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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안목이 자기인생을 좌우한다.
오재영
- 1446
- 2021-03-25 21:15:05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일정기간 치료한 후에 어느 정도 건강하게 되어 퇴원을 시킬 때 ‘이 사람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도 적응이 가능할는지, 아직 치료가 더 필요한지’ 망설여질 때 마지막으로 그 환자의 정신건강 정도를 가늠하는 시험방법을 개발한 의사가 있다.
그가 개발한 정신건강 측정방법이란,
그 환자가 있는 방에 수도 장치를 해놓고 수돗물꼭지를 적당히 열어놓은 다음에 수돗물이 졸졸졸 흘러내리게 하여 그 물이 흘러 방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이면 환자에게 걸레를 주고 물을 닦으라고 한다. 이럴 때 만일 정신적으로 건강이 회복된 사람이라면 먼저 수도꼭지부터 잠근 다음에 엎드려 그 고인 물을 닦는다. 이는 퇴원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러나 아직 치료가 더 필요한 환자는 수도꼭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방바닥에 괴어 있는 물만 열심히 닦는다고 한다. 이 사람은 아직도 치료가 더 필요한 사람으로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우리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당한 현실을 놓고 잘했느니 안됐느니, 살겠느니 죽겠느니 하며 몸부림을 친다. 모두가 저놈들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를 높여 이 사람을 원망하고 저 사람을 원망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진행이 되었는지,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비롯되고 시작이 되었는지, 그 뿌리가 어디에 연결이 되어 있는지를 깊이 추찰(推察)해 들어가면서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중에 근본의 원인부터 고치려 노력하며 좋은 결과를 기다린다. 이런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며 건강한 사람이다.
사람은 사십(不惑.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과 아울러 주변에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다. 사십대가 되었을 때, 주변사람들이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그동안 그는 자기위치에서 원만하게 책임과 배려의 위치에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위치와 정도(正道)를 지키며 더불어 살아왔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그가 중년을 넘었음에도 주변사람들이 본인에게 다가오기를 주저하고 왠지 사람들이 본인을 부담스러워하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반가워하지 않는다면 ‘Something wrong with me’ 내가 뭔가 잘못 살아왔고 지금도 어쩌면 잘못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봐야한다.
신앙의 안목(眼目)이 자기인생을 좌우한다.
이처럼 주변사람들로부터 자신에게 행해지는 어떠한 소문과 평판이 주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그의 현재와 미래, 이 땅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주님 앞에서의 그날을 대비해야 할 求道者들에게는 지혜(智慧)있는 자세이며 특히 罪人의 원죄를 소유한 채 오로지 주님의 恩惠와 矜恤을 근거로 살아야 할 태생적인 이들이라면 영혼을 담보로 심비(心碑)에 간직할 마음가짐이다. 오늘도 내 앞에 허락된 그 사건과 사연모두가 변함없이 나의 성숙을 위한 주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라면 문제와 사건 앞에 더욱 낮은 자세로 근본원인을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안목을 넓혀가는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며 우리가 추구하여야할 모습이다.
오늘도 여전히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교활한 대적 사단과의 처절한 영적전투에서 천하보다 더 귀한영혼을 교도하는 사역자라면 자신이 겪는 표현 불가능한 만남과 사연들마다 좋든 나쁘든 그 책임은 바로 그 누구 때문이 아닌 주님께서 믿고 맡겨주신 본인 자신에게 있다. 아직도 소명(召命)에 대한 불분명함과 미숙(未熟)함으로 피차 겪게 되는 아픔들, 지금 우리가 피부로 겪는 사건들마다 교회의 문제로부터 지방, 연회와 교단, 더 나아가 경제문제, 정치문제. 사회 각 분야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분쟁의 소용돌이들마다 모두가 그 직(職)에 오르거나 맡아서는 안 될 적합하지 않고, 준비되지 못한 함량미달인 이들의 정도(正道)를 벗어난 그 대가를 지금 우리는 목도하며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남에 대한 지적에 집착하기에 바쁜 관계로 그 사람의 내면을 바로보지 못하고 그의 외면에 나타난 소유와 스펙에 따라, 평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그의 소유나 스펙이 아닌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며 어떠한 과정의 삶을 살아왔으며 현재 그가 지닌 철학, 지식, 그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가의 그 심연(深淵)을 바라보는 여유로움과 배려가 마땅하며 모두가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하는 바른 방향이며 길이다. 이것이 주님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들의 시선(視線)의식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능하겠는가?
글을 마치며...
주님께서는 오늘도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범인(凡人)에 속한 이들을 고난(苦難)과 시련으로 소명자(召命者)의 사람으로 질(質)을 바꾸신다. 그러므로 사명자의 길에 王道와 쉽고 빠른 길이란 없다. 혹여 있다면 그 길은 사단의 유혹과 착각일 뿐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그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시편기자도 “고난 당하기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39:67). 과거, 남들에 의하여 귀(聽覺)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眼)으로 봄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대가없이 도달할 경지가 아니다.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주님과 자신의 대가를 지불한 신뢰가 쌓인 결과일 뿐이다.
사순절(四旬節)의 마지막 주간이다.
종려주일에 이어 고난주간, 자신이 크리스천이라 생각되는 이들에게는 각자 오늘 자신의十字架, 自己否認을 점검해야 한다. 그 십자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그가 어느 위치에 있든 언제든지 십자가의 원수 될 가능성이 농후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