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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서드】주일설교(主日說敎)
함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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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4 23:25:27
함창석
說자는 뜻을 나타내는 말씀언(言 말씀)部와 음을 나타내는 글자 兌(열)로 이루어진다. 말(言)로 나타낸다는 뜻이 합하여 「말씀」을 뜻한다. 八(팔)은 분산하는 일, 兄(형)은 입의 움직임을 일컬음이다. 음을 나타내는 兌(탈ㆍ열)은 큰소리를 질러 화락함, 나중에 기뻐함에는 悅(열)이라고 쓰고, 말로 그것은 무엇, 이것은 무엇이라고 구별함을 說(설)이라고 쓴다. ‘말’과 관련된 여러 글자 중에서도 ‘이야기하다’라는 뜻이 가장 두드러져 있다. 兌자는 입을 벌려 웃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기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입을 벌린 모습을 그린 兌자에 言자가 결합한 說자는 누군가에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說자는 주로 ‘이야기하다’나 ‘서술하다’, ‘유세하다’와 같이 입을 벌려 크게 말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敎자는 教(교)의 본 자이다. 爻(효 배움)와 부수 글자 攵(=회초리)의 합자이다. 회초리로 쳐서 가르쳐 배우게 함의 뜻이다. 한자에서 爻자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하나는 ‘배우다’이다. 學(배울 학)자가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단순한 모양자로 쓰이는 경우이다. 希(바랄 희)자가 그러하다. 여기에 쓰인 爻자는 ‘배움’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 敎자는 이렇게 ‘배우다’라는 뜻을 가진 爻자에 子자와 攵자를 결합한 것으로 ‘아이가(子) 공부를(爻) 하도록 하다(攵)’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敎자는 회초리를 들어 아이를 가르친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이것을 ‘가르침’이라 했다. 그래서 글자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改(고칠 개)자와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敎자에는 爻자가 있으니 이것은 인생 속에서 공부와 관련된 글자이다.
마가복음 1장 14-15절에는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셔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며 드디어 때가 왔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설교의 기본적 내용은 회개 즉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이 미치는 시공간의 하나님 나라다.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죽은 자 중에 부활이신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가 되심이다.
설교는 교리 · 종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거나 신도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경전 등을 풀어 이야기하는 행위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강론', 불교에서는 '설법 · 설계 · 설경'이라고 한다. 설교란, 주로 프로테스탄트교회 쪽에서 쓰는 말이며 각 종교마다 용어가 다른데, 설교는 구약시대의 예언자의 전통과 회당 예배의 전통을 이어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증언한 초기교회에서는, 성찬과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예배의 요소가 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강론 · 미사가 제의 중심이어서 설교에 중점을 두지 않는 데 반하여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는 설교를 예배나 기도회, 제반행사에서 가장 중요시 한다.
설교가 예배에서 가지는 의미는 설교자의 사상을 전개하거나 도덕적인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증언한 진리를 나타냄에 있다. 설교는 신도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여 사죄의 은총을 덧입게 하여 새로운 자세로, 새 사람 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려는 데 있다. 설교에는 권위가 있어야 하며, 설교자는 모름지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만 한다. 설교 방법에는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강해설교, 어떤 제목을 중심으로 하여 설교하는 주제설교를 비롯하여, 윤리적 설교, 변증적 설교, 교리적 설교, 간증설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설명하며, 권고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의 복음을 전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응답하고 믿는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그들의 삶을 구주와 주님이신 하나님에게 맡기도록 하는 데 있다. 설교는 살아계셔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설교를 통해 사람들과 직접 만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를 재현하는 생동적 사건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목사에게 설교권을 주어 설교가 주가 되게 한다.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는 오늘의 설교를 진리를 가르치고 전한다는 뜻에서 '강도'라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해설한다는 뜻에서 '강해' 또는 '강설', '강론' 이라고도 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한다는 뜻으로 '권면'이라고도 했고, 아예 직설적으로 '말씀'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성경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설교'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설교'라는 말이 당시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식 술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부정적이기도 하다.
설교는 법회나 각종 의식행사서 원불교 교법을 대중에게 말로써 전달하고 이를 통하여 대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불교 교법을 말해주어 사람들을 불문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성서가 증언하는 복된 소식을 대중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윤리도덕을 가르쳐 훈계하는 것이다.
설교문학은 어떤 사상이나 주장 · 견해 등을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의 총칭이다. 교화문학이라고도 한다. 계몽문학과 다른 점은 계몽문학이 반드시 대중을 깨우쳐 준다는 전제를 갖는 데 대해서 설교문학에는 그런 선행조건이 꼭 필요불가결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즉 설교문학의 대상은 반드시 대중일 필요가 없고 또한 그 기능이 반드시 한 사회나 시대의 지적계발을 통해 발휘될 필요도 없다. 단순히 작자가 믿는 바를 전달 · 선전하는 것으로도 설교문학은 훌륭하게 성립되는 것이다. 한국 신문학사상에서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을 쓴 대표적 작가는 이광수였다. 그의 무정은 작자의 민족적 이념 · 신 결혼관 · 사회개조론, 신학문에 대한 신념 등을 독자에게 선전 · 주입시키고자 시도한 느낌이 있어 비판받게 된다.
가령 '무정' 마지막 부분에서 이광수는 이형식과 선형 · 영채 · 병욱 및 신우선 등 작품에 등장하는 주역들을 총동원해 삼랑진 수재현장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수마에 휩쓸려 불행에 허덕이는 동포를 위해 일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끝으로 그들이 입을 모아 가난한 동포와 '조선'을 위해 일하겠다는 맹세를 토로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광수가 그의 민족주의적 이념을 피력하기 위해 소설이란 형식을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 후 이광수는 그의 여러 작품을 통해 계속 이와 같은 자세를 고수했다. '개척자'에서 신문명과 과학기술 습득의 필요를 주장하고 있다든가 '단종애사'에서 대의명분과 충군애국의 정신을 고취하고 있는 것, '흙'에서 브나로드운동에 참가할 것과 사랑에서 순수무구한 정신적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 등은 그 좋은 예다. 이광수의 이와 같은 문학태도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 김동인이었다. 그에 의하면 이광수의 이런 측면이 곧 한국문학을 그르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