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서드】격랑시대(激浪時代)

함창석
  • 1015
  • 2020-11-28 20:18:34
격랑시대
激浪時代

시인/ 함 창 석 장로

1960년대 전후는 대한민국이 혼란기에 있었다. 6.25 한국전쟁 중에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의무교육인 초등(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니 교실도 오늘날처럼 온전하지 못하였다. 입학하기 전 한문서당을 다닐 때는 의무교육 취학을 독려하는 선생님들을 피하여 서당 선생님과 뒷골로 피하기도 한 기억이 난다. 아무튼 대세에 힘입어 서당은 폐지되고 학교에 들어가게 된 사건도 있었다. 2학년이 되자 학생혁명이 났고 3학년이 되자 군사혁명이 났다. 혁명공약을 외웠다. 1등으로 외우면 상도 탔다. 선생님들은 재건 복이라고 하여 통일로 입으셨다.

4학년 5학년 때는 학교에 공 휴지를 일구어 고구마, 콩, 호박 등을 심어 그것을 수확하여 학급비로 쓴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학교에서는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학교 교감이었던 분네는 군사정부의 정책으로 흙벽돌을 만들어 양계장을 짓고 병아리를 분양받아 산업전선까지 시범사업을 하게 되었고 양봉도 하는 공무원들이 늘어났다. 당시에는 우리 아버지도 면사무소에 다니셨기에 벌통을 가져다가 한 겨울을 났으나 모두 죽어버리고 실패를 한 다음 걷어 치셨다.

성공사례라 하여 교감 선생님은 발표도 하시며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문이 무성하였다. 양계, 양봉, 양돈까지 확장되면서 성공하는듯하였으나 읍내에 드나들며 마작이라는 놀음에 빠져 훗날에는 탕진을 계속하였기에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셨다. 어린 내 마음은 안타까웠다.

학교에서도 그 당시 우리 반은 고구마 밭 100여 평, 돼지 2마리, 토끼까지 사육하였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토끼풀을 구하기 위해 할당 받은 양을 채우려 먼 곳까지 나가 구하였다. 아카시아 잎, 고들빼기, 쏙새(씀바귀), 무 잎, 배추 잎 등 닥치는 대로 준비하여 먹였다. 제법 성공하여 가을에 판매하여 회를 한 끝에 학교에 전종을 하기로 하고 교장 선생님께 전하였다.

체육시간이나 운동회 때는 제식훈련 프로그램이 등장하였고 호루라기에 맞춰 고학년 학생들은 행진을 하였다. 그 때 받은 훈련이 내 평생 가는 동안 그대로 습관이 된 것을 느낀다.

척박한 공휴지를 개간하여 조성된 실습지에 줄 비료가 거의 없었기에 학교 변소 인분을 퍼다 주는 일도 있었다. 변소 인분 푸는 일은 반장이었던 나와 부반장이었던 친구가 맡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더러운 것도 감내하는 정신력이라고나 할까. 나는 어떠한 환경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똥이라고 하여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형성되었으니 소위 말들을 하는 '뒷간철학' 자연 순환원리 사상이 형성된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6학년이 되어 문중에서 발생한 양자문제로 유학 아닌 유학길에 올라 한양으로 쫓겨 가던 내 모습은 처량하였으나 서울은 또 다른 나의 생활을 흔들어 놓았다. 친척 집에 기거하며 눈치 밥에 청소년에게 닥친 어려운 심정이었지만 잘 견디어냈는지 춘천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이제 인생 칠순시대에 들어가며 시인으로 그 시절을 회고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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