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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구: 하나님의…광채…본체의 형상…만물을 붙드시며…우편에 앉으
최세창
- 1395
- 2021-02-01 04:41:08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는 그리스도의 본질을,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그 역사의 결과를 밝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는 언뜻 보기에 성자의 성부에 대한 본질적 열등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휴스(P. E. Hughes)는 “4세기에 교회가 기독론 문제로 분열되었을 때, 예를 들어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히브리서 구절의 내용에서 어떤 이상한 것을 뽑아내려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였으며, ‘광채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안에서 그 존재를 갖는다.’라고 하였다.”라고 소개하고 있다.①
[영광]은 독세스(δόξης)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자로서의 탁월한 존엄이나 장엄한 사랑의 권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광채]는 아파위가스마(ἀπαύγασμα)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지만, 70인역과 필로(Philo)와 알렉산드리아 문헌에는 자주 나온다(F. F. Bruce, J. Moffatt, J. Barmby). 여기서의 의미에 대해 반사광이라는 설②과 발광 또는 찬란한 빛이라는 설③이 있는데 후자가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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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 E. Hughes: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말세우스 및 포티누스뿐만 아니라, 다른 이단의 창시자들을 열거한다. 즉, 사벨리우스(Sabelius),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아리우스(Arius), 그리고 말시온(Marcion) 등이다. 그는 히브리서 저자가 자신의 서신 전체에 걸쳐서 그들의 오류에 대항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 J. Calvin, “Beza, Thayer”(in 이상근), F. J. Dake, A. C. Purdy, 박윤선.
3) “Chrysostom”(in R. C. H. Lenski), H. Alford, “Oecumenius, Dods Vincent,”(in 이상근), M. Henry, A. Clarke, R. C. H. Lenski, W. F. Moulton, F. F. Bruce, A. Barnes, J. Barmby, W. Barclay, P. E. Hughes, J. H. Davies, T. Hewitt, P. Ellingworth, C. R. Erdman, “F. M. Young”(in P. Ellingworth), C. W. Carter, J. Brown, R. W. Ross, 이상근, 김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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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스키(R. C. H. Lenski)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영광이 그 영광의 광채이신 아들 속으로 흘러든다.”라고 하였다. 성육하신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스런 본질과 속성과 행위를 반사한 빛이 아니라, 그대로 밝히 드러낸 빛이라는 것이다. 요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라고 하였고, 바울도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라고 하였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의 [본체]는 휘포스타세오스(ὑποστάσεως)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일치하는 하나님의 존재나 본질 또는 본체를 의미하는 것이고”(J. Moffatt),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형상]은 카라크테르(χαρακτὴρ)로서 “새겨진 특성, 혹은 염료나 도장에 의해 만들어진 흔적, 주화에 새겨진 것 등을 의미한다”(P. E. Hughes).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χαρακτὴρ τής ὑποστάσεως)의 의미에 대해 칼빈(J. Calvin)은 성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인격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웨스트코트(Westcott)는 “단어의 그러한 의미의 사용이 사도 시대 이후보다 훨씬 나중이며, 따라서 이 문맥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④라고 반대하였다. 이어서 그는 성자는 하나님의 인격의 형상이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의 표현이며, 우리의 능력에 맞게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우리 앞에 하나님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스피크(Spicq)도 이와 동일한 의견을 취하였다.⑤ 이러한 표현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9-10)와 관련되는 것이다(참조: 고후 4:4, 골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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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 P. E. Hughes.
5) in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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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능력]은 뒤나메오스(δυνάμεως)로서 고전어에서는 ‘자연적 힘’을 뜻하였고,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또는 속성으로서의 힘’(고전 1:18, 눅 1:17, 행 3:12, 롬 1:16), ‘힘있는 행위나 이적’(마 11:20)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은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영역되어 ‘폭발하는 힘’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말씀]은 레마티(ῥήματι)로서 ‘표현된 말씀’, ‘인간의 발언’, ‘뜻을 표현한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는 “그의 복음의 말씀이 아니라, 그의 전능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R. C. H. Lenski).
[만물을 붙드시며]는 페론(φέρων)으로서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개념이다. 즉, 붙든다는 표현은 지지뿐만 아니라 동작을 의미한다. 동작이란 만물을 처음부터 예정된 완성을 향해 앞으로 진행시키는 것을 말한다”(P. E. Hughes).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된 만물은 그의 전능의 말씀에 의해서 유지되고 조화를 이루며 창조의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것이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의 [죄]들은 하마르티온(ἁμαρτιών)이며, { “원래 윤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활쏘기에서 표적에 맞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죄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이다. 죄란 가능성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원하시는바 일꾼으로서의 자기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 최선의 아버지, 최선의 어머니, 최선의 아들, 최선의 딸이 되지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손과 눈과 마음과 두뇌 등의 은사를 사용하며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W. Barclay). 한 마디로 말해,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표적에서 빗나간 성향과 사상과 말과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엡 2:1의 주석).
[정결케 하는 일]은 카타리스몬(καθαρισμὸν)으로서 ‘청결하게 하는 것’이나 ‘병을 고치는 것’, 특히 ‘도덕 및 종교적 죄를 사하는 것’을 의미한다(막 1:42, 7:19, 고후 7:1, 딛 2:14, 히 9:14, 약 4:8 등).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일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성취된 것이다(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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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전함에 대하여 카터(C. W. Carter)는 “[그가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는 말씀에 의해 암시되고 있다. 앉으셨다는 말이 완성과 궁극성을 의미하는 데 반해,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이라는 그분의 지위를 나타내는 말은 그분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있으며, 그분이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죄인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 이 말은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을 통하여 죄와 사단을 이기심으로써(참조: 계 1:18) 그리스도께서 진노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시고, 구속자이시며, 대속을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신 분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헨리(M. Henry)와 스코트(T. Scott)도 “중보자요 구속자로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시고 땅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거기서 하나님 옆에 앉게 되신 것은 자신을 낮추신 데 대한 상급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날에 바로 이분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그분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로도 다하지 못할 사랑의 신비이다.”⑥라고 하였다. 휴스(P. E. Hughes)는 그분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에 대해 그분의 정결 사역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음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표현을 공간적 의미로 이해하는 위험에 대해 브루스(F. F. Bruce)는 “사도 시대뿐만 아니라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을 문자적인 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교부들은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특별한 장소에 그리스도를 묶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절대적인 초월성이라고 주장했는데, 중세의 학자들도 이 주장을 따랐다. 예를 들어, 헬베우스는 ‘그분이 앉으셨다’는 그분이 최고의 안식, 통치, 그리고 심판을 행하심을 의미하며, ‘우편’은 동등성과 명예를, 그리고 ‘높은 곳’은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남을 뜻한다고 설명한다”(P. E. Hug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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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Matthew Henry and Thomas Scott,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pp. 116-117, in C. W. Ca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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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히브리서(서울: 글벗사, 2001, 1판 1쇄), pp. 7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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