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교회 아픔을 떠벌이는 사람들...

오재영
  • 2040
  • 2020-12-15 20:23:50
사도베드로의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훈계한 말씀 중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말할 때,
갖추어야할 자세를 그들은 ‘온유와 두려움’ 으로 하라(벧전3:15~19)고 하셨다.

찰스 콜슨의 “그리스도인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등장하는 론. 그리어(Ron Greer),
그는 한때 모든 백인을 미워하던 전과자였으나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후 위스콘신 주 매디슨의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로, 또 “교도소선교회”의 강사로 활동했다. 그리어는 그가 근무하던 소방서에서 동성애를 罪라고 묘사한 소책자를 돌렸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목사로 등장했을 때 매디슨의 동성애 행동주의자들은 화가 났고, 그리어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로 몰려가 예배를 중단시키고, 강단에 콘돔을 던지며, 외설스런 말을 외쳐댔다. 그러나 론, 그리어는 점잖게 그들을 예배로 초청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나중에 언론이 그에게 어떻게 平靜心을 유지했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면서 “눈(眼)먼 사람이 내 발을 밟았다고 화를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늘도 자신의 위치와 불리워지는 이름의 분수에 맞지 않는 品格떨어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것들 대부분은 상대를 비난하거나 허물을 과장하여 말할 뿐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는 이들은 없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저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기에 이들을 향하여 본다 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사랑과 矜恤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들을 도와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양금신족(量衾伸足)”이란 말이 있다.
이불의 길이를 헤아려 다리를 뻗는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할 때 주어진 조건을 고려하면서 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백성들이 우매하면 하나님이 우매한 지도자를 세워 그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백성들이 바로서면 하늘이 그에 맞는 현명한 지도자를 세워주신다.” 교회(敎會,기독교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고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 또는 그 장소.)는 다른가?

약점과 허물 많은 이들이 모이는 교회이기에 그 가운데에서 다양한 問題들이 등장한다.
이 문제마다 어렵기에 대부분 회피하려하지만 생각 있는 이들은 정면 돌파함이 정석임을 알게 된다. 바로감당하면 그 문제가 크면 클수록 그 아픔으로 인하여 문제 이전보다 이후에 더한층 성숙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문제로 인하여 지리멸렬하는 교회마다 한결같은 실패의 과정이 있다. 목사든 장로든 대부분 교인들이 자신을 낮추기보다는 오히려 목소리높이며 상대를 폄하하는 일에 몰입한다. 모두가 사단의 덫에 걸려 직분과 관계없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미숙하기에 싸우고, 분열하고, 지배하려한다. 이건 교회가 아니다. 진정한 교회는 문제 앞에 자신들을 돌아보며 섬기려하기에 함께 성숙하게 된다.

지금 역병(疫病)이 창궐하는 시기에 그동안 싸우든 이들도 중단해야하건만, 도대체가 제정신 똑바로 가진 이들이 흔치 않다. 義를 세운다며 기치 들고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 가엾고 처량한 모습들이다. 마스크를 쓰고? 이게 삼류 저질 코미디가 아닌가? 이들에게 알려줄 말이 있다. 말세를 신앙인답게 살아가려거든, 많은 사람과 사귀어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법부터 배우라.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도 배우고, 사람을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한다.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외적 조화가 이루어지고, 그처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삶속에 늘 본인에게도 새로운 미래가 담겨지게 된다.

모든 이들이 기억 할 것이 있다. 남의 허물을 보는 눈이 커지면 그에 비례하여 사물을 보는 눈은 작아진다.
그가 남의 허물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쓸 때, 역설적으로 그것은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는 안간힘이다. 그리고 남의 허물을 잡았다고 해서 그로 인하여 허물 잡힌 그가 패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허물을 잡는 과정에서 자신이 패배적인 삶을 살게 된다. 반면에 남의 허물을 덮어준다고 해서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면 그의 회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이 위로를 받게 된다. 대부분 남의 허점을 보려고 현미경을 들이대고 확대해석 하는 과정에서 본인은 점점 패배자의 자리로 추락하며 온갖 악몽에 시달리는 삶을 살게 된다. 이 같은 그에게 영혼을 인도하고 소생시킬 말씀을 주님께서 허락하실까?

영적 생활에도 정석(定石)이 있다.

옛날이나 현재나 미래까지도 求道者의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사연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편한이든 불편한 이들 이든, 모두가 자신을 성숙케 하시려는 주님의 특별하신 만남의 배려시다. 간혹 좋은 일을 하였음에도 좋은 마음으로 이해받지 못하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침묵은 무식으로 (아는 것이 없으니 그렇겠지?...), 겸손과 자중하는 것을 무능으로, 오해가운데 취급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성숙한 이들은 자신의 후대까지 영혼이 거듭나고 힘을 얻는 교회를 사랑하기에 그 마음으로 견딘다. 모두가 聖經의 말씀을 행하는 교회와 주님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겪게 되는 지불할 댓가임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아(自我)가 살아있는 사람은 쓰지 않으신다.

결과론적이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영적비밀을 깨달은 소수의 사람에게로 인도하신다.
그 비밀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시작이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오면서 그가 누구든지 언제나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통하여 인도하시고 또 이어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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