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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9회 b. 구원받은 자들의 찬양ⓐ(7:9-12)
최세창
- 1121
- 2021-01-06 20:39:00
이 부분은 【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로 시작된다.
[이 일 후에]는 4:1의 주석을 보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는 5:9의 주석을 보라.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7:4의 144,000이라는 수로 상징된(7:4의 주석을 보라.) 동일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요한이 중복해서 표현한 것은 144,000이라는 숫자가 영적인 의미의 수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구원의 문이 차별 없이 세계 만민에게 열려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박윤선 님은 “구원받은 자들의 수는 너무도 많으므로 누구나 셀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그 무리를 개인 개인으로 아신다(요 6:37-39①).”라고 하였다.
[흰옷을 입고]의 [흰옷]은 1:14의 주석과 3:4의 주석을 보라.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의 [종려]나무는 {“열대의 식물로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로에 아주 많았다고 한다”(이상근). “예루살렘에는 오늘날에도 몇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으며, 또 Pseudo-Aristeas 112에는 예루살렘의 생산품들 간의 연대를 나열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유념한다면······요한의 설명은 가능한 것 같다”(Jeremias).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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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필자의 요한복음 6:37-39의 주석을 보라.
2) Jeremias, Jerusalem, 43, in C. K. Bar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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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종려나무 가지는 존경과 기쁨(레 23:40) 그리고 승리의 상징이며(계 7:9), 주로 환영할 때나 축제의 때에 사용되었다. 마카비 독립 운동의 영웅인 시므온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민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그를 환영하였다(I Macc. 13:51).}(요 12:13의 주석).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의 [보좌]는 4:2의 주석을 보고, [어린양]은 5:6의 주석을 보라.
구원받고 마지막 때의 재앙을 면한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찬양한 것에 대해, 요한은 【10】[큰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라고 하였다.
[큰소리로 외쳐]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를 큰소리로 찬양한다는 뜻이다. 특히, [외쳐](크라주신, κράζουσιν)가 현재 시제인 점에 대해, 알포드(H. Alford)는 “끊임없는 업무를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의 [구원]은 소테리아(σωτηρία)이며, {“그 기본적 사상은 생명에 대한 위협적인 위험을 제거하여 그 생명을 자유롭고도 건전한 발전에 유리한 조건 속에 두는 것이다.······(1) 구약성경의 초기 책들에서 구원은 단순히 신체적 위험으로부터의 해방이다(삿 15:18, 삼상 11:9, 13 등). (2) 그러나 이 낱말은 더욱더 민족의 대 구출 또는 해방에서 적합해지는 경향을 갖는다(출 14:13, 15:2, 사 45:17, 46:13, 52:10). (3) 자연스러운 변화에 의해 그 낱말은 메시아적 구원 또는 해방과 결합되었다(하급 형태의 유대적 메시아 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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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원이란 말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역설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운명에서 이미 해방되었지만(롬 6:7, 18, 고후 6:2, 갈 1:4, 엡 2:5, 8) 죽음 이후,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뤄질 최후 심판에서의 구원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롬 5:9, 고전 3:15). 미래에 성취될 구원, 즉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고전 15장)은 현재의 영적 구원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는다. 지금 여기서 신자는 영적 생명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요 3:36, 5:24, 6:51, 17:3, 딤전 1:16, 6:12, 요일 5:13).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은 그 놀라운 치유의 기적과 구조, 더 나아가 영생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고 하였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천하 인간이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인물이나, 다른 우상이나, 다른 사상이나, 다른 이념이나, 다른 종교나, 다른 교훈 등을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알고 믿어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 사색이나 명상, 양심이나 도덕적 행위, 선함과 착함이나, 재물이나 권세 등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마 16:17, 고전 12:3, 엡 2:8).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5)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라고 하셨다.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③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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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자의 에베소서 2: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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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아 천국에 거하는 성도들이 찬양할 때의 주변 광경에 대해, 요한은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라고 하였다.
[모든 천사]의 [천사]는 1:1의 주석을 보라.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의 [장로들]은 4:4의 주석을 보고, [네 생물]은 4:6의 주석을 보라.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는 4:10의 주석을 보라.
그 모든 천사들이 한 일에 대해, 요한은 【12】[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라고 하였다.
[아멘]은 1:6의 주석을 보라.
[찬송]은 율로기아(εὐλογία)이며 ‘찬미’(벧전 1:3), ‘감사’, ‘축복’(마 5:44) 등을 의미한다.
[영광]은 1:6의 주석을 보라.
[지혜](소피아, σοφία)는 5:12의 주석을 보라.
[감사](유카리스티아, εὐχαριστία)와 [존귀](티메, τιμὴ)는 4:9의 주석을 보라.
[능력](뒤나미스, δύναμις)3:8의 주석을 보라.
[힘](이스퀴스, ἰσχὺς)은 5:12의 주석을 보라.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의 [세세토록]은 1:6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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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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