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관점으로 2021를 살자

민관기
  • 1407
  • 2021-01-03 00:20:17
승리의 관점이라 모든 세상 만사를 승리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코로나는 인류가 이긴 것이다. 없었고 안보이던 것이 나타나 우리를 괴롭혔다는 그 승리를 위한 실마리는 인류가 합하여 찾아낸것 아니냐? 하여, 더 큰 화도 능히 당해낼 능력은 공동으로 갖추어 가게 되었다. 이는 명백한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이시다.

감리교인이 165여 만이다가 135여 만으로 줄어든건 큰 하나님의 섭리이자 승리를 위한 신호탄이지 그 동안의 감리교회 사태로 인함이 아니다. 이만한 정도의 어려움에 감리교회를 떠날 사람이면 더 큰 일이났다면 어찌했을 것이며, 안 떠나고 있다가 교회에 더욱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나는 자가 되었을 것이니 줄어든건 틀림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승리이시다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헌데, 이 승리의 관점을 흐리게 하는 몇가지 인자들은 존재합니다.
불안, 믿음없음, 염려, 근심, 우울, 부정, 실패, 분노, 절망이지요. 이 인자들은 어떤 것으로 극복이 될까요?

1. 담담함입니다. 그저 담고 담아 두는 것입니다. 이를 인내라고 합니다.

2, 심심함의 유지입니다. 그거 몸을 싣고실어 그러함으로 유지하는 것인데 급하게 이루어지긴해야 하나 찬찬히 호흡을 유지하는 상태를 유지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활쏘기, 총쏘기, 말타기, 농구, 축구 등의 운동이나 이런 것도 결국 숨을 어떻게 길고 잔잔히 쉬느냐에 결정적인 능력치가 드러나는 것 아닙니까? 축구 선수들이 거칠게 몸싸움하며 숨도 거칠게 쉬은 것 같으나 가다듬어져 있지 않으면 시야가 좁아지며 목표물을 놓치듯이...
먹이를 쫒는 호랑이가 아무리 빨리 거칠게 달는것 같아도 숨은 고르게 잔잔히 쉬어야먄 먹이 사냥에 성공알 수 있단 점이 무엇을 말할 까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3. 헌데 세상은 지금껏 뛰는 이가 제일 앞선다고 생각했습니다. 틀렸습니다. 뛰는 이는 뒤인 사람입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가슴이 막 뛰면 당신은 상대의 품격보다 뒤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마지막인 맏잇맏으로 소의 해라니까. 소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소는 우직하게 걷고 달리는데 선수입니다. 황소같은 사람이라 합니다. 이길수가 없다. 황소는 보통 사람의 그냥 힘으로는 이기기가 매우 힘듭니다. 만에 1도 안나오는 장사여야 소의 뿔을 꺽을 수있다하니 백야 김좌진 같은 우리 감리교인이나 가능한 것일테지요가 99.999...%의 사람들의 생각이고 그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에 대한 이해를 달리해 봅니다.
소는 솥이나 송이나 솟이나 모두와 같은 그냥 솟았다라는 뜻 이 외엔 없습니다.
솥도 밥해 먹는 도구로 우리가 만들어낸 도두이고 이것을 어떻게 만들고 사용하는 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있고, 소나무의 송도 알이 솟아있다는 단순한 물리적 형상을 표현한 글로 송도 그냥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보고 놀던지 베어 무엇으로 사용하던지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솟아있다는 소는 어떤가요?
솟이란 말은 엄밀히 말하면 수평선이나 지평선에서 솟아난 모든 물상을 말합니다.
어제는 없었는데 오늘보니 무엇이 솟아있다가 솟이나 소의 실상이라면 소는 본디 없다가 솟아난 존재로 땅에서 솟아낫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필요한 존재로 알고 있었다가 우리에게 고기와 일을 주는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던 저 먼 옛날 어떤 선조가 얘는 단순한 고기가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매우 귀하게 우리에게 다가온 갑자기 솟아오른 헤성과 같은 존재로 소를 대하기 시작했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황소같이 질주하는 소를 이기는 방법은 뿔을 꺽어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성을 무화시키는 것입니다.

솟아난 소를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게 하다이고, 소는 맘몬의 상징으로 지어진 호칭이고, 종교화되고 신격화되어 힌두이즘의 원료가 되었고, 이는 솟아난 것의 최고는 신성한거야 범접하면 안돼라는 신앙화를 깨트리는 논리로 개발한것이 붇다의 가르침인데, 이는 솟아난 모든 것중 나도 이 세상에 없다가 솟아난 존재야이다, 소만 특별하고 브라만만 특별하지 않아 모두 소같이 솟아난 존재라는 의식에 도달함이 불교의 탄생입니다.
이 붇다의 가름침으로도 솟아난 소에 대한 신앙은 아직도 깨질 줄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이 솟아난 소에 대한 절대의식을 깰 수 있을까요?
소만 솟아나 귀한게 아니라 나도 솟아났으니 귀하다란 붇다의 말도 안 통한다면 최후는 남는것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같이 없어짐으로 구원의 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최후의 진리만 남습니다.

이 세상에 솟아난 나는 귀하나 별거아니야 하니 이 세상을 위해 나를 없어지게 해야 겠다.
곧, 공손하고 겸손하게 눈을 내리 깔아 부릎뜨지 말고 눈에 힘빼고 머리에도 힘빼고 어깨도 힘빼고 가슴도 힘빼고 배는 적당히 긴장시키고 나를 있으면서 무화*시키는 것을 해야 겠다라고 마음 먹고 실천하는 것이 소만 = 물질만 = 나만= 인간만 = 정상적인? 일반적인? 사람만 귀한 것이란 의식 세계는 타파되어 주님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하여 몇 마디 써보았다.
*. 무화 : 있으나 없는듯이 존재하는 그러한 것.
뛰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세상을 보고 지배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힘남는다 하여 마구 쓰는것이 아니라 그저 힘쓰지 말고 조용히 얌전히 앉아있는 소를 뜻하지 않을까?
하여 힘을 써야 할 때는 밭에 나가 밭을 갈고 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묵묵히 제 갈길을 가는 성도들이면 좋겠다.
누구들처럼 힘좋다고 남의 남자나 여자에게 힘쓰지 말고 말이다.



새해에도 팔복이 깃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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