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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위(약 2:14-26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361
- 2021-03-30 01:18:36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행위가 배제되는 것인가 아닌가, 행위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행위는 윤리 도덕 행위나 양심 행위나 율법 행위나 종교 행위인가, 믿음의 행위인가 하는 것은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이 야고보서 2:14-26이다.
야고보서 2:14-26은 루터로 하여금 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라고 경시하게 만든 구절이다(E. C. S. Gibson). 실상, 이 본문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난해하지만, 포티트(G. Poteat)가 야고보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다. “야고보가 공격하는 크리스트교의 왜곡된 교훈은, 믿음의 고백이 믿는 자의 행위와 관계없이 구원을 보증한다는 관념이다. 다시 말하면, 신조의 암송이 동료를 향한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 지상주의(도덕 폐기론)는 야고보 당시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괴롭혀 온 탈선이다.”
II. 본론
야고보는 이 부분을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운받은 사람들이다.
[믿음](피스틴, πίστιν)에 대해, 홍현설 박사는 “신조나 신앙 고백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적 행위에 대한 신뢰와 확고 또는 심리학적 의미의 내적 신념이 아니다.”①라고 한 다음에, “새로운 창조의 주도자이시며 세계의 화해자이시며 모든 정의의 근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즉 신의 믿음직함(信實性)에 대한 우리의 신뢰, 이것이 바로 구원의 방편이 되는 신앙이다.”②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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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홍현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서울: 기독교 대한 감리회 총리원, 1968), pp. 20-26.
2) Ibid.,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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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K. Barth)는 “신앙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근거지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삶, 사고, 의지 및 감정의 전체에 관계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거기에 매어 달리는 한 가닥의 끈이며, 그것으로서 우리가 영양을 받는 유일한 음식이다.”③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 곧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행위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엡 2:8, 마 16:17) 성령의 은사(고전 12:9)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 인격적인 응답이다. 전 인격적인 응답이란 인간의 삶, 즉 사고와 의지와 감정 및 행위의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복종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연합하며 사는 생활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는 “믿음의 결단은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재 은혜에 근거된 것이므로”(J. Wesley),④ 인간이 믿는 것은 인간의 공로일 수 없으며, 반면에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 믿음은 또한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기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방편이기도 하다(벧전 1:5).
윌리암즈(R. R. Williams)와 박윤선 님은 “크리스트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는 한 주제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함으로써, 고백뿐인 믿음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J. Calvin)은 “야고보는 여기서 거짓된 고백에 관해 말하고 있다.…그는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면’이 아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로 자기의 말을 시작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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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 Ibid., p. 31.
4) 박장균, “웨슬레의 恩寵論” in 神學과 宣敎(서울신학대학, 1972),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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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뿐인 믿음이란 사실상 참 믿음이 아니다. 그 곳에는 [행함]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위는 구분은 할 수 있어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R. A. Ward, 박윤선). 어드만(C. R. Erdman)과 와드(R. A. Ward)의 말대로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것이 행위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에 따르는 행위란 사랑이 그 원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도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하였다.
사랑의 행위가 없는 고백뿐인 믿음은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야고보는 아주 단호하게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그 믿음]은 믿음도 아니라는 강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다.
이상근 님은 “믿음이란 머리나 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으로 불신앙의 생활을 뉘우치며 자기의 혀를 자복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행위는 자연히 따라오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의 증거는 순종의 행위이다”(G. R. Berry).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그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黑崎幸吉은 이 구원을 가리켜, “세상 끝 날 심판 때에 받는 구원을 의미한다.”라고 하지만, 꼭 미래적인 의미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신약 성경에서 [구원]이란 현재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야고보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고백뿐인 믿음이 무익하고, 구원 능력이 없다는 점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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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崎幸吉은 “신앙을 머릿속에서만 이해할 뿐, 신앙이 새 생명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자는 같은 믿음의 식구인 형제자매(타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의 고난을 보고도 사랑심이 동하지 않고 동정이 앞서지 않는다. 다만 헛된 이론과 설명으로써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하나 그러한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말로만 동정하고”(W. Barclay, 박윤선, 이상근), “말로만 사랑한다”(C. R. Erdman)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동정도 사랑도 아니므로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는 “가난한 자에 대한 조롱이다”(J. Calvin).
바클레이(W. Barclay)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의는 곧 구제를 의미한다. 구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에, 그 사람의 방파제가 된다고 생각되었다.”라고 하였다. 벤 시락(Ben Sirach)은 “물은 뜨거운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서 3:30)라고 하였고, 토빗서(4:8-11)에는 “구제하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나는 구제로 인하여 당신의 낯을 보게 되리라.’라고 씌어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야고보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 행위로 의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어디까지나 믿음에 따르는 행위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원리로 하는 구제 행위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반드시 복음의 정신을 현실 속에 구체화시키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을 의식하여,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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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난해구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혹이]가 누구를 지시하는가에 열쇠가 있다. 이스톤(B. S. Easton)은 야고보가 바울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이 행함 없는 믿음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워 그 반대자(혹이)를 바울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포티트(G. Poteat)는 자신이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떤 주석가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즉, 야고보가 행함 없는 믿음을 주장한 바울의 교훈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논지는 야고보가 바울을 오해했었다는 것이다. 이스톤(B. S. Easton)은 “야고보는 후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오해한 것처럼 바울을 오해하였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실제적으로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에는 행위가 배제되어 있지 않은데, 야고보는 바울이 행함이 없는 믿음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