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서워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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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7 23:19:57
제가 처음 감게에 들어와 보니 엉망이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엉망이란 양진영에 속한 이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서로 논쟁을 버리는데 그것은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무조건적인 무시고 비웃음이고 조롱으로 가득한 투석전이었던 것입니다.

이 투석전을 두고 어떤 분은 누군가를 위해 총구를 겨눈 소총수라 표현을 하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닭싸움이라 비유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분들은 진흙탕 싸움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제각각 비유는 다르지만 감게의 모습을 나름 제대로 표현을 한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저는 다른 이들의 사상(신앙)검증을 하기 위해 감게에 들어온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 자신의 사상(신앙)을 검증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은 사회법으로 감독회장의 문제를 이끈 분들에 대하여 질타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너도 김*도 편이구나 어디 니 얘기도 해봐라 김*도 목사가 감독회장이냐? 묻기에 나는 총회에서 다수의 표를 얻었으니 김*도 목사님이 감독회장이시라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돈을 뿌려 표를 얻은 것이니 불법선거에 해당한다 그러니 무효인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선거야 돈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돈은 김*도 목사만 쓴 것이 아닐텐데요?"

그러자 '돈을 써도 작작 써야지... 김*도 목사는 다른 후보들 보다 엄청난 돈을 썼자나.....' 그에 대하여는 "돈을 많이 썼냐 적게 썼냐의 문제가 아니라 돈은 모든 후보들이 다 같이 썼으니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며 현 우리 감리회의 현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돈 문제는 서서히 바꿔나가야 합니다."라고 답을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자 김*도 목사의 과거 범과 사실을 들추며 '김*도 목사는 처음부터 후보 자격이 없었던 사람이야!' 그러기에 난 그에 대하여도 "선관위의 검증이 있었을 것이고 선관위가 문제가 없다 판단을 한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이라" 말을 하였었습니다. ㅎㅎㅎ

결국 그 문제로 김*도 목사는 감독회장으로 당선이 되고도 결국은 감독회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만큼 목사 한 사람의 언사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 나름 형님 목사를 위해 한 소리라 할 것이만 그 말 한마디가 그리 올무가 되어 감독회장으로 당선이 되고도 감독회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이*환 목사의 문제가 이젠 거대 언론 매체들의 기사 거리가 되어 논란이 커졌습니다.
아마 이*환 목사 스스로도 놀라고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아니 이 문제가 이렇게 까지......'

이*환 목사에겐 자의든 타의든 동성애 지지하는 목사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한 젊은 목사가 그렇게 정치적 놀음판에서 희생양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총재위는 판결을 미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환 목사에 대하여 장정에 따라 판결을 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정치적 성향이란 틀 안에 갇혀으니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며 죽어도 죽은 목숨이 될 수 없음일 것입니다.
총재위의 판결은 결국 정치적 결정이었음이라 또 난리가 날 것입니다. 이*환 목사의 의도완 무관하게 이리저리 난도질 당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희생양,
우리는 예수님을 흔히 희생양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희생양은 정치적 논쟁으로 인하여 죽음으로 몰려 대신 죄값을 치뤄야만 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보지 말고, 제사론적인 희생양(대속제물)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굳이 굳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몰고 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념주의자들이고 정치권에 속한 이들입니다.

감게의 난장판도 편가르기식 정치 놀음이 된지 오래이고 이념주의자들의 놀이터가 된 지도 오래 입니다.
그러니 어느 분은 정치적 뒷 배경을 갖고 글쓰지 않는 이가 어디 있는가?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 100% 부합한 것은 아니라 생각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치적 뒷 배경을 두고 글을 쓴 적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도 내 생각일 뿐 다른 분들이 볼 때는 '너도 정치적 뒷배경이 있고 너도 누군가를 위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소통수에 불과하자나...' 라고 하신다면 그 또한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렇게 말을 하고 싶습니다.
"굳이 내 정치적 뒷 배경이 있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뒷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내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이 있다면 성경이며 장정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환 목사의 징계에 대하여 장정의 근거로 글(경기연회 이*환 목사 정직 2년 과연 적절한 것인가?)을 썼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뒷 배경을 두고 글(이*환 목사를 향한 권면)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더불어 인권보호라는 입장으로도 영화 한편을 소개하면서 글(Re: 동성애 지지파 Vs 동성애 반대파에게 권하는 영화)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나름 중립적인 위치에서 썼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뭐 그것에 대하여는 읽는 분들이 판단할 몫이니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으며 내가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해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헛 수고라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감게는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념의 문제라 생각을 합니다.

소위 말하는 진보와 보수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며, 우파와 좌파의 기득권 싸움이며, 소위 말하는 순수 복음주의(?)자들과 사회 복음주의(?)자들 간의 다툼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순수 복음주의자들이라면 은근 자기 중심적이고 개인 이기주의적 성향이 있으며 개별활동을 합니다.
사회 복음주의자들이라면 은근 사회 중심적이고 집단 이기주의적인 성향이며 연합적인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감게의 정치적 투석전은 대부분 사회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우세한 것으로 언제나 보입니다.
다만 비정치적 영역에서의 활동은 순수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우세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감게가 감리회가 기독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논쟁은 언제나 보수, 우파, 순수 복음주의자들이 우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논쟁에 있어선 진보, 좌파, 사회 복음주의자들이 조직적인 연합체(각종 단체)와 같은 모습을 보임으로 앞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음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 모두의 주장을 가만히 지켜보면 하나의 공통점은 있습니다.
그 공통점인란 모두 잘해보자는 것입니다. 모두 지금보단 더 나은 감리회를 이뤄가자는 것입니다. 다만 그 방향성이 다르다 보니 서로 갈등하고 다툼을 보이고 있음입니다.

감게는 늘 혼란입니다.
감게는 늘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감게는 늘 흙탕물이 되어 있거나 오물로 가득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지켜보면 감리회(감게)라는 공동체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가만히 지켜 보면 모두가 감리회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애정을 보이고 있음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열정과 애정의 면에서 본다면 그 분들은 모두 하나(감리회원) 입니다.
다만 표현하는 방향성이 다를 뿐입니다.

나는 그 분들의 열정과 애정을 지지합니다.
나는 그 분들이 감리회를 위하는 마음에 매우 큰 공감을 갖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보이는 방향성을 조금만 조금만 수정했으면 싶고 그 분들의 방향성을 아주 바꿔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니가 뭔데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을 거론하는 것이냐? 너만 첫사랑이 있냐? 나도 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어 내 첫사랑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래?"

그 첫사랑의 이야기는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성경 말씀을 듣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아멘'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첫사랑에는 감게의 논객들만 아니라 감리회에 속한 모든 이들이 한 마디씩은 다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분들에게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큰 실례인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하여 자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 내가 뭔데...."

그런데 그 첫사랑의 이야기는 한편의 성경 말씀과 같은데 왜 지금은 세상의 이념과 모든 잡설들을 늘어 놓고 있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에게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추억 속의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첫사랑을 잃어 버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첫쩨는 오랜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삶의 현실 속에서 잊혀진 것이고, 둘째는 자기 생각(이익)이 너무도 강해져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자연스럽게 잊은 것이라면 다시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그 감동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예전과 같지 않거나 전혀 감동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만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익)이 강해져서 그런 것이라면 내 생각을 내려 놓고 내 주장을 내려 놓고 그 어떠한 이익도 구하지 않던 첫사랑을 회복해야 만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합니다. 오히려 '그럼 너는 그렇게 살고 있느냐?' 되묻습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성경말씀으로 권면을 하였고 때론 너튜브 찬송을 복사하여 함께 들을 것을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가 아주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니가 뭔데 건방지게 내게 성경으로 권면을 하고 니가 뭔데 찬송을 듣자고 권해? 니가 지금 나를 조롱하는 거냐?' 조롱이 아닙니다. 우선은 내가 듣고 싶어 듣자 한 것이고 우선은 내게 소중한 말씀이니 그 말씀을 함께 하자함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찬송이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첫사랑을 하던 때엔 신학을 몰랐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성경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저 한 구절, 한 찬송, 한번의 그 경험이 내 인생을 바꿨고 내 생각을 바꿨으며 내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첫사랑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삶은 매우 복잡하기만 합니다.

성경, 신학, 철학, 이념, 세상의 잡설과 세상의 교훈들......그리고 내 욕심들......

욕(탐)심은 아름답던 첫사랑을 변질 시킵니다.
욕심은 구하지 않던 것들을 구하게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게 만듭니다. 또한 안목의 정욕을 채우려 하고 육체의 정욕을 쫓으려 하고 이생의 자랑을 만들어 쌓아가려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첫사랑을 통해 알던 것도 잊게 하고, 느껴던 것도 잃게 하고, 감동을 빼앗아가며, 울림이 멈추게 되며, 자신의 고집과 교만과 자랑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어쩌면 나도 이러한 고집과 교만함과 자랑을 위해 감게를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내 사상(신앙)에 대한 검증이라는 그럴싸한 말(명분)로 포장해서 말입니다.

명분은 정치적 용어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정치적인 마음으로 감게에 들어 왔었는가 봅니다.
다른 분들과는 다른 정치적인 마음으로 감게에 들어와 몇몇 분들에게 검증을 받기를 원했고 그 검증의 방법으로 댓글을 달고 그 댓글에 대한 답을 받고 제 글에 대한 질문이나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의도완 다르게 댓들의 논쟁은 시시하게 끝이 나는 일들이 허다했습니다.

한 분은 웨슬리의 설교에 정통해 보이는 분이 계셨었습니다.
오직 웨슬리... 웨슬리... 하시는 것 같아 웨슬리의 이야기를 통해 검증을 하고자 했는데 그 분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경험적으로 이해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지만 제 설명은 일방적으로 무시를 하거나 논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회피를 하셨습니다.
요즘 그 분은 글을 쓰시지 않습니다. 감게와의 관계를 아주 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 분은 아주 정갈한 문체로 다양한 인물과 책들을 소개하며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결말 즈음에 하셨습니다. 그러니 한 편의 설교문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수필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향해 읽어 보란 의미로 권면의 글처럼 보이는 글들이었습니다.

그 분은 가끔 이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될까 싶은 속담을 인용하기도 하시며, 불특정 목사들을 향해 '성령을 받지 않고 목회를 하라.'고 함이 가장 큰 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목사는 어떤 의미에선 목사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저주일 수도 있고 목회자에게 있어 가장 큰 숙제 거리가 될 수도 있음이라 생각을 합니다.

나는 그 분에게 대수롭지 않게 댓글을 달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성령을 받으셨나요?"
그냥 받으셨다 하시면 되었을 것인데, 그에 대한 답은 과거 당신의 경험들을 얘기하며 말 끝을 흐리고 정작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 지에 대답은 회피를 하셨습니다.

목회자 중 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심 같은데.... 정작 당신은 그에 대하여 답을 당당하게 하지 못하심에 제가 오히려 당황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을 하듯 그에 대한 답을 요구하였지만 결국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당신 스스로 '당연하지 내가 성령을 받지 않고서 이런 글을 함부로 쓸 수 있겠는가? 내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전재하에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어찌 자네는 그것을 모르고 이리 무례하게 구는가? 내가 자네 보다 목회 연륜이라 모든 면에서 경험이 풍부한 선배일 것인데... 아주 건방진 친구구만...'이라 생각을 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의중을 헤아리진 못하고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으니 그 목사님이 당황할만 했다 생각을 합니다.

나는 다른 분들에게도 찾아가 댓글을 달면서 성령에 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모든 분들이 저와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으셨습니다. 이유인 즉슨 너와는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인 분들도 그러했고 진보적인 분들도 그러했으며 심지어 감게의 주경신학자로 알려진 분도 답은 하시지 않으시고 무조건 당신의 글을 읽으면 이해할 것이라 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내가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가 뭔가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난 단지 궁금하여 물어 본 것 뿐이고 명확한 답변을 듣고자 함이었을 뿐이었는데 말입니다.

내가 댓글을 달고 말을 하는 데 있어 뭔가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대학원 담당 교수님이 마지막 식사를 하시며 내게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아유, 노재신 이 꼴통도 드디어 졸업을 하는구만!"

그 교수님은 그 말씀을 기억하시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냥 대수롭지 않은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내게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도 늘 내 자신을 돌아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진짜 꼴통이라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질문도 꼴통처럼 하고 있음인가?'

그러다 얼마 전 그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아니 그렇게 글을 쓰시면 어쩌십니까? 아주 대놓고 그 목사가 한 말 한마디를 갖고 그리 장황하게 해석을 하고 권면이라 하시면 어쩝니까? 그거 아주 못된 일입니다. 요즘 누가 그렇게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권면을 합니까? 그리고 그렇게 권면서를 써 놓고선 너튜브를 복사해와 찬송가를 함께 듣자고 하고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성령의 감동을 받으라니요. 이건 아주 무시고 이건 아주 대놓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요? 그렇게 글을 쓰실 거면 아주 대놓고 차라리 욕을 하시지요. 왜 자꾸 감게에서 꼰대질을 하려 하시는 건가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목사에게만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도 성경의 말씀을 인용함이 상대 목사님에 대한 무시였으며, 성령을 받았냐는 질문은 욕이 되었으며, 성령의 감동을 받기 위해 멈추고 찬송을 듣자고 함이 조롱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진짜 꼴통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분의 입장은 하나도 생각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조건 내뱉고 보는 천방지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 자신을 알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나는 오랜 시간 감게를 통해 여러 사람들과 댓글 논쟁을 하였고 또 글도 많이 썼습니다. 아마도 모아두면 장*호 목사님이 쓰신 글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가끔씩 통화하는 분들과의 대화 속에 그 분들은 나를 향해 답답함을 토로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답답함은 나와는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진흑탕에 나뒹굴면서 나도 진흙이 많이 묻었는가 싶었습니다.

목사님들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더 이상 나와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고 하심에 나도 모르게 똥이 발에 많이 묻었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똥이 내 발에 묻어 있음이 아니라 내가 똥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내가 무서워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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