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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일어나 가리
백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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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2 16:24:02
백승학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돌아가리/ 욋가지를 엮고 진흙을 발라서/ 오막집을 지으리/ 아홉이랑 콩을 심고 벌떼 잉잉 거리는 그곳에서/ 나 얼마쯤의 평화를 누리리.”
이 시를 쓴 윌리엄 예이츠가 아니어도 힘겹고 지치기 십상인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이니스프리로 돌아가고 싶은 바램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이라는 영화의 메인 포스터에 ‘언니야! 이제 집에 가자!’라는 글귀가 세로로 찍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가로로 누워 있으면 집에 갈 수 없을까봐 편히 눕지도 못했을 간절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더욱 저렸었다.
더욱이 영화 속에서 하얀 나비 떼가 더없이 익숙한 시골 마을의 산모롱이를 온통 뒤덮으며 날아 넘을 때는 하얀 저고리를 입고 나풀거리며 사뿐 사뿐 집으로 돌아오는 누이들의 춤사위가 연상되어서 자꾸만 눈물이 흘렀었다.
지금 밖에는 가을이 깊어가는 중이다. 어느 시인은 가을 들녘에 피어있는 국화를 보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라고 표현하였다. 한편, “주여!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에는 많은 바람들을 놓으소서.”하며 간곡한 표정으로 가을을 노래한 이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 릴케는 집이 없고 고독한 사람들 또한 이 가을에는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돌아와서 가까운 가로수 길을 서성이거나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거나 지난날을 회상할 것이라고 하였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돌아온 때가 가을이었다는 것을 내가 안 것은 그가 먹었던 쥐엄나무 열매가 10월에 열린다는 것을 알고 난 후였다. 탕자는 아버지를 졸라서 미리 받아낸 분깃으로 먼 곳으로 떠난다. 그리고 방탕하게 보낸다. 가지고 있는 돈이 떨어지고 모여들었던 친구들도 다 떠난 후 어느 농부 집에 돼지치기로 들어간다. 탕자는 심한 흉년 탓에 먹은 것이 너무 없어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돼지우리 곁에 쌓아둔 쥐엄나무에서 사람이 먹을 수 없을만큼 쓰고 떫은 쥐엄열매를 정신없이 따먹는다. 돼지가 먹을 양식을 다 먹으면 어떡하느냐며 주인으로부터 심하게 핀잔을 들은 탕자는 그 길로 일어나 아버지 집을 향해 걸어간다.
이문열 작가가 쓴 ‘사람의 아들’에서 주인공 민요섭이 돌아온 것도 아마 가을이었을 것이다. 그해 6월에 발간 된 책 속에서 민요섭의 신학교 동기가 “그는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하고 말했으니 아마도 가을쯤이면 돌아와 있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의 추종자였던 조동팔에게 살해당한다. 민요섭은 대체 어디에서 어디를 향해 돌아오는 중이었을까? 기적을 일으킬 능력이 있으면서도 저 많은 돌들로 떡이 되게 할 의향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자칭 사람의 아들 대신에 지상의 떡이 채워지기만 한다면 하늘의 떡 같은 것은 나중의 문제일 뿐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진정한(?) 사람의 아들을 찾아 떠났던 길에서 돌아오는 중이었을 것이다.
또한 하늘의 떡이 먼저라고, 심지어는 그것이야말로 전부라고까지 서슴없이 말하는 원래의 예수를 향해 돌아오는 중이었을 것이다.
“아빠! 출장 언제 끝나?” 아이엠에프 시절, 서울역 지하도에서 한 달 보름 째 노숙하고 있는 어느 실직 가장의 휴대폰에 찍혀있던 딸의 문자가 전 국민의 가슴을 울렸던 것을 기억한다.
어느 주요일간지의 사회란에 실렸던 그 기사를 읽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 역시 대형교회 부목사 자리에서 실직했었다. 그때 나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싸늘한 거리,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는 그 황량한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힘 또한 지상이 아닌 하늘의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라며 나를 위로하시는 진정한 사람의 아들 예수를 그곳에서 만났었다. 그는 어느 차가운 거리, 어느 한 복판이거나 혹은 구석진 자리마다 그렇게 울며 서 있었다. 누군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어느 낯선 여행지에서/ 커튼을 열고 창가에 나는 서 있었다/ 창밖으로 길게 드리우는 산그림자와/ 이국의 향기마다 낯설었다/ 하지만 너 낯익은 바람아/ 내가 너를 떠나오던 그날에도 너는 차마 나를 떠날 수 없었는가/ 아, 그런데도 나는 왜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자꾸/ 멀어지고 있었는가/ 기념품 가게들 옆으로 하루를 기념하듯/ 가로등이 켜질 때/ 저무는 것들의 그림자를 디디며 누군가/ 돌아오고 있었다 ('누군가 돌아오고 있었다' -백승학의 시)
[출처]
https://facebook.com/seunghaak.ba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