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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항해 길, 파선하지 않으려면...
오재영
- 1525
- 2021-04-01 19:39:40
처음 사흘 동안은 예상 밖의 속도로 빨리 진행되어 원래 일정보다 훨씬 앞서 갔다. 이 연구자는 무척 들떠 있었다.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다. 아침에 텐트에서 일어났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들리는 말이, 아프리카인 지원팀이 그날은 거기서 그냥 머물기로 정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지금까지 그들이 너무 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이제는 잠시 멈추고 그들의 영혼이 그들의 몸을 따라잡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오래 된 이야기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공적세계와 사적 세계가 분열될 수 있다는 점을 그것도 아주 멋진 방식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 분열이 크면 클수록 목적과 달리 그에 따르는 각종스트레스도 더 높아진다. 아프리카인들은 지혜롭게도 이것을 알았으나, 탁월한 스펙을 갖추고 탐험의 길에 나선 그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사역의 현장에서 번 아웃 (burnout)된 사람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광야를 통과한다. 그 중에서도 정상적인 사역의 길을 향하는 이들에게는 그 과정이 더욱 혹독하다. 주님께서는 이 광야의 체험을 통하여 그로 하여금 낮은 자리에서 겸손과 자비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더욱 이해하고 그들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게 하신다. 이처럼 광야의 길을 통과한사람마다 남다른 안목(眼目)으로 세상을 본다. 광야 통과 이전과 이후의 추구하는바가 전혀 다른 본질적으로 변화된 삶을 향한다.
영성을 말하는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은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찔렀다. “고난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광야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그곳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착각한다.”(⌜상처 입은 치유자⌟중에서).
내면세계에 비중을 두는 사람...
안소니 블룸(Anthony Bloom)은 자신이 영혼 차원에 눈뜨게 된 과정과 영성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한 바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어쩌다 마주치는 고양이가 아니라 바로 호랑이이다. 고로, 하나님의 세계는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계에 대한 정보만 구할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블룸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면, 여기 뭔가 본질적인 일, 곧 앞으로 그의 여생에 특징이 될 만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것은 쉽게 생겨나는 값싼 종교적 전율도 아니고 감정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은 결코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회심하는 순간,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로 향하여 그의 영혼이 열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처소로 점점 더 잡힌바 됨에 따라 회심이라는 일평생의 경험에 불씨를 당길 것이다. (고든맥도날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 P95인용).
사람마다 흔한 일 아니고, 희귀한 일이지만, 누군가 생의 어느 지점에서 살아있는 거대한 호랑이를 직접만나 생의 위기를 겪어 통과해본 사람에게는 그 이후부터 누군가 호랑이를 설명하는 이의 말과 태도를 듣노라면 그가 만났다 말하는 호랑이가 실제인지, 상상 속의 존재인지, 안방에 있는 병풍 속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에게 바른 영성(靈性)을 소유함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고, 본질이며 필수다. 오늘의 혼돈된 시대의 온갖 거짓과 참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토머스 아 켐피스는 이것을 안쪽을 향해 걷는 것이라 불렀다.
다르게 표현하여 영성이란 창조주에게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게 하고, 가는 길에 힘을 공급하시게 하며, 지쳤을 때나 다쳤을 때, 필요한 생계를 채우시게 하는 가운데, 그 분과 동행하는 여정을 말한다. 뜻이 얼른 잡히지 않는 이 용어에 대해 한 번 더 설명해 본다면, 영성이란 주변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늘의 분별과 확신과 결정으로 충만한 내면세계를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이 거하시는 이들의 삶과 영혼을 말한다.
가장 먼 여행은 내면으로의 여행이다.(하마슐드).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주님께서 부르실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진정 기다림을 아는 사람은 준비한다. 그리고 자신을 감출 줄도 안다. 이처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무서운 이유는 기다리면서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기회를 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기회가 많기는 하지만 소중한 기회, 결정적인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기다릴 줄 알고 깨어있는 사람이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바라는 것을 무엇이든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유능하다고, 학식이 많다고 위대한 성취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성취는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의 몫이다.
주님의 임재와 함께 위대한 영적으로 각성했던 부흥의 시대를 돌아보면,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마다 하나님 앞에서 아주 탁월한 경건의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힘에 넘치는 수고와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헌신 속에서 살면서도 언제나 구별된 경건의 삶을 이어갔던 것은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신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 진리는 변함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권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증언과 삶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들안에 임마누엘로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영적지도자의 참된 권위 또한 진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직접대면하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이들에게는 그분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체취와 기운이 배어 있다. 요즘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신다는 개념이 서서히 회석되고 이제는 제도에 의하여 설교자들이 양산되는 교회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기독교라면 가장 혐오해야 할 오류중의 하나다. 그러하기에 영혼을 교도할 한사람의 설교자가 세워지는 일은 모든 역사가 주목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사건이다. 그것은 제도가 그를 세웠을 수는 있으나 아직 하나님께서 그 내면을 만지고 지나가신 그런 설교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어느 랍비를 찾아갔던 한 박식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결코 나이가 어리지 않았지만,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랍비를 찾아가 본 적이 없었다. “평생 무엇을 했는가?” 라고 랍비가 물었다. “탈무드 전체를 세 번 훑었습니다.” 그 박식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러자 그 랍비는 “그래, 하지만 탈무드가 자네를 훑고 지나간 건 몇 번이나 되나?”라고 물었다. - 샬 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