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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을 살아가는 영적 생활/이계준목사(연세대 명예교수)
유삼봉
- 1341
- 2021-03-08 13:37:51
마태 9:14-17, 요한 4:16-26,
1.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할 때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확실히 몰랐습니다. 당시 A. 토플러를 비롯한 미래학자들이 디지털 사회, 인공지능사회, 예측불허의 사회라고 예견했으나 20년이 지나서야 우리 시대와 우리 모습을 밝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하게도 코로나19가 세계적인 팬데믹과 함께 인류의 문명을 뒤바꾸는 문명사적 전환을 몰고 온 것입니다.
이 전환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신체적 접촉에서 비접촉으로, 나아가서 사회적- 물리적 거리두기, 안전한 거리두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쓰나미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현상을 비접촉 untact의 시대 또는 “새로운 일상” New Normal이라고 합니다. 이제 낯익던 접촉의 시대는 가고 낯설은 일상이 우리 개인은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영역을 포함한 인류와 세계의 지배자로 군림한 것입니다.
문명의 변화 곧 접촉의 일상에서 비접촉의 일상으로 바꾸려면 새로운 소통의 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부담 없이 운영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란 도구를 이미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어 소통하고 우리가 가진 정보를 전달하며 삶을 공유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것을 우리 신체의 일부로 여기며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버린 새 인류 곧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ce)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포노 사피엔스의 모태는 작고한 스티브 잡스가 2007년에 창조한 아이폰이라고 합니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한 혁신가를 통하여 뉴노멀 시대를 맞이하게 될 우리 인간을 위해 놀라운 은총의 선물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2. 지금 우리가 뉴노멀 시대에 새 인류인 “포노 사피엔스”로 태어났다면 우리는 이에 적절한 신앙의 옷을 갈아입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과거 대면 중심의 일상이 일부 회복될지 몰라도 전문가들은 전적으로 회복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뉴노멀에 적절한 신앙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 크리스천 포노 사피엔스는 뉴노멀이란 새로운 상황에 부합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신앙의 패션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중심의 율법 종교를 갈릴리 중심의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 바꾼 것처럼, 또한 M. 루터가 중세기 교황 중심의 교회를 말씀 중심의 교회로 개혁한 것처럼, 오늘의 교권과 물량 중심의 교회에서 하느님과 영성 중심의 공동체로 혁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교회는 자의 반 타의 반 예배를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바꾸었습니다. 처음에는 예배 공간의 변화에 따라 엄숙한 분위기도 없고 주변에 교우들도 없으니 서먹서먹하고 성수주일을 지키지 않는 죄책감을 느낀 교우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대면 예배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휴식과 편리함을 느낄 수 있었고 교회에 가려고 노동으로 지친 육신을 혹사하지 않고 치장하느라 부산을 떨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 변화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무소부재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교회 안에 혹은 하늘 어느 지점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대면 예배는 하느님이 성전과 하늘 어느 지점에서 떠나 인류와 우주 전체에 편재하신다는 인식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엡 4:6)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경험은 우리의 신앙을 보다 심오한 차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 대화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은 영이시므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이 산이나 예루살렘과 같은 공간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요 4:21, 23)는 것입니다.
미국의 영성 신학자 R. 로어는 참 종교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가 우리를 심오하고 정직한 길로 이끌지 않는다면 종교는 영혼과 사회에 매우 위험하다. 종교에 관해 쉬지 않고 떠벌이는 “패스트푸 fast food 종교”와 소위 번영의 복음은 하느님을 회피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이제 우리가 심오하고 정직한 믿음에 이르려면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전3:16-17)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영적 제단을 쌓아야 하고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고 진정한 예배의 첩경인 것입니다.
둘째로 뉴노멀 시대의 크리스천 포노 사피엔스에게는 거룩한 날이나 주일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성수주일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은 날마다 주일이고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거룩한 날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날마다 안식일이므로 우리는 이웃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에서 하늘 잔치를 만끽하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지금까지 우리의 일상을 주중과 주말, 노동과 휴식의 이분법을 일원화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주중에는 사회활동에 치중하느라 신앙생활에 여념이 없다가 주말에야 휴식과 예배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할애해 왔습니다. 그러나 중세기 수도사들의 일상 전체가 수도생활의 연속이었던 것과 같이 크리스천 포노 사피엔스에게는 온라인으로 구성된 일상이 사실상 세속 속의 수도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어떤 교회는 70세 이상 원로들의 주일 예배를 토요일로 옮겼다고 합니다. 원로 교우들은 안식교회도 아닌데 토요일 예배를 못 마땅히 여겼으나 “예배드리는 날이 곧 거룩한 날이다.”는 담임목사의 설득으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새 시대 새 인류인 크리스천에게 주일이나 거룩한 날이 따로 없고 생소한 것과 이질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수용하는 일대 의식의 전환이고 종교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시장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고 예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 12:2) 그때 주님은 다윗도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제단의 빵을 먹었다면서 제자들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마 12:8)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는 말씀을 풀이하면 “주님이 계시면 그날이 안식일이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상을 성속(聖俗)으로 구별하는 구습을 버리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상이 곧 거룩한 날인 것입니다.
셋째로 뉴노멀 시대에는 교인과 비 교인의 경계선이 없어질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교인, 안 다니는 사람을 비교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 교인은 라디오나 TV 교인들처럼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교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 대신 “대면 교인”과 “비대면 교인”이란 구분이 합리적일 것이고 앞으로 “비대면 교인”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나안 교회”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이 명칭은 성경의 지명인 가나안이 아니라 이 말을 뒤집으면 “교회 안나가”는 사람들의 교회라는 뜻입니다. 기성교회에 식상하거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예배와 공동체 생활을 일삼는 것입니다. 어느 교단에 속하지도 않고 무교회주의 같기도 하지만 신앙공동체이고 보니 교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교회도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 문패를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뉴노멀에서는 비대면 교인들이 특정 교회에 속하면서도 온라인으로 다른 교회에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발품을 팔지 않고 누구의 눈치를 볼 것 없이 관광객처럼 여러 교회를 탐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마다 색깔이 다른 예배와 설교에 대해 호, 불호와 함께 비교도 할 것입니다. 농경사회의 농부들처럼 한 곳에 정착했던 교인들이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한 목회자는 이 뉴노멀이 교역자를 긴장시키는 동시에 더욱 분발케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배 선택의 확장은 교인들의 소속 교회 이탈을 유발하는 동시에 그들을 영적으로 크게 성장시킬 것입니다. 울 안에서 주는 것만 먹던 동물들이 울 밖의 광활한 초원으로 탈출하였을 때 그 넓은 대지에서 각종 풀을 뜯어 먹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과 같이 다양한 영적 양식을 섭취하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뉴노멀에서 크리스천 포노 사피엔스가 도달할 정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새 시대 새 인류로 태어난 우리 크리스천이 추구해야 할 신앙생활의 면모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와 역사 안에 편재하시며 새롭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께 영적 예배를 드리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전하고 성숙한 모습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시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