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같은 자의 것인 하나님 나라(순수, 단순, 겸손 등이 아닌데...)

최세창
  • 1641
  • 2021-04-27 18:48:29
<마가복음 10:13-16>

13사람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 시작하는 말

제가 전속 필진이었던 온맘닷컴의 유머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차를 타고 가던 남자가 물을 만났습니다. 물의 깊이를 몰라 망설이던 남자는 옆에 있던 한 자그마한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 도랑이 깊으냐?” 아이가 “아니요. 아주 얕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는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말을 믿고 그대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차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겨우 물에서 나온 남자는 아이에게 화를 냈습니다. “이놈아! 깊지 않다더니 내 차가 통째로 가라앉았잖아! 어른을 놀려?” 그러자 자그마한 어린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습니다. “어, 이상하다! 아까는 오리 가슴밖에 안 차던데…”
물을 만한 사람에게 묻지 않고,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선행은 불행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교역자와 교인 사이에 벌어지면, 복과 화,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멸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2.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

유대 아이들은 주로 회당에서 랍비에게 축복을 받았는데, 대개 랍비는 아이들을 축복할 때에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왔습니다. 손을 대거나 말씀으로 치유와 축귀의 기적을 행하고,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다고 소문난 예수님의 축복 기도를 아이들에게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헬라어 파이디아(παιδία)는 여섯 살부터 열네 살까지의 아동을 뜻하는데, 누가복음에는 갓난아기를 뜻하는 브레페(βρέφη)로 되어 있습니다. 축복받을 아이의 나이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고려할 때, 갓난아기부터 14세 아동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데려온 것으로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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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에는 평소에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던 부모들도 자녀들을 데리고 산과 들, 고궁과 관광지, 극장과 운동장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혹은, 자녀들을 백화점에 데려가서 수십만 원짜리 게임기 같은 값비싼 선물도 해 줍니다. 자녀를 뒷바라지 하느라 식당 일이나 파출부 일을 하는 주부들도 있고, 자녀에게 값비싼 교육을 시키려고 부정축재를 하는 지도층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모들이 과거 어느 때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물질 사랑을 쏟고, 헌신적으로 돌보는데도 자녀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한마디로, 자녀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자녀 사랑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가장 큰 사랑은, 자녀를 주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부모는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자녀와 주 예수님의 만남을 도모해 주는 중개 역할을 잘하는 부모입니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iln)은 켄터키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동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성경을 링컨에게 읽어 주고, 자기도 읽으면서 신앙을 심어 주었습니다. 9살 때 그 어머니가 죽으면서, “아버지와 누나의 말을 잘 듣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라고 유언했습니다. 그 후에 계모가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계모도 링컨을 신앙으로 키웠습니다. 링컨의 전기를 쓴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링컨이 위대한 인물이 될 만한 조건을, 하나님은 한 가지도 주시지 않았다. 다만 링컨에게 빈곤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를 주셨다.”
예수님의 축복을 바라서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본 제자들은, 그 부모와 아이들을 꾸짖으면서 막았습니다. 딴은 그런 제자들의 행동에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이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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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는 위대한 예언자가 아이들로 인해 하시는 일에 방해를 받거나,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복음의 교훈은 아이들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는, 고대 사회의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상당히 낮은 신분에 속했고, 개체 인격이라기보다는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취급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이들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나 어른들과 함께 오는 아이들을 막으면서, 그들 모두를 꾸짖는 제자들을 보시고는 분노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나름대로 주 예수님을 위한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주 예수님의 분노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 예수님을 위하는 선의의 행위가 주 예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거나, 주 예수님의 분노를 초래하는 것이거나,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내 뜻은 물론, 내 선의라 하더라도, 다 유보하고, 창조주요 섭리자요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잠언 3:6을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주 하나님을 인정하려면, 평소에 기도와 말씀에 착념해야 합니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심령에 충만히 채워 감으로써, 매양 생각하는 것이나 일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거든다고 하면서 주님을 분노케 해서야 되겠습니까?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뜻은 ‘우선적으로 어떻게 이성적 판단을 실천할 것인가?’에 집중되고, 주 예수님의 뜻은 ‘우선적으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성적 판단이 사람마다 다르고, 상반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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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는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에게 분노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실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강림과 복음 선포로 본격화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므로,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는 말씀은 잘못 이해되고,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격으로 아이들의 순수함, 천진함, 단순함, 겸손, 정직성, 순종 등을 내세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아이들의 성장과 변화의 가능성을 내세우신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인간의 자격 조건 내지는 자격 요소로 이해하는 모든 견해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3:10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들의 무력함, 의존성을 내세우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 또는 영생이란 인간의 노력이나 힘이나 공로 등으로 얻거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모든 것을 성취해 놓으신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8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율법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유대교의 지도자로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전파하던 교인들을 핍박하고 잔해하다가,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 깨닫고 한 단언이라는 데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라는 말씀이 그토록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잘못 알려진 이유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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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말씀을 종합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나 들어갈 자는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고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받들어 섬기거나, 받들어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들지 않는 자”의 “받들지”는 오역입니다. 원어는 ‘받아들이다’를 의미하는 덱세타이(δέξηται)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힘이나 자격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임을 자각하고,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대로 행하며 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구원을 얻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죄인과 창기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충격적인 사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양심을 따른 행위이든 윤리적 행위이든 어떤 종교적 행위이든 율법 행위이든 간에, 인간의 힘이나 노력에 의해 구원받으려는 시도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메시아 약속을 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3. 맺음말

지옥으로 끄는 죄의 사함과 말씀을 순종해 사는 성결한 삶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구원에 있어서 어린아이들처럼, 무능하고 무력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대속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양육과 지도 아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 착념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양육과 지도를 따르는 생활을 할 때에, 우리의 신앙 인격과 생활을 통해서 자녀들도 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모두가 주님의 품에 안겨서, 주님의 축복하시는 안수기도를 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설교집 28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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