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교회와 교단이 갈등에서 벗어나려면...
오재영
- 1841
- 2021-01-07 23:01:36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의 신조는 敎會에 대한정의를, “교회는 하나의 교회이고,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고, 교회는 사도적 교회이고, 교회는 보편적 교회임을 우리는 믿는다.” 이처럼,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사도적 교회, 보편적 교회 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신 교회를 우리는 지체가 되어 섬기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이 땅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도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마16장16절). 주님은 분명히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장18절).약속하셨다. 이 말씀을 고백하는 이들이 聖徒라는 존칭의 정체성을 갖고 모여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들이 모여서 교단을 이루어, 사도와 선지자들의 후예들로서 아직도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복음(말씀)전할 사명으로 오늘도 존재하고 있다.
주님께서 주인이신 교회가 왜 분쟁에 휘말리는가?
교회가 이 땅에 이어오는 동안 본질에서 벗어나 우선순위를 잃을 때마다 지나온 역사의 기념비적인 표적과 관계없이 개인과 교회 교단은 큰 고통을 겪고 혼란에 빠져 힘을 잃고 선교의 대상들인 이교도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여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밖에 버리어져 사람들에게 밟히며 소멸의 길을 갔다. 오늘 우리도 시대의 혼돈 속에서 사막의 신기루에 홀린 듯, 수많은 이들이 권력과 물질에 목을 매는 이때 이교도들에게 파장을 일으키고자하는 각오는 되어있는가? 그리하려면 우리는 가장먼저 오늘의 세속화속에서 자신을 구별해야한다. 이 구별은 거룩함이고 능력이다. 이 거룩함이 세속화속에서 우리를 구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교회와 교단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 시킨다.
어느 시대이든 이 거룩함에서 이탈되어 우선순위가 바뀔 때마다 교회는 사명 잃어 어려움을 겪고 세상은 그에 따른 어둠속에서 대가를 지불했다. 사도바울의 지적대로 교회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언제나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절).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후예들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은 공동체마다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며 사도들이 자신들의 죽음으로 지켜온 우리에게 전한 그 말씀을 우선순위로 삼아 자신을 드려 섬기는 삶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고 존재이유이다.
노인과 어른의 차이...
사전적 의미로 “노인(老人)”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을 가리키는 반면에 “어른”은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어느 교회나 성장하고 성숙한 교회가 되려면 먼저주님의 지체가 되어 서로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한다. 구성원들 중에 섬김에는 소홀히 하면서 섬김을 받으려는 이들이 늘어날 때 그 교회는 성장하지를 못한다. 성장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그때부터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사단의 조종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각자가 주께 하듯 말씀에 따라 서로 섬길 때 교회에 속한 이들이 연륜과 함께 나이가 들수록 그 교회는 노인이 많은 교회가 아닌 어른들이 많은 교회가 된다. 때문에 노인과 어른은 신앙적인 면에서나 인격적인 면에서 결코 같은 표현이 아니다.
사람의 일생을 보면 모태(母胎)의 시작에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에 따른 호칭(呼稱)이 다르다.
태속에 있을 때는 ‘태아’로 갓 태어나면 ‘영아’로, 다음엔‘유아’로, 좀 더 자라면 ‘소년’과 ‘소녀’로 ‘청소년’이 되고, ‘청년’, ‘중년’으로 불리다가 50대 말경부터 두 가지 호칭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서게 된다. 결국 한길은 ‘노인’이라 불리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어른’이라고 불리는 길이다. 문제는 노인의 불행은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주위사람을 괴롭힌다. 노인의 특성중 하나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춰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이재철, 주님의 교회, 참고, 일부인용).
그러나 어른은 다르다.
그가 나이가 들어 때로는 건강이 원활치 못하여 혹시 질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어도 주위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그 이유는 어른은 그동안 다른 사람의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른은 남의아픔을 알고, 남의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어른은 때로 실패한 다른 사람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 손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기주머니에 있는 것을 베풀 줄도 아는 펼쳐진 손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노인은 자기중심적인 받기만 하는 사람이다. 이토록 중요한 장래 의미를 알면 누구나 노인보다는 어른의 반열에 들고자 할 것이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욕심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주님의 인도와 은혜를 아는 이들에게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심을 믿고, 그 갈림길의 지점이 너무나도 선명하기 때문에 모두가 두려워해야한다. 그 깨달음은 본인의 손과 발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이 곧 주님의 지체를 섬김과 자신을 위함을 알아 눈에 보이는 대로, 기질에 따름이 아닌 섬김의 의미를 체득 한 이로 살아가야한다. 이것이 장차 자신을 어른과 노인으로 갈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는 아직도 신앙의 길에 들어 선지가 꽤 오래임에도 여전히 유아기(幼兒期)적 행태를 벗어나지 못한 가엾은 이들이 있다. 여전히 자기주변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손과 발을 내밀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격려해주며 자기 것을 나눠주는 일들에 변화를 거부하는 노인의 길을 가는 이들이다.
갈등(葛藤)왜 일어나는가?
하늘양식 2020년 11월 30일자 가정예배서 안양교회 임용택 목사의 말씀에 등장하는 갈등(葛藤)의 문제 해설이 있다. “‘갈등’이란 단어는 칡과 등나무를 의미 합니다. 칡과 등나무는 어떤 대상을 휘감으면서 자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칡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고, 등나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습니다. 나무 하나를 두고 칡과 등나무가 동시에 감고 올라가면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감는 습성 때문에 엉켜서 풀기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유래해 서로 대립하고 엉켜서 풀기 어려운 상황을 갈등이라고 말합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게 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 하시며 성도(聖徒)라는 존칭(尊稱)으로 부름 받게 하심을 깨달은 이들이라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그에 따르는 구별된 삶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아직도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구습(舊習)에서 탈피하지 못한 생활에 매여 있다면 그는 지금도 조급함과 목마름으로 메마른 광야를 걸어가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누군가 그런 표현을 했다. 불과 서너뼘의 거리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와 가슴사이”라고... 가장 큰소리를 지르는 일이라고해서 가장 급한 일이 아님을 생각을 깊이 하는 이들은 모두가 안다.
지금도 목소리 큰 자들이 옳다고 윽박지르면 정의(正義)가 되는 세상, 온갖 처방전 난무하지만 여전히 우리앞에 갈 길이 선명하지 않음은 모두가 이런 까닭이다. 결국 금년한해도 근본적인 변화의 회심(悔心)은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근본적인 신앙의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