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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게에 들어오게 된 네 번째 이유
관리자
- 1314
- 2021-03-06 23:03:31
1. 믿던지 말던지 신*하 목사의 위함이었고
2. 사회법 소송을 멈췄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3. 덤으로 목원 출신인 김*도 목사가 감독회장의 직임을 감당했으면 했었습니다.
개인적인 억지를 쓰는 것도 아니고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며 다수의 총대들의 선택에 의해 선출된 분이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생각을 했던 일은 신*하 목사 측의 지지자들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야만 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극히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제 안에도 무엇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영웅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리고 목회의 현장에 나오면서 뭔가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하고 싶습니다.
뭐 근자감일 수도 있구요. 믿음과 근자감 비숫하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전혀 다를 수도 있지만 또 매우 비슷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한 자신감이라면 일반적인 근자감은 아니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통한 자신감은 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합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50%는 그러한 자신감으로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의 현장에 나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목회의 현장에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통한 자신감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부모님을 통한 자신감으로 목회의 현장에 나가는 친구들도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들은 대부분 시작부터 다르더군요.
시작이 비슷하다 하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부모님과 친구들의 관계를 장*호 목사님는 감리회의 현실을 수습을 방해하는 적폐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적폐라 하면 엄청난 잘 못이라 생각을 하는데... 실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에 속하는 것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을 합니다. 부모의 빽을 믿고 목회의 현장에 나가는 목사들도 믿음이 있으나 실상은 다릅니다.
그러나 개중엔 이 다름이 다름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믿음을 통한 자신감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친구들도 있으니 부모의 빽을 믿고 목회 현장에 나가는 이들을 전부 믿음이 다른 친구들이라 할 수는 없다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가운데 있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 생각을 하며 성경 말씀 또한 부모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의롭다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신실한 믿음의 사람에겐 후손들도 복을 받게 하리라 하셨으니 결국 그 또한 하나님우 주시는 복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부모의 복으로 목회의 현장에 나갈 수 없는 나로서는 왠지 속이 뒤틀리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음과 같이 저도 그 속담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할 순 없을 듯 합니다. 그러니 목사가 되었으나 여전히 세상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는 내 자신을 볼 때면 한 편으론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픗~~~ 세상의 모든 일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선 넌 아직까지도 거기에 서 있구나.....'
내 게는 옛 사람이 있습니다. 그 또한 더럽고 치사한 옛 사람이니 부모의 덕을 보는 것 같은 친구들이 나쁘다 할 수 없고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라고도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 만은 바로 가르칠 수 있는 목사가 되게 하여 주십시요.'
그러나 이*환 목사에게도 글을 썼지만 목회의 권태기가 찾아 왔습니다.
목회의 권태기란 이 또한 목사의 현타 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경험하게 되는 세상에 속해 살아가야만 하는 연약하고 무능력하고 못난 목사의 현타, 이런 현타가 없다면 그는 진정 대단한 목사라 생각을 합니다.
정말로 사명감에 불타올라 현실에서 부딛혀야만 하는 현실의 벽을 두려워 하지 않거나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러한 영적 정신적 심리적 옛 사람에 이끌리지 않거나.... 그도 아니면 승승장구 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거나 .... 제가 생각하는 목사의 현타를 경험하지 않게 되는 3 가지 유형의 목사들이 있다 생각을 합니다만 그들도 사람이라면 또 다른 목회 현장의 벽에 인한 목사의 현타가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이 3가지 외에 목사의 현타를 경험하지 않는 목사님이 있다면 어떤 분인지 만나보고 싶습니다.
목사에게도 목사의 현타, 목회 권태기가 있습니다. 이것을 헤쳐 나가는 방법엔 다양한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이 다양함은 목회자가 처한 상황과 현실과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니 이것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결국은 3가지가 있다 생각을 합니다.
목사의 현타, 권태기를 이기는 방법 1) 오직 은혜로만.... 참 말하긴 쉬운 말입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로만은 정말 쉽지 않은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표현 가운데 엄청나게 많은 체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 할 수 없겠지만 목사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것은 딱 한 마디라 생각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2) 목회적 일탈로 인한 해소입니다. 이 일탈은 성적인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것들이며 대부분 유흥과 관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무슨 목사가 유흥을....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게 목사야? 라고 하실 분도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목사도 목사이기 이전에 육체적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알게 모르게 육체적 유흥을 통한 일탈행위가 많습니다. 여기엔 극히 건전해 보이는 운동(스포츠)도 포함이 되고 취미생활도 되고 또 학문적 열심도 해당이 됩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유흥의 종류는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행위가 유흥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도박이나 술이나 담배가 유흥일 수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지적(궁부, 책읽기)인 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유흥일 수 있으며, 무조건적인 목회적 성공만을 추구하거나 사회 운동을 통한 성공제일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 공부하는 것을 유흥이라 할 수 있으며 운동을 좋아하는 것을 유흥이라 할 수 있으며 취미활동을 유흥이라 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목회적 성공을 일탈이라 유흥이라 할 수 있습니까? 반문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참 다양한 방법으로 유흥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에 대하여 할 말이 많으나 오늘은 여기까지...
3) 목회 현장으로부터 탈출, 가장 현명할 수도 있고 가장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되돌아오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멀리가는 경우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후에 정말 나중에 주님의 은혜로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로 목회의 현장으로 돌아오지 않을 이들입니다.
목사들은 사명감이 넘치고 성령이 충만하고 세상의 모든 유흥과 쾌락에서 벗어나 살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거야 말로 목사를 신격화, 의인화 내지 우상화 시키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물론 앞서 얘기한 1) 유형, 목회적 권태기를 오직 은혜로만 이겨내는 분들이 있을 것 같으니 그 생각이 맞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의 생각과 선입견과 편견이 목사들로 하여금 이중적 삶을 살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1) 유형과 2) 유형을 오가며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목사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도 그러한 외식적인 생활을 하였던 목사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외식은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이 독사의 자식(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멍멍이새끼)이라 대놓고 욕을 하시던 부류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목회적 현타는 목사들로 하여금 외식적인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장에서 외식이 없는 목사를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저는 당당히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목사님을 오늘 만나거든 그 분에게 진짜 인생을 올인하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을 주님의 현현하심으로 믿고 주님을 대하듯, 주님을 만난 것처럼 하시라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외식없는 사람들을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의외로 세상에서 가장 멸시하고 경멸하고 천대하는 삶의 자리에 가보면 외식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외식적인 사람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시나요? 교회를 비롯한 종교시설에 가보십시요. 그리고 학교와 정치의 현장에 가보십시요. 그곳엔 세상의 온갖 외식쟁이들을 만나보게 될 것이라 감히 장담을 합니다.
외식쟁이 목사, 전도사, 외식쟁이 장로, 권사, 집사.... 그러나 그 중 천 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 너무도 신실하여 겉과 속이 동일한 성도를 볼 수 있게 될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그런 신실한 성도를 만나게 된다면 천이면 999명은 모두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 성도는 세상의 천대 받고 멸시받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일 가능성이 99.9999%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리 장담할 수 있느냐구요? 그건 비밀입니다. ㅎㅎㅎ
어쨌든 목회자의 일탈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 현장에서 마주친 현실의 벽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 뭔가 내게 문제가 있음이겠지? 뭔가 내가 잘못을 하고 있음이겠지? 뭔가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부족한 것으로 말하면 너무도 많고..... 잘못이라 한다면 내가 무엇을 그리 잘 못을 한 것일까?
문제가 있음이라면 혹 내가 목사로써 마땅히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못 전하고 있음이었던가?
그래 똥 멍청이인 내가 뭔가 잘 못 전하였고 뭔가 잘 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저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전하였던 것들에 대한 검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또한 목회적 일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전하고 있던 하나님의 뜻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4. 그 다음 제가 마지막과 같은 마음으로 검증을 위한 일탈행위로 찾은 것이 바로 감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허 목사님들이 왜 저러지? 이건 분명 아닌데.... 이렇게 하면 서로 죽자는 것 밖에 안되는 데....
대체 저 분들의 생각은 나와 얼마나 다른 것이지... 대체 저 분들의 주장은 나와 얼마나 다른 것이지.....'
그래서 감게에 글을 썼고, 쓰신 글들에 대하여 댓글을 달고, 댓글에 답을 하고, 대들어 보기도 하고, 물어 뜯어 보기도 하고, 심지어 권면도 해보고, 더 나아가 목사님들에게 주님처럼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목사님들에게 가르치려 들었고, 심지어 목사님들의 사상을 점검해 보려 하기도 하고, 심지어 목사님들을 정죄도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느덧 내 자신의 의도완 다르게 누군가를 위한 소총수가 되어 있었으며, 싸움닭이 되어 있었으며,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향한 저격수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글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갖고 있던 생각과 내가 지금까지 열심으로 전하려 했었던 이야기들이 오히려 옳은 것처럼 바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모든 목회 일탈적 행동들이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되어 내 안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음을 모른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