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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기독교조선감리회 합동 100주년의 의미
민관기
- 1060
- 2020-12-07 02:39:30
1930년 마침내 합동을 이루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1905년 을사늑약을 당하며 민족은 하나로 통합되어져 갔다.
-. 하나의 흐름은 위정척사 흐름이 개화를 대세로 인정하는 것이어서 척사 의병이 개화되어 가는 추세..
-. 동학도 개화라는 대세를 안 따를 수 없어 감리회를 따라 청년들을 유학보내고 종교의 이름조차 천도교로 변경
(동학은 인류 역사에 없던 어떤 학에 반대하는 종교명 = 또라이 종교명이란 말, 청년만 유학보내고 여성교육엔 관심이 없어서 손병희는 이용구 일파에게 떼인 돈을 여성들의 성미로 보충하곤 명월관의 기생, 주옥경을 첩으로 맞이해도 천도교 여성들은 말이 없었음)
(여성관만은 변함이 없었음, 하여, 3.1 혁명에 천도교 여성 미참, 글이라도 알아야 참여하는 것)
(당시 감리교회는 축첩제도를 반대하여 첩에게 살림을 내어주고 나서야 개종하고 입교인으로 받아들임)
-. 대세를 촉진시키는 데는 이한응, 민영환, 조병세 등의 순절과 이준의 순절은 명성황후 서거 이 후 분노와 함께 죽음으로 항전하겠다는 불같은 투지를 불러 일으키게하여..
[여기에 로제타 홀이 자신의 살을 떼어 수술을 하는 것을 본 한국인들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 빛을 드려 구원하였다는 말을 실제로 믿기 시작하고 교회로 몰려듬 = 결코 공짜로 치료받는 것 좋아서 몰려든거 아님)
-. 을사오적 암살로.. 신민회로.. 왜적 타도 의병으로.. 교회로.. 돈을 모아 나라 구하는 국채보상운동으로..
나아가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건립으로 의병전의 한계를 극복하는 전략의 수립 구체화를 신민회의 망명세력과 국내 잔류 세력과 밀의를 통해 실천..
-. 이 때, 북/남 감리회는 신학교를 합동으로 운영하기 위해 결단.
1907년 지금의 서대문 냉천동 옛 규장각 자리에 교사를 구축하고 정신 방면의 사관생도 양성을 시작한 것.
여기에 노블 감리사가 남감리회의 하디를 1907년 감신 교수와 1909년엔 교장으로 임명하여 1924년 까지 민족지도자 양성.
1907년 개인적 정신적 방면의 영성 깨임의 대한 청년들을 민족적 영성으로 뭉친 민족의 성직자들로 양성해 낸 것.
-. 이러니까 1910년대 현순이 북/남 갈리회를 가리지 않고 다니며 장년주일학교 조직하였고, 손정도가 북/남 감리회를 가리지 않고 민족부흥회를 다니며, 보통 동네 사람들 수준을 민족영성으로 가득한 지사들로 빛다림시켜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여,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에 감리교회와 대종교 인사들이 연합으로 연해주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2.8 선언에 감/장로회 학생들이 연합으로 참여하고, 3.1 혁명에 감/장/천도/불교계의 인사들이 연합하여 한마음으로 참여하는 전통이 수립되고,
임정도, 상해, 러시아, 한성 정부 등 6개가 수립되었다가 1~2달 만에 하나의 정부로 합하여 상해 임정*으로 태어났으며,
서로/북로 군정서의 합동이자 감리교회와 대종교의 결합으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이루어 냈으며,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합동하여 국민부*를 설치하고 광복군 총영을 건설하여 강력한 국내진공 무장투쟁을 벌이고,
*. 상해 임정 : 1919년
*. 청산리 대첩 : 1020년
*. 국민부 : 1929년
1927년 신간회와 근우회가 민족/사회주의라는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1930년 한국과 미국의 감리교회가 "한미종교군사동맹"을 대내외에 그 존재를 드러낸것이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실제적 위상이다.
이승만과 박용만파의 미주 독립운동도 결국 하나되어 하와이와 미주의 동포 합동으로 안창호 목사 중심으로 김구의 한인애국단의 특무공작*에 동의하여 돈 1,000달러를 송금하므로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가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겠는가?
*. 한인애국단 특무공작 : 1932년
1940년 좌우를 망라한 대한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대망의 결과로 이어지니 임정은 대일 항전의 명실상부한 지도체 인정받게 되었다.
여기에 이렇게 오기까지의 과정에 있던 수 천 수 만의무수한 조직 통합*의 예가 있고.
어쩌다가 있었던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도 있었으나 모든 것은 북/남감리교회의 합동이라는 대의 속에 작은 차이들은 무엇이든 극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 1905 ~ 1930 ~ 1945년 까지는 한미관계의 유지는" 한미감리회정치군사동맹"로 되었다 함인데 이를 말하여
감리회의 군사 요새화라 한다.
곧, 기독교조선감리회의 합동 성립은 해방된 조국의 실제적이며 모범적 표상이었다.
참고)
국내부분에서의 조직 합동의 역사.
만주, 연해주 부분에서의 합동의 역사
상해와 중국 관내에서의 합동의 역사
미주 본토와 하와이의 합동의 역사
국내와 해외의 합동의 역사는 항상적 추구되는 민족의 기본 의제였으나
북/남 감리회는 미국에 그 선교 본부가 있어 합동 조직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며, 이전부터 사실상의 합동한 것과 같이 활동은 하였으나, 명실상부한 합동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위한 결의의 과정을 거친것이었다.
합동 감리교회의 위세는 먼저, 미주와 만주 방면으로 그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