난 표현이다.
또한, 중국 초대 공산주의자 진독수도 말했다. 우리는 과학주의란 이름으로 종교를 경멸했지만 한국의 3.1선언과 행위 보니 종교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 왜 15가지 죄목과 유언 기록한다]
1. 명성황후 시해 2. 광무황제 폐위 3. 을사5늑결과 정미7늑결 강제 체결 4. 무고한 대한인 학살 5. 정권 강제 찬탈 6. 철도, 광산, 산림 등 강탈 7. 제일은행권 지폐 발행 맘대로 사용8. 군대해산 9. 교육방해와 신문구독중지 10. 대한인 외국유학중지 11. 교과서 압수와 불태운 것 12. 대한인이 왜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는 거짓말을 퍼트린 것 13. 현재 대한과 왜 사이에 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대한이 태평무사한것처럼 왜왕을 속인 것 14. 동양평화 깨트림 15. 현 왜왕의 선제를 죽인 죄이다라고 안의사는 법정에서 발언했다.


“너희는 내 마지막 유언을 꼭 지켜주기 바란다. 내가 죽은 후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는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라고 알려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또한 도마 안중근은 법정 최후 진술에서
‘헐버트 목사님은 우리 민족 최고의 은인’이라고 햇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찌 천주교 영세를 받앗다는 안의사에게서 이런 충격적인 말이? 자신이 언제 헐버트 목사님을 보앗으며 그 분의 행적을 어찌 알앗다고?

경위가 이러하다.
안중근은 민족의식이 깬 이 후 우리 민족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 판단하여 명동성당의 뮈텔주교를 황해도 청운동으로부터 3번 찾아 우리 나라에 저명한 선비교수들을 청빙하여 대학을 세워줄 것을 건의간청하엿으나 뮈텔은 평신도가 많이 알면 신앙떨어진다 연거푸 거절하자 천주교 신앙은 유지하나 프랑스는 거부키로 결심하고 자신의 고향에 학교를 직접 세워 운영하엿는데, 이의 모델이 상동교회에 잇던 공옥학교와 상동청년학원 YMCA 학교 등의 민족주의 교회교육기관이엇다. 명동성당은 바로 아래로는 상동교회가 잇엇고 위로는 황성기독교청년회관이 잇엇으며 이를 연결한 이는 백범 김구로 김구가 젊은 시절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해 패전하고 안의사 부친 안태훈 진사댁에 거할시 안중근과 김구는 친우로 지냇고 김구가 후일 진남포감리교회 청년회 총무로 재직하며 상동교회를 드나들며 을사늑결철폐 도끼 상소 투쟁 등을 할시가 같은 시기로 안중근은 김구의 소개로 상동교회, YMCA, 동대문교회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헐버트를 목격하고 만나며 지도를 받앗을 것이며, 헐버트 목사의 황제 특사활동 또한 정확히 인지하엿을 것인데, 이는 대한매일신보가 헤이그의 이준열사 순절 소식을 보도하는 것으로 헐버트 목사의 소식도 같이 알게 되엇다는 점이다. 안의사가 결사투쟁을 결심하고 연해주의 만주로 망명하여 의병전에 나서고 이등박문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목숨을 걸 수 잇엇던 것은 이준 열사의 서거보도를 보고 결심함이 아닌가 한다. 누가 알랴마는..

하여, 안의사가 감리교회로 개종하게 되엇다는 것은 향후 안의사 순국 이 후에 감리교인들과의 교유로 증명되는데 이가 안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손정도 목사가 상해에서 돌보고, 안의사의 동생들이 김구의 비서진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증명되는 것이다. 천주교는 안의사를 살인죄로 1910년 제명한 후 1995년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채 천주교인으로 복권을 시켯는데 이는 명동성당 지하실에서 당시 뫼텔주교의 일기장이 발견되어 번역을 해보니 뫼텔이 안의사의 청을 거절햇고, 뫼텔이 전국의 사제들에게 명하여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기록해 보고토록 햇으며, 자신은 이를 총독부 정무총감 아카시에게 보고하여 좁은 명동성당의 입구를 넓게 하는 허가를 받앗고, 총독부는 이를 활용하여 안악사건, 신민회로 인한 105인 사건 그리고 테라우찌암살음모사건, 무관학교 설립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게 되어 반일민족주의 세력이 일망타진 되엇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일기엿다. 천주교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잇다.

안의사는 천주교 영세를 받앗으나 그것을 뒤로하고 삶인 민족운동은 감리교인들과 벌엿으며 실질적으론 감리교인으로 개종하엿다. 천주교는 마지막 종부성사도 11번이나 거절한 패륜종교이다. 빌헬름 사제가 뮈텔의 명을 어기고 안의사의 종부성사를 해주엇다가 퇴출의 위기를 격자 신자들의 고해성사 정보를 유출하엿고 빌헬름 사제는 본국으로 귀국한 연후에야 자신이 격은 일을 고백할 수 잇엇다.

안의사의 최후 법정 진술은 진실이다. 자신의 죽음을 앞둔 시점 그 아까운 시간에 쓸데없는 거짓을 하엿을리는 없다.


우리는 을사, 을미, 정미, 경술왜란중 30 여명의 자진 자결 순절지사가 있다. 계정 민영환. 이후 충정공 시호 내려졌다. 의정부 참찬 역임한 조병세, 주영대리공사 이한응, 송병선, 정재홍, 매천 황현 등이다. 이 중 민연환, 이한응, 정재홍, 황현 등이 감리교인이다. 장로교는 자살을 죄라하여 이들 민족지사를 추도하지 않앗으나 감리교회는 감리교인이라서가 아니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침은 자살이라는 죄와는 다르다 하엿다.
목숨을 바쳐 왜적과 싸움은 순절자만이 아니다. 의병진이다. 특별히 현 의병들의 후손들은 3대가 거의 다 지나 훈장추서로 인한 국가 연금을 못받고 있는 실정으로 우리가 그들을 살펴야 한다.


동학에서 떨어져 나와 시천교를 만든이가 있다. 이용구이다. 일진회를 구성하여 일한합방 요청서를 왜의 황제라는 자에게 요청했다. 민족 최대의 치욕 문건이다. 송병준도 같이 햇다나보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급이다. 다만, 일반인의 신분이었다.


빛사람들은 민족정부재건 계획을 3.1혁명 이전 이미 세웠다. 목사였던 현순, 손정도 그리고 민족대표 서명자인 김병조 목사가 상해로 특파되었다. 김병조가 외국으로 탈출했다는 설은 썰일뿐으로 고인에 대한 망언이다. 감리회 감리사였던 노블 선교사는 노경태란 청년이 학살 현장인 제암리 교회를 탈출하여 그 먼곳인 한양 노블 선교사 집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노블은 스코필드에겐 현장을 확인할것을... 본인은 하세가와 총독에게 강력항의하여 제암리, 수촌리, 화수리, 사강리교회와 그리고 700여 호에 달하는 민가의 방화로 발생한 유민들 원호를 하게 하는 공도 세웠으며 특히, 상해임정에 1만불을 현순에게 송금하여 건국 자금으로 활용케 하였다. 이는 현순과 손정도가 목사로 있던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 였었
기 때문이며 노블의 사택과 광무황제의 덕수궁엔 비밀 통로도 있었다 한다. 이를 통해 민족진영은 비밀리 민족정부 재건을 도모한 것이다.
*. 당시 1인의 1일 노임 10센트



3.1혁명은 그 중심이 경부, 경원, 경의선을 축으로 전개되었다. 선언서 전달은 이미 개화되어 정갈한 영성과 민족의식으로 무장되어있었던 전도부인들과 기독교 학생들이 전국에 배포하였다. 전 백성의 10%인 200만이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시켜 주세요라고 구걸하지 않았다. 니들도 일방적으로 역적 동원하여 황제 뜻과 달리 인장을 구라로 찍었으니 우리는 인정못하며 더구나 황후에 이어 황제까지 살해한 왜에게 독립을 구걸할 일은 절대 없었다. 진실로 그러했다. 유교는 위정척사 의병운동, 동학은 결과적으로 그나마 남은 조선의 국력을 갉아먹었으며 이는 피체된 녹두 전봉준도 스스로 인정하여 “내가 오판 하였다”라고 처형 직전 말했다. 천주교는 개신교의 물량 선교공세에 질투하여 왜에 협조했다. 자신들은 100 여년전 먼저 들어와 순교의 피를 흘렷는데 개신교는 아무것도 한게 없이 선교 성과를 얻으니 그러했던 것이다. 사실상 미국은 당시 식민지가 없었으나 프랑스는 전 세계에 수 없는 식민지를 거느려 천주교가 국교이던 프랑스는 줄 돈도 인력도 부족하였으니 명동성당 뫼텔 대주교로선 어쩔 수 없는 대왜 협조책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는 교인들의 고해성사를 조선 통감부 아카시 정무총감에게 보고하였노라고 자신의 일기에 썻다. 그 댓가로 명동성당의 좁은 길을 넓혀주어 1980년대 민주화 운동 활동터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곳은 감리교인 이재명의사가 민족의 역적 이완용을 칼로 저격한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경부, 경원, 경의 축으로 전개된 독립 선언은 농촌으로 전국의 모든 고을로 전파되어졋다. 도시에서 먼저 경험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거사를 기획하고 일으킨 것이다.
전국의 교회 거기에 이미 준비되어잇엇던 장년 조직들은 그 힘을 독립선언에 실엇다.



왜 어찌하여 광무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막중한 국가사인 특사로 임명 파견하였을까? 기본은 충군 애국이다. 황제 뜻 거스리지 않고 도우며 영어 등 외국어 사용자이다. 해야, 소통이 외교무대에서 가능하니. 하여, 헐버트 목사의 안내로 전덕기 목사, 우당 이회영 권사, 우강 양기탁 등의 논의로 황제에게 건의되어 부재 이상설, 일성 이준, 주러공사 이범진 아들로 외국어 능통자 이위종이 특사로 세계평화운동사의 처음 금자탑이 이준의 자진순절로 세워졌다. 특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진순절한 최초의 사례가 이준열사로 민영환을 이어 전 민족을 슬프게 만들엇고 조선 청년들에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결사정신을 배태시켯다.


의거가 일어났다.
1907년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샌프란스시코 사살. 여기엔 자국 국민 죽인 양의사 변호한 3인의 미국인 변호사가 있어 사형 면케 하였으며, 당시 이승만은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 했고, 초대 북남감리교회 합동 교회인 기독교 조선 감리회 총리사가 된 양주삼은 상항에서 “대도”지를 발행하며 살해는 신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금 그 문서들이 현존한다. 물론, 이전에 전덕기 목사와 정순만은 1905년 평안도 장사 50 여인을 상동교회에서 훈련시켜 민족역적 철천지 원쑤들을 처단하려 하기도 했다. 1909년 이등박문 사살한 도마 안중근과 우덕순 장로와 그 동지들. 그 해 이재명의사의 명동성당 앞에서의 이완용 단칼처단 기도. 완용이는 민족의 철천지 원쑤이었다. 그를 처단하는 데는 실패하여 죽이는데는 실패했으나 중상은 입혓으며, 완용이는 온양온천에 요양 가고 수 백만원 위로금 받았다 한다. 쌀값은 10원인데... 이의사는 감리교인이었다. 초등학교 정도 학력이다. 1905년 하와이 노동이민자 출신이다. 이준 열사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였다는 소식듣고 상항의 공동회 자리에서 위국헌신 천명하고 매국노 처단 동포들에게 약속했다. 이의사는 처음엔 이등박문 처단하려 하였으나 안중근이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완용이, 이용구, 송병준 처단 결심. 이 무렵 일한합방 상소라는 전대미문 민족반역문서가 있었다. 합방상소 내며 이등박문 죽음에 대한 사죄단 왜에 보내자고 주장했다. 보자. “일진회장 신 이용구 등 100백만 회원은 2천만 신민 대표하여 대황제 폐하께 상언 하나이다. 일한합방을 창성하여 영구히 신성구궁한 덕택을 누리시기 기원하나이다”란 개쌍소리이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개화 반대에서 찬성하며 청년 50 여명을 왜로 근대지식 향상위해 유학보낸다. 이용구 등. 천도교에서 시천교가 된 무리들을 교단에서 제명한다. 완용이 처단은 이의사 혼자 거사 한것 아니다. 김정익, 이동수 김이걸 등 15명이 있었다. 재명은 1심과 2심에서 사형판결 받았다. 그는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는 열변 재판정에서 하였으며, “무리하고 불공평한 형벌로 나의 생명 빼앗기는 하나 내 속의 충의혼담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내 영혼은 영원히 살아 생전에 이루지 못한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리라”하였으며 당시 21세이던 아내 오인성은 “완용이가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사형이 웬말이냐”외쳤다. 1910년 9월 21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사형 집행 받게된 이의사는 평소 부르던 찬송 “예수가 거느리시니”를 불렀고 재명은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내가 땅에 묻히는 날 수백 수천의 이재명이 자라날 것이니 이것은 한 개의 씨앗이 수백 수천의 벼이삭을 낳은 것과 같다. 오늘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너희는 통감부를 철거하고 5조약 7조약을 모두 철회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뒷날 일본은 큰 화를 당할 것이다”유언하고 예언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완용이는 총리대신, 백작, 총독부 중추원고문, 조선귀족원 회원, 후작에 올라 1926년 69세로 뒈질때까지 호의호식했고 후손들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지금도 엄청 부자란다. 이런 썩을... 한편 완용이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완용이를 매국노에서 빼주면 재산을 기부하겠하고 한단다. 그냥 강제 수용하라.


의병도 일어났다.
의병은 수 천년전부터 일반 백성이 일어낫으니 백암 박은식 상해임정 2대 대통령은 의병을 이를 국혼이라 명명하였다. 을미왜란부터 시작된 의병. 을사와 정미왜란 거쳐 1913년 호남의병을 마지막으로 국내 의병 소멸. 허나, 일찍이 무력 열세를 절감한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재기 도모하였다. 이들이 류관순의 인척으로 정신적 지주인 의암 류인석. 그는 황제로부터 정남대도독 제수받고 대성통곡하며 감사 예를 표했으며, 안중근과 이범윤 그리고 우덕순 등 의병들과 국내를 피해 무장 투쟁 벌였다. 이중 주목할 인물이 있다. 의병대장이며 도체찰사 곧, 계엄군사령관으로 황제로부터 임명받았고 의병진들로부터 도창의대장인 국방장관으로 추대되어 의병전쟁 이끌다 1907년 왜의 총탄에 복숭아뼈를 맞아 피체된 운강 이강년이다. 문경 사람으로 군부의 특진관을 지냈다. 을미, 을사, 정이 의병에 모두 대장이었다. 모든 재산을 털었으며 아들 또한 의병에 참여 순국하였고 이의 후손이 순국선열유족회 회장 지낸 이인규님이다. 의병들은 독립군으로 3.1혁명 이 후 전환하였다.

운강은 연해주를 방문 의암 유인석 등에게 국내 진공투쟁을 벌이자하나 의암 등이 우리 힘을 더 길러 싸우자하니 ‘지금 집에 강도가 들엇는데 언제 힘을 길러 싸운단 말이오’하며 국내로 홀로 돌아오는 길을 안중근 의사가 두만강까지 배웅햇으며, 운강은 귀국하여 전열을 가다듬어 싸우다 피체 순국 당하시니 그가 진정한 민족의 아비가 아닌가?

쓸데없는 국부논쟁 하지 말자. 이강년이 우리의 국부이시다.


신흥무관학교.
의병 한계 명확했다. 상대는 개털링 기관총 갈겨대는데 최신무기가 화승총이다. 나머진 죽창, 칼, 낫, 쇠스랑 등이다. 아무리 용감해도 상대 안된다. 하여, 지사들은 우당 이회영일가, 김동삼일가 등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비롯한 신민회인들과 협의하여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하기로 하였다. 이회영 일가의 재산처분. 지금 가치로 당시 600만원이었으니 현 3000억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 재정이 투입되어 농군들인 의병과 학생인 무관지망생들은 항왜구국성전 구국간성으로 탄생된다. 죽창무장에서 장교로 3,500 여명이 탄생했다. 이들은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강행군 산악행군하며 체력을 기르곤 했다. 지금으로 치면 천리행군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체력은 무척 강하되 확보된 무기가 없엇다. 그 때 대종교를 창설한 나철, 기산도를 비롯한 이들이 러시아의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연해주에 와있던 체코군 무기를 매우 싼값에 사들여 독립군에게 제공한다. 하여, 감리교인 김좌진과 대종교 일반군사들 그리고 감리교회 장교들로 진용이 완성되어 완벽한 체력과 무기 구비했다. 야포에 포탄, 장총과 총알, 권총에 총알 등이 아주 매우 많이 충분히 매우 값싸게 어차피 본국으로 무거운것을 들고 가야하는 수고를 우리 민족이 덜어주었다. 체코군에게 대종교의 지도자들이 값싸게 확보한 것이다. 그 무기들은 감리회 신흥무관학교 출신 장교들에게 전달되었다. 하니, 승전한 것인가? 허나, 어떤 이는 말한다. 봉오동, 청산리대첩의 보복으로 왜가 동포들을 대량 학살했다고. 그들이야 항상 그렇키는 하다. 경기 화성 발안에서 왜헌 한 명 죽었는데 29명 교회에 가두고 죽이고 교회 4곳 불태우고 민가는 700 여호 방화하는 족속들이니 뭘 말할까?


상해임정은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다.
한성, 상해, 러령 등에 정부 구성되었으나, 그들은 1907년과 그 이전부터 민족운동과 신민회 활동을 비밀리에 미공개로 하여오던 이들이다. 그들은 상동교회로부터 함께한 인사들이기에 길지 않은 기간 상해임정으로 통합되었는데, 이의 주역이 감리회 출신 목사 현순이다. 그는 설립 주역이면서 각 부 총장을 사양하였고 내무차장이 되어 모든 실무 감당하였다. 겸손함이다.


태평양 전쟁 났다.
왜의 하와이 기습공격이다. 일찍이 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로부터 처음 세례 받은 이이다. 하츠가와 데쓰야. 왜 공사관 참사. 참사는 정보관으로 아펜젤러가 한양으로 입경 못할 시 제물포 대불호텔에 함께 30 여일간 머물럿다 한다. 사실상 왜 밀봉교육기간인 셈이다. 사실로도 그러했다. 아펜젤러는 우리 민족에 기여한 바도 지대하지만 왜의 기관지에 투고를 하는 등 친왜 활동도 했다. 다만, 그는 나중 빛민족 성정 깨닫고 친왜활동 중단했다. 데쓰야는 하와이 총영사로 재직하며 하와이 산정상에서 왜의 해군에게 무전을 날려 미국해군들의 위치와 움직임 등을 알렸다. 한편, 대한인들은 태평양전쟁에 자발적 미주한인들이 미군으로 참전했으며, 임정은 광복군 제 1. 2. 3지대 창군하고 OSS부대 창설 훈련도 미군과 함께 하였다. 하여, 미얀마까지 진출 참전하고 왜어를 할줄 알아 대왜 심리전에 능하였다.
한 때는 왜와 동맹이던 미국과 영국 전쟁국되어 한판 승부 벌어졌다. 허나, 미국은 대한민국 임정과 광복군 참전, 태평양전쟁 자발적 참전인들을 인정하지 않으니 도대체 미국 생각은 무엇인가? 미국은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규 어겼다. 그들은 대한인 배신한 것이다. 이를 헐버트 목사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한인 배신했다고 자국 대통령 비판했다.


전범국인 독일은 2개국으로 오스트리아는 4개국으로 분단시켰으나 왜에는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대한을 남북 분단. 이유야 있겠지만 왜가 오히려 풍신수길의 왜 통일전 상태로 분단되었어야 마땅하다. 결국, 대한은 남북으로 갈라져 지금껏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중에 일어난 제주 4.3사건, 대구사건, 여순사건, 파르티잔들의 산중 싸움과 6.25 전쟁기 대규모로 발생한 민간인들에 대한 대학살. 미국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광복군과 자발적으로 미군인 신분으로 참전한 대한인들을 전쟁유공자로 우대해야 마땅하며, 임정을 공인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에 성찰 숙고해야 한다. 왜의 편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한 이는 전범이라하고 같이 싸운 이를 외면함은 어긋난 도리임을 미국은 알아야 한다. 우리의 분단과 전쟁에 미국의 책임 있다. 미국은 이를 위한 책임적 조치를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분단과 일본의 미분단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조약의 부당성은 지금이라도 지적되고 수정되어야하며 전범의 처결 즉 최고 전범인 왜의 천황이엇던 명치 천황, 대정 천황, 소화 천황은 인류의 공적으로 처단되어야하며, 지금의 영화 천황은 그 지위를 박탈하여야 한다. 일본은 그냥 섬나라로 국체니 정체니도 없는 세월로 돌아가야 완전한 전범의 위협이 제거된 것이라 할 수 잇다.



다시 3.1혁명으로 돌아가자.
참여자를 종교별로 분류하면 33인이 있고 학생, 기독인들, 불자들, 천도교인, 유교인들이 대다수이고 아주 소수의 천주교인이 있었으며 더 소수의 왜색 개신교인 조합교회가 있었다. 또한, 34인이라 불리는 스코필드 선교사와 33인에 더해 48인이라 일컽는 분들도 있다. 왜의 무력 탄압에 7,500여 명의 순국자가 있다. 촛불 혁명과 같이 편안한 상태의 집회 시위가 아님은 자명하다. 촛불을 대단하다고 너무 그러지 말라. 하지만 대단하긴 하다. 1,700 여만에 달하고 국정 농단자를 축출했으니 말이다. 3.1혁명에서 왜의 두목을 탄핵 못했다고도 한다. 아니다. 탄핵시켰다. 데라우찌를 이어 총독이 된 하세가와는 3월 3일로 예정된 광무황제 국장 예행연습을 하다 3.1선언을 듣고 사색이 되었다 한다. 하세가와는 사이토에게 자리를 주었다. 하세가와가 완용이에게 벌벌 불불~거리며 자문 구하니 1) 해산 권고하고 2) 안하면 다 죽이라 했으며, 그 결과 7,500 여의 순국자나 수만의 부상자 그리고 연행 피체자가 발생했다. 하물며, 경찰서나 감옥에 들어갈 자리도 없어 단순참여자로 보이는 이들은 그냥 재판도 없이 죽어라 패서 석방시켰다 한다.

우리는 빛민족으로 빛사람이며 빛마음을 지녓엇으나 수 천년 잊고 무언가에 덮여 살다가 기독교 예수 복음의 전파로 그 잊엇던 성정을 뒤살려 다시 빛사람으로 되태어나 인류에게 빛을 선사하엿다.


이제, 서약하며 선언한다.
1.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에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4.19 혁명 기록물은 이미 유네스코 기록물 등재 추진중이다.
3. 3.1혁명 기록물은 이제야 추진이 시작되었다. 세계평화운동사 최초 최고 금자탑이며, 세계 피식민지압박민족들의 빛삶이 된 3.1절. 이 영향으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선 제 나라들. 특히,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 무저항 운동. 네루도 타고르도 3.1에 감동했으며, 필리핀이나 저 멀리 이집트도 해방투쟁에 자신감을 얻었다하며 우리의 6.25시엔 그 영향으로 참전한 것이라고 한다. 허나, 3.1의 영향으로 민족운동에 나선 제 나라들은 아직까지 우리 빛사람들에게 감사를 안하고 있다. 매우 유감이며 지금이라도 국가 차원이든 민간 차원이든 하시라.
4. 순절선열 즉 스스로 자결하신 추모관이 있어야 한다. 특히, 김상옥은 특별하다. 그는 상해임정 요인들에게 서약한다. 장부로 태어나 구구하게 살지 않겟으며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다. 그는 과연 자신의 생가 근처 서울 종로 효제동에서 일대 천의 전투를 총알 800 여발로 왜군 20 여명 사살하고 마지막 남은 한발로 자진 순절하였다. 대한의 남아다운 약속 이행이다.
5. 순국선열 즉, 왜에게 직접 죽임 당한 이들을 위한 추모관이 있어야 한다. 행사때마다 말로만 순국선열 추모를 말로만 하지 말고 3,500여 위의 순국선열 추모관을 건립하라.
6. 그 외 13,500 여위의 독립유공자 묘역이 정리되지 않은채 흩어져 있기도하고 어떤 묘역은 너무할 정도 곧 저게 묘인가? 누구의 묘인가도 모를 정도로 쇠락해 있다. 이를 어떻게 국가가 정리할 것인가? 의논하라.
7. 친일인명사전, 친일단체사전 심지어 사회주의자 인명사전도 있다. 허나, 독립유공자사전이 없음은 아주 매우 제일 유감중 하나이다. 전쟁참전 유공자 사전과 민주화 유공자 사전도 발간하자.
8. 3.1의 영향으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선 제 나라들에게 요구한다. 감사의 표현을 어떤 방식으로든 하라. 우리 대한민국은 대한 독립에 기여한 중국인, 미국인, 캐나다인, 영국인 심지어 왜인에게까지 건국훈장 50 여인에게 추서했다. 우리는 중국의 국부인 손문, 장개석, 송미령. 진과부, 진기미에겐 김구 이준 김좌진 윤봉길 안중근급과 같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등급은 딱 30명이다. 여기에 중국인이 5명이다. 중국은 깨달으라. 중국은 유일하게 우당 이회영권사에게 혁명열사증을 수여했다. 잘했다. 허나, 더 넓게 보라. 한 나라에 대한 예우가 아님으로 판단한다. 중국혁명과 독립에 기여한 대한인을 인정하고 우대하여 혁명열사로 지정해야 함이 마땅하다. 명부 조사는 그대들이 하라.
9. 우리는 아직도 독립운동 참여자중 독립유공자로 지정 받지 못한 명부를 20,000 여명 가지고 있다. 미추서는 대부분 자료의 부족으로 인함이다. 허나, 독립운동은 했으나 매국행위자는 독립 유곶아의 지위를 박탈하고 미추서자 명부에서 기존의 원칙대로 빼라. 하지만, 숙고해야 할것은 매국행위자가 아닌 부역자의 문제이다. 매국이 아니라 부역을 하지 않고선 국내에 살아남을 수가 없엇음이 진지하게 숙고되어야 한다.
10. 대한민국을 세계평화 최초 기여국으로 UN은 지정하고 노벨 재단도 숙고하여 조치를 내려라.
11. 대한민국은 노벨상보다 더 권위있는 세계 평화인권학술상을 제정하라.
12. 특별히, 명성황후 시해, 광무황제 독살, 헤이그 특사 사형, 하란사 독살, 제암리 학살, 강제 위안부, 강제 징용, 강제 신사참배(정신 강제 수탈이자 고문 행위) 등의 만행은 자료를 정리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반드시 제소하겠다.
13. 통일국민, 세계인류를 위한 인문학 과정을 만들겠다.
14. 독립운동, 평화인류 길을 지정 개발하여 아이와 청소년들을 알려 참여케 하려 한다.
(예) 1) 서대문형무소, 순국선열위패봉안소, 독립문, 대한민국 최대 독립유공자 배출 대학 감리교 신학대학교, 우당 기념관, YMCA, 서울역 강우규 의사터, 이재명 의사터, 나석주 의사터, 김익상 의사터, 김상옥 의사터나 종로경찰서 폭파현장등과 중등교육기관으로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중앙학교나 배재학교, 이화학교 등 그리고 민족운동 종교기관인 상동교회, 정동교회, 새문안교회, 동대문교회, 꽃재교회 등도 택하여 길 개발하겠습니다.
2) 경기 충청 민족 운동 사령기지인 수원 종로교회, 삼일여남학원과 제암교회, 사강교회, 화수교회, 수촌교회 등 경기 화성시 주요 유적과 경기 안산 성호 이익, 하곡 정제두,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최용신 전도사 등 유적지들도 합니다.
3) 병천 아우내 장터, 병천교회 등 유관순 길. 찾아내야 한다. 그가 밤새 다녓던 그 길들을. 석오 이동녕, 이장녕 생가와 일찍이 만호의 터로 예언된 독립기념관도 있다.
4) 만주와 상해를 잇는길
5) 블라디보스톡과 시베리아 철도 상 페트르스 부르크 그리고 헤이그, 파리의 우사 김규식을 잇는 길.
6)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덴버, 필라델피아 등을 잇는길 등이다. 비용은 좀 들거다. 역사 배워줌에 돈 좀 쓰자.

15. 세계 민족해방가 인물열전 발간.
16. 세계 전범 인명 사전도 필요하다.
17. 세계 민족반역자 인명사전.
18. 국립현충원 서울과 대전을 이을 대규모 현충시설이 필요하다. 앞으로 돌아가실 분들과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모아 함께 추모하는 그 장소는 시급히 논의 되어야 한다.
19. 감리회, 불교, 장로회, 천도교회 초유 종교연대는 기리 기념되어야 한다. 조선의 종교인 유림이 3.1에 참여하지 않음을 유감으로 여기며 이를 안타까이 여긴 심산 김창숙을 추모한다.
20, 무후선열 추모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무후선열은 유골이 없는 선열로 안중근, 유관순, 전덕기 등을 말한다.


이제, 정리한다.
빛사람들은 빛 자체이다. 결론, 빛민족 힘 모아 인류평화운동으로 승화시켯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헌법에 따라 빛동반도(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는 대한민국임을 확인한다.
수에 담긴 뜻을 주석하므로 빛과 생명체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자 한다.

수이다.
누구나 다 안다하나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
오대산 박해조 선생의 주석을 일부 참조햇다.
이것을 알아야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과 종교를 이해할 수 잇는 준비가 50%만 된 것이다. 하여, 이를 이해 못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에 도달할 가능성이 전무하다.


*. 하루부터 열흘
*. 하나부터 열
*. 한일 두이~ 열까지
*. 1~10이다.

위의 모든 수에 담긴 뜻은 생명체인 빛의 순환도를 그려낸 것이다.
이를 수직 수평으로 바라보지말고 원처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한다.



&. 하루부터 열흘
1. 하루 : 빛움이다.
2. 이틀 : 이어져 트여나감.
3. 사흘 : 살아감.
4. 나흘 : 나와서 살아감.
5. 닷새 : 다아 삶.
6. 엿세 : 얻어들여 삶.
7. 이레 : 삶을 이어 얻음.
8. 여드레 : 모든 것을 다 얻었다. 마지막을 준비하자.
9. 아흐레 : 다시 알로 가련다. 죽음이 다가와 준비한다.
10. 열흘 : 홀연히 갓습니다. 저 세상으로.

&&. 하나부터 열.
1. 하나 : 하염없이 끝없이 나아옴. 하늘 : 하염없이 끝없이 늘어짐. 하느 : 하염없이 끝없이 바느질할 때처럼 느어짐. 하늘이다.
2. 둘 : 두어짐=하늘과 하늘이 만났다=여성 남성이.
3. 셋 : 생명인 빛이 세워 짐이다=잉태.
4. 넷 : 생명이 넣어져 태어 났다=태어남. 나음.
5. 다섯 : 생명이 이 땅에 다아서 서서 있게 되었다=아기.
6. 여섯 : 스스론 못살고 얻어들여 들여야 하는 삶. 해야 선다.=청소년.
7. 일곱 : 일어서 빛을 곱게 다리려면 일 해야함=장년.
8. 여덟 : 이제 노년이 되어 돌아갈 준비. 모든 것을 자신의 영역에서 얻어들여 더하여진 빛은 이란 말.
9. 아홉 : 이제 정말 다시 온 세상으로 알로 홀연히 가야.
10. 열 : ㄹ은 미래를 말하며 여는 얻과 얻의 반복어로 미래를 얻어들인다는 뜻이니 죽으나 다시 올것이라는 바람을 담은 호칭이다.
진정 갈때가 됐다. 미련없다. 가자. 저 세상으로이다.

&&&. 한 일 두 이부터 십.
1. 한 일 : 一 한문어에서 가로는 형이상학, 정신, 사람을 뜻한다.
2. 두 이 : 二 하늘과 정신이 만났다. 여성과 남성 만남이다.
3. 석 삼 : 三 하늘과 하늘인 여성과 남성이 만나니 새생명이 여성 자궁에 잉태되었다.
4. 넉 사 : 四 ㅁ미음인 몸에 날개가 있는 형상으로 아기가 태어남 뜻한다.
5. 다섯 오 : 五 여기에 심각한 오해. 그냥 획순으로 기존대로 하는 것이다. 다섯 오의 획은 工을 먼저 쓴 후에 기억인 ㄱ을 합해야 한다. 고웁게 삶을 깃들이라는 어린 아이들의 시기란 뜻이다.
6. 여섯 육 : 六 초량갓 쓰고 두 다리로 버티고 있는 형상. 고웁게 사람을 깃들인 5단계를 넘어 청소년. 청년이 되었다. 육은 힘과 지혜를 깃들이고 움티우고 움티어 또한 여섯은 얻어들이고 얻어야 서야 하는 시기로 청소년기를 이른다.
7. 일곱 칠 : 七 놓여져 하늘뜻 이루기 위해 일해야하는 장년. 병을 얻은 병자들 빼곤 다 일하세요.
8. 여덟 팔 : 八 사람 인과 들 입관 다르게 획이 떼어져 있다. 세상관 이제 손떼이다. 은퇴했단 말이다. 그저 손주손녀들 보며 낚시하고 간혹 자문 구해오는 후배들에게 경험 들려주는 시기로 노년이다.
9. 아홉 구 : 九 몸이 이제 다 구워져 돌아온 곳으로 갈 때가 되었다. 글의 형상이 지팡이 짚고 몸이 구부정한 형상이 말해준다.
10. 열 십 : 十. 갔다.


&&&&. 1 ~ 10까지.
1. 1 : 일어섰다.
2. 2 : 이어졌다. 여남의 만남을 의미한다.
3. 3 : 새 생명이 이어지는 형상으로 잉태되었다.
4. 4 : 니은 ㄴ과 세로로 이루어져 있다. 저 세상에서 곧게 넣어졌다. 잉태된 생명 빛이 탄생한 것이다.
5. 5 : 하늘 뜻따라 곧게 깃들이라는 표기로 옆이 영어 C처럼 트여있음에서 볼 수 있다. 아기를 지나 청소년기로 열심히 뛰어 놀아야 한다.
6. 6 : 열심히 뛰어노니 아래는 차잇으나 위는 비어 있다.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기가 되었으니 위인 형이상학 정신 학문을 위에 채우라는 의미이다. 공부해.
7. 7 : 이제 준비되었다. 조그만 도구를 들고 하늘 뜻따라 곧게서서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라는 글자 뜻이다. 男. 밭에서 밤낮으로 힘쓰는 사람이다.
8. 8 : 위와 아래가 다 찼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모든 분야는 아닌 자신의 분야에서 만큼은 다들 전문가이다. 이제 여한도 없다.
9. 9 : 정신 멀쩡하나 이제 다리 하체 힘 빠졌다. 갈 준비하자.
10. 0 : 이제 다시 알로 돌아감이다.



3.1절 100주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물 유산 국민추진위원회 국민대표 일동.

민관기가 이를 기록하엿다.

이 글은 2019년 31절 100주년에 즈음하여 유네스코 국민추진 등재위원회에 제출되어 채택되엇엇던 문서입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감리교회 정체성이 형성되어 민족운동이 전개된 양상과 선교역사를 융합하여 민족의 과제를 도출한 문서입니다. 마니 부족하여 보충이 요구되나 이만하면 초보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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