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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함량미달의 監督들이 등장하는가?
오재영
- 2596
- 2021-05-07 20:06:00
성경말씀대로 세상의 빛이요, 산위에 있는 동네이며 그리스도의 弟子요 사도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우리들의 가슴을 언제나 뜨겁게 격동시키고 있는 준비된 말씀이 있는가?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權勢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族屬으로 弟子를 삼아(세상을 스승으로 삼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과 聖靈의 이름으로 洗禮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吩咐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지어다 내가 世上끝날까지 너희와 恒常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문제 많은 시대일수록 시련과 고통이 밀려오면 편안할 때는 무관심하든 이들도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할 지도자(職)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러나 오늘의 암흑 속에 빛을 찾아 헤매는 저들에게 선명한 길(道)을 제시해야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의 지적대로 “즐거움에 대한 열심이 타락한 기독교”가 되었고, 자신이 믿는 신앙의 내용을 대중화하려다가 이제는 스스로조차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가련한 우리의 모습들이다(히5:12절).
주님 앞에 냉철한 자기성찰의 고백이 필요하다.
130여년을 이어온 우리 기독교 대한 감리회...
1만여 명의 목회자와 7천여 교회와 140여만의 성도를 말하는 교단,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하며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가? 지나온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 시대마다 변화를 일으키고 향도(嚮導)의 역할을 한 종교마다 그 안에는 독특한 생명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의 공적과 주변의 칭송에 빠져 안일과 편안을 추구하며 시류와의 영합을 거절치 못하고 욕망으로 치달아 본질에서 벗어나 비(非)본질에 집착함으로 생명력을 잃을 때마다 지나온 과거의 찬란함과 쌓아온 공적과 관계없이 소명(召命)등한히 한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소멸함은 역사가 짧고 신도의 숫자가 부족한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비단 오늘의 우리기독교를 두고 하는 말만은 아니다. 그 종교가 어떠하든지 그가 추구하는 진리를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사사로운 욕정을 버릴 때 마다 열악한 환경과 소수의 사람임에도 그들은 시대의 역사를 이끌어 많은 이들을 선도(先導)했다. 지나온 역사를 보면,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든 불교가 가장 번창했던 고려말엽 산천의 경치 좋은 곳마다 사찰들 지어놓고 세도가들의 아녀자들 절간에 출입하며 세속의 권세가들과 야합할 때 당시 개성에만 온갖 중들 천지였음에도 그들 때문에 고려는 함께 망했다.
이조 5백년의 나라가 망할 때 그때에도 온갖 허세에 매여 미래에 눈을 감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편 갈라 상대의 삼족(族)을 멸하여 씨(氏)를 말리든 시대에도 한양은 물론이고 임금을 비롯한 이조 판서를 비롯해 지방의 향반(鄕班)에 이르기까지 사당들 지어놓고 온 나라가 신도로 넘쳐났으나 그들이 허물어지는 기간은 불과 10여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러한 역사를 이어 오직 은혜로 구원받아 피 흘린 선진들의 순교의 신앙과 그에 따른 긍휼(矜恤)하심으로 역사에 부름 받은 “기독교 대한감리회” 초근목피의 지난(至難)한 시대, 오로지 믿음의 조상 잘 만난 덕에 고난의 때를 벗어났건만 그 은혜 보답하는 마음으로 사명감당하지 못하고 엄위 앞을 떠나 생명력 잃어버리고 방향을 잃어 영적 패륜아처럼 표리부동함으로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있는 오늘의 우리는 과연 어찌해야 하는가?
지나온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고등종교에도 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것은 타락이며 그에 따라 예외 없이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 중 하나가 성직자의 갑작스런 증가다. 왜 갑자기 성직자가 급증하는가? 이것은 그 종교에 자기부인(自己否認)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의 本으로 살아가는 구도자(求道者)의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부터 자기부인이 정당하게 요구되고, 또 바르게 행해지고 있는 종교에 성직자가 급증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어느 종교의 성직자가 갑자기 급증한다면 이미 자기부인은 실종되었고, 성직(聖職)자체가 모든 사람이 탐내는 세속적 직업으로 타락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일부인사들의 무기력한 모습들이다. 그동안 “연회장이면 족하다” 하는 이 하나 없이 선교와 전혀 관계없는 열 명의 감독도 모자라 미주까지12분의 감독들을 세웠다. 과거보다 든든한가? 교단지에 등장하여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이들을 대하노라면 도대체 이분들이 지금 교단과 연회를 어찌 생각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지금 교단의 문제가 선거권자 연급을 낮추고, 여성의 비율을 높이고, 기초생활 보장을 하고 이중직(二重職)을 허용하면 없던 구령(救靈)의 열정이 생겨나고 거룩과 순결함이 보장되고 회복이 되는가? 주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이들은 합당치 않다 하셨는데...
오늘, 우리 감리회의 현실은 더 참담하다. 자신들의 사역은 뒤로하고 방황하는 목사들, 전국교회마다 80%이상이 미 자립의 교회들이다. 전혀 예상 못한 역병(疫病)의 와중에 앞으로도 수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그 위치에서 자신들을 돌아보아야한다. 지금 어떠한 각오로 기도하며 다짐을 하고 있는지를... 어리석은 공명심(功名心)들을 내려놓고 監督명칭은 연회장으로, 전국의 연회는 절반의 숫자로, 각 지방도 일정 수(數)의 기준으로 통폐합하여, 다시 교회존재의 목적인 선교(宣敎)의 체질로 바꾸어야 한다.
글을 마치며...
아인슈타인의 어록 중에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건 미친 짓이다.”라는 거친 표현이 있다. 로버트 맥체인(Robert M, McCheyne)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성결(聖潔)을 배우라. 당신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도 그것이 달려있다. 만일 사단이 당신을 욕심꾸러기목사나 칭찬받기 좋아하는 교역자, 쾌락을 사랑하는 자, 좋은 음식을 탐하는 일꾼으로 바꾸었다면 그는 이미 당신의 교역을 망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