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술수(術數)에 걸려든 사람들...

오재영
  • 1614
  • 2021-02-17 03:56:18
사탄의 덫과 궤계(詭計)에 말려든 사람들...

세계 제 2차 대전 때 독일군은 600만 명이나 되는 유태인들을 학살하였다. 600만 명이라면 오늘의 서울인구의 절반에 해당이 되는 숫자다. 짐승도 아닌 사람을 600만 명씩이나 죽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저들을 죽여야만 하는 독일군인들의 양심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을 단지 유태인이라는 것만으로 어린 아기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살육(殺戮)한다는 것은 이성 있는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에 선뜻 그 일에 나서지 않는 군인들로 인하여 자연히 학살의 진행이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독일 지도자들이 처형하는 군인들의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도의 심리적인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수용소에 화장실을 짓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3만2천명이 수용되어 있는 여자수용소에 화장실을 단 하나 밖에 짓지 않고 하루에 10분씩 두 번만 화장실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들은 숙소에 돌아가서 식기로사용하는 깡통에 배설을 하고, 아침이 되면 그것을 비어내고 거기에 음식을 담아먹고 그랬다 그것도 모자라서 새벽에 일어나면 걸어 다니는 통로에 자기들이 배설한 배설물들이 가득 있어서 발로 치우며 걸어 나가야하는 형편이 되었다. 자연히 저들의 온몸은 저들이 배설한 배설물로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머리는 짧게 깎고, 죄수복을 입고, 온몸은 배설물로 더럽혀졌다. 이것이 그 당시 포로수용소의 저들의 생활이었다. 아주 짐승처럼 비참해졌다.

독일군인 하나가 상관인 장교에게 묻는다. “이왕 죽을 사람들인데 왜 저렇게까지 하십니까?” 그때 독일군인 장교가 얘기한다. “너희들의 양심을 편케 해주기 위해서다.” “그게 무슨 뜻 입니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짐승을 죽이는 일은 조금 쉽다, 개나 돼지를 죽이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쉬우며 개나 돼지를 죽이는 것보다 개구리나 뱀을 죽이는 것이 더 쉽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배설물들로 인하여 저들을 오물과 함께 더럽혀 놓음으로써 人間의 자존(自尊)심, 존엄성(尊嚴性)을 말살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아도 그가 인간이라고 하는 존엄성 하나를 잃어버리면 그는 한 순간에 될 대로 되라, 하는 짐승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이를 가리켜 “너도 인간이냐?”한다. 이처럼 인간이 짐승이 되면 그를 죽인다 해도 그다지 큰 가책이 되지를 않고, 그 비참한 상태에 있는 유태인들도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갖게 되고 그들을 죽이는 일이 도리어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는 그런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이모저모로 심리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유태인으로서 생존한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생존하려는 사람은 기적만 기다려서는 살수가 없었다. 물론 기적이 있어야만 살아났지만 단순히 기적만으로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는 기적과 함께 철저히 “생존에 따르는 원칙”을 지켜야했다. 짧은 기간, 수용소에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터득한 생존의 원칙(原則)이 있었다.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빵의 원칙이었다. 생존을 위하여 빵부스러기 한쪽이라도 더 먹어야 했다. 동시에 가능하면 팔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극도로 절제해야 했다. 운동이 지나치면 영양이 감당을 못하니까 죽게 되는 그런 예리한 현장에서 살았다.

그래서 저들 스스로가 만든 수용소내의 법칙(法則)이 있었는데, “남의 빵을 훔치면 죽이자”하는 것이었다. 남의 빵을 훔치는 것은 단순히 빵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훔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빵 하나를 잃어버림은 곧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그런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생존하려면 기적만 믿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빵에 원칙’을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또 하나의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생존하려면 누구나 잊지 않고 매일 “세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생존하지 못했다.

오후 4시30분이 되면 커피한잔이 배급되었다. 말이 커피지 악취가 나는 물이었는데, 그 물의 중요함은 따뜻한 물이었다는데 있다. 추위와 먹지 못해 열량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따뜻한 물로 자기 몸을 녹일 수 있다는 것은 생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오랜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중요하게 배운 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에게 배당된 그 생명과도 같은 따뜻한 물을 다 마시지 않고 절반만 마시고 나머지 반 컵의 물로 세수(洗手)를 하는 사람들이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건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서 발견한 소중한‘생존의 원칙’ 이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반 컵의 물을 남겨서 그것으로 세수하는 사람들이 오래 산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4시 반에 커피가 배급되면 반 컵은 마시고, 나머지 반 컵의 물을 남겨서 자기 죄수복의 한 귀퉁이를 찢어서 빨아 이를 닦고, 얼굴을 닦고, 온몸을 닦아나가기 시작을 했다. 반 컵의 물로... 온몸은 배설물로 더럽혀져 있는 그 몸을, 어떻게 씻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그래야만 살았다. 그것으로 깨끗해진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다 씻은 것도 아닌데도 그렇게 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오래 살았다.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그 일을 그저 배워서 하다가 어느 순간 회의(懷疑)에 부딪쳤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고, 쓸데 없이 에너지만 낭비하고, 생명과도 같은 따뜻한 물을 반 컵씩이나 잃어버리니 잘못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저 마시는 일이 이모저모로 따져 봐도 그것이 더 생존하는데 유익하다. 생각하고 씻기를 거부하고 반 컵의 물을 마저 마시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하였다. 당시의 그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이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알았다. 그것은 무덤으로 내려가는 전조(前兆)였다. 저들은 며칠이가지 않아 모두가 죽었다.” 반 컵의 물로 씻는 것을 포기하고 마시는 것을 볼 때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덤으로 내려가는 전조였다. 저들은 며칠을 못가서 다 죽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사람들은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왜, 반 컵의 물로 세수를 해야만 살게 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독일군인에 대한 “레지스탕스”였으며,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저항”이었다. 그리고 그 저항하는 정신이 生命力이 되어 그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열악한 생존의 조건 속에서도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생존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생존자중의 한사람, ‘레빈스카’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저들의 음모를 깨달은 후에, 우리를 짐승처럼 만들려고 한다는 음모를 깨달은 후에 속에서 살아야하겠다고 하는 생명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죽더라도 저들이 바라는 것처럼 짐승으로 죽어주지는 않겠다.” 이건 위대한 결심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누구나 죽을 수 있다. 죽을 확률이 훨씬 더 많다. 그러함에도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했고, 살아남겠다! 그러나 만일 죽는다 할지라도 저들이 원하는 것처럼 짐승으로 죽어주지는 않겠다. 결심을 했다.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죽겠다”라는 결심을 했다.

자신이 다짐한 것을 실천하기위하여 그때부터 ‘레빈스카’가 처절하게 싸웠던 것은 “반 컵의 물”이었다. 마저 마셔야 할 것인가? 씻어야 할 것인가? 반 컵의 물을 갖고 씻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독일군인들이 저들을 배설물로 더럽혔는가?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시켜 ‘짐승 화’하기 위해서였다. 그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인간으로써 살아남아야하는데 무엇으로 내가 人間이라고 하는 증명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반 컵의 물”로 씻는 것이다. 유혹을 뿌리치고 남겨 들고 있는 반 컵의 물로 자기를 지키고 있는 독일군인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아무 말 없이 이를 닦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서운 외침이 있다. “봐라! 나는 인간이다” 인간 외에 어느 동물이 이를 닦겠는가? 이를 닦는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 것처럼 짐승으로 죽어주지는 않겠다”하는 저항이었다. 인간다운 정신력, 그것이 곧 생명력이었다. 인간답게, 깨끗하게 살겠다. 하는 저항 정신, 그것이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저들이 생존하는 놀라운 힘의 근원이었다. 어느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예수님 믿고 천국가세요.” 전도하는 깜찍한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어른이 물었다. “야! 천당은 어떻게 가니? 예, 예수님 믿어야 가요, 그러면 지옥은 어떻게 하면 가는데? 예, 그냥 가만히 있으면 가요...”

글을 마치며...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된다. 언젠가부터 우리교단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빠짐없이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자기 묵상과 성찰의 다짐보다는 별 의미도 없는 일에 모여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지적과 정죄의 목소리 높이는 절기가 되었다. 각국위원회의 해당되는 이들마다 대부분 미(未)자립을 벗어난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임에도 오늘의 현실을 두려워하며 부끄러워하는 이들의 모습들은 보이지를 않는다. 모두가 완장차고 나서는 이들 뿐 아닌가? 너나없이 남기는 그 흔적들마다 이후에 주님 앞에서 평가받을 용기들은 있는가?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이자 사상가요 철학가인 폴 발레리 (Paul Valery)의 어록 중에 “그대가 용기를 다해서 생각한대로 살지 아니하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할 것이다.” 창녀는 창녀 식으로 생각을 한다. 사기꾼은 사기꾼 식으로 생각을 한다. 도둑은 도둑 식으로 생각을 한다. 모두가 명분을 내세우며 합리화시키면서... 그러나 자기 편한 습관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기질 따라 살다가는 머지않은 날 땅을 치며 후회하는 때가온다.

P.S. 글 앞의 예화는 30여년전 cbs영락의시간 김동호목사의 (로마서 강해메모를 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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