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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서드】일목비애(一目悲哀)
함창석
- 1199
- 2021-03-09 05:16:02
一目悲哀
함창석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5-9)
고대신화나 전설에 나타나는 타계나 저편의 주인, 또는 그 세계와 교섭하는 자는 정상적인 자와는 다른 비뚤어진 모습을 취한다. 그 이형의 모습은 소인, 거인, 반인반수, 한쪽 다리, 애꾸눈 등 다양한데, 모두 이 세계가 아닌 이차원의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 전율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한쪽 눈의 거인 큐크로프스가 유명하다.
일명 애꾸눈은 한쪽의 눈이나 시력을 잃은 상태를 말한다. 병(종양 등) 따위 내인적 요인이나 사고 혹은 전투 중 입은 부상, 강압적 제거 따위 외인적 요인, 기형에 의한 선천적 요인의 경우도 있다. 잃은 눈이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상관없이 똑같이 불린다. 눈을 잃었기에 의안을 넣거나, 안대 등으로 숨기고 스스로 위엄의 과시를 겸하는 일도 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면 잔인한 왕들은 그들을 애꾸눈을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한 쪽 눈을 잃은 그들은 균형감각을 잃어 도망을 갈 수가 없다고 한다. 한쪽 눈을 가리고 걷거나 계단을 오르면 무척이나 힘들다고 하며 달리기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두 눈으로 살아가기도 힘든 세상에서 한 눈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황봉알이라는 사람은 어렸을 때 에디슨처럼 호기심이 많아서 할머니가 눈에 안약을 넣는 모습을 보고 자연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황산구리 용액을 왼쪽 눈에 넣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병원에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고흐의 그림 중에 이 남자 모델의 한쪽 눈은 놀랍도록 강렬한 청록색을 띠고 있다. 화가는 배경에도 같은 색을 사용했다. 또 다른 눈꺼풀은 감겨있다. 이 남자는 한쪽 눈이 멀었거나 눈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델은 고흐가 일 년 간 머물렀던 생 레미 소재의 정신 병원의 환자였다. 고흐는 다른 환자들을 두려워했지만, 그중 두 명의 초상화를 그렸다.
애꾸눈의 대명사인 궁예는 진골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라를 망칠 놈’이라는 예언과 함께 모진 인생역정을 시작하였다. 버려지는 과정에서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고난 힘과 재주로 사람을 모아 드디어 후고구려를 세우는 왕이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미륵으로 자처했으며, 관심법이라는 특유의 술책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그것이 지나쳤을까, 포악한 성격으로 주변의 인심을 잃고, 드디어 부하인 왕건에 의해 내몰려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신라 제47대 헌안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후궁 사이의 소생이라는 설과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 제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 등이 있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왕이 그를 죽이도록 명하였는데, 유비(젖먹이 비녀)가 그를 구해(이 때 떨어지는 궁예를 받다가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함) 몰래 길렀다고 한다. 이에 대해 궁예가 왕위 다툼에 희생되었던 왕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891년 세달사를 떠나 죽주(지금의 안성시 이죽면)의 반신라적인 호족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 892년에는 북원(지금의 원주)의 호족 양길의 부하로 활약하였다. 894년 10월 명주(지금의 강릉)에 입성하여 3,500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였다. 궁예는 사졸들의 신망을 얻어 곧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하고 부대 편제를 정비하였으며, 지휘권을 확립하는 등 명주에서 자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895년 태백산맥을 넘어 한산주 관내 10군현을 차지하는 등 군세를 떨쳤다. 896년에는 송악(지금의 개성)의 유력한 호족 왕건 가문이 귀부하였다. 이렇게 패서 지역 호족들의 세력을 모으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패강진 호족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896년 철원에 도읍하였던 궁예는 898년 7월에는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으나 왕건세력에 의해 축출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