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거부하고 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준엄한 하느님의 명령이다. / 박승복 목사

김경환
  • 1790
  • 2021-05-22 23:03:59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감리회 모임>에서 당당뉴스에 올려진 박승복 목사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혐오를 거부하고 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준엄한 하느님의 명령이다. / 박승복 목사

근자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들이 내가 사랑하는 위대한 감리회에서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것을 보고, 무겁게 손을 놀려 외치고자 한다.
감리회의 위대함은 한 가지 사건을 호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1931년 기독교 조선감리회는 양주삼 총리사의 인도로 여성들에게 목사안수를 하였다. 이는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더하여 놀라운 것은 선교지에 선교사로 온 미국인 여성 선교사가 조선인 양주삼 총리사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안수를 받은 것이다. 서양적 시선으로 볼 때 100년 전 ‘일제 강점기’ 한반도는 ‘미개와 야만’이 가득한 장소였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감리회는 위대하다. 오늘 우리의 감리회와 한국 교회를 미개와 야만으로 이끄는 혐오와 차별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하는 사타이며, 마귀이다.

-. 그럼 그 시작으로 부터 길을 떠나보자.

혐오(嫌惡)와 차별(差別)이 시작되는 지점은 천박하고, 유치하며, 졸렬(拙劣)하며, 살인적이다.
차별, 그 해소의 방식은 ‘품 넓은 시선’으로 유치(乳齒)를 지나면 그럭저럭은 해소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혐오는 사뭇 다르다. 혐오를 해소하는 방법은 오직하나다. 바로 ‘죽이는 것’이다. 살해하여 제거하는 것이 혐오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혐오를 조장하는 자들의 심리적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살해(殺害)’의 의도가 치(齒)떨리게 무서운 것은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자신들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와 4차 산업혁명을 목도하고, COVID-19의 팬데믹(pandemic)을 이겨내는 대명천지에 아직도 구시대적인 사고에 포박되어 현대의 흐름도 모르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정신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감리회를 망치는 것은 구슬프고 한심하다 할 것이다.

-. 쓰라린 가슴을 안고 소리 내어 외쳐본다.

1. 하느님은 누구의 하느님인가?

여러 성서 본문을 인용해 본다.
출애굽기에서 다음을 그대로 인용한다.
출 22,21 너는 異邦(이방) 나그네를 壓制(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虐待(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이었었음이니라.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레위기에서 다음을 인용한다.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他國人(타국인)을 너희 中(중)에서 낳은 者(자) 같이 여기며 自己(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客(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명기에서 인용한다.
신 10.18. 孤兒(고아)와 寡婦(과부)를 爲(위)하여 伸寃(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植物(식물)과 衣服(의복)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前(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예언서 중 스가랴와 말라기에서 인용한다.
슥 7.10. 寡婦(과부)와 孤兒(고아)와 나그네와 窮乏(궁핍)한 者(자)를 壓制(압제)하지 말며 남을 害(해)하려하여 心中(심중)에 圖謀(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말 3.5.내가 審判(심판)하러 너희에게 臨(임)할 것이라 術數(술수)하는 者(자)에게와 거짓 盟誓(맹서)하는 者(자)에게와 품 군의 삯에 對(대)하여 抑鬱(억울)케 하며 寡婦(과부)와 孤兒(고아)를 壓制(압제)하며 나그네를 抑鬱(억울)케 하며 나를 敬畏(경외)치 아니하는 者(자)들에게 速(속)히 證據(증거)하리라 萬軍(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느님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의 하느님임을 토라와 예언서에서 지속적으로 주창하고 있다. 심지어 말라기의 입을 빌어 그들을 억울하게 하는 자들은 나 여호와를 무시하는 자라며 준엄한 심판도 천명하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하느님이 아끼시고, 도우라고 명령하는 우리의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누구인가?

-. 생명이 담보되지 하지도 않는 공장에서, 생명의 값어치를 정당하게 보장 받지 못하는 노동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노동하는 노동자들이다.
-. 등골이 휘어지고, 손발이 부르트게 일하지만 제 값은 농협과 중간상에게 빼앗기는 농부들, 지주들이 가져가는 직불금에 또 한 번 가슴에 멍이 드는 농군들이다.
-. 18세가 되면 성인 이라는 이유로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 되지 못한 채, 거리로 생존경쟁의 현장으로 참담하게 내 몰리는 아직 ‘어린 성인’들이다.
-. 철지난 색깔론과 사문화 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감옥에 붙잡혀있는 양심수들과 그 가족들이다.
-. 권력자들과 그에 기생하는 언론 권력에 의해 사생활이 낮낮히 까발리고, 온 가족이 여론의 제물이 되어, 자살로 몰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른’ 성적경향성으로 인해 손가락질을 당하고, 상식적이며, 일반적인 사회 활동이 가학적인 제제를 통해 가족들과 친구들과 심지어 교회에서 배척(排斥) 당하는 ‘성적 소수자들’이다.

이들을 사회에서 교회에서 내쳐지게 하는 것은 ‘다름’에 대한 무지이며, 두려움이고, 공포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지극한 명령이다.

손 내밀지 못하는 감리회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여!!!

“무지에서 깨어나고, 두려움 없이 공포에 입 맞추라. 그래서 하느님의 지상 최고의 명령을 믿음으로 수호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살아 역사하시는 하느님이 진노하실 것이다.”

2. 오늘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문제. “소도미(Sodomy)”는 무엇인가?

소도미의 사전적 의미는 남색(男色)과 수간(獸姦)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소도미는 힘 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들에 의해 자행된 성적 도착과 타락이며 성적 착취의 끝자락에서 자행되는 가증(可憎)한 짓거리였다.
성서,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기사에서 등장하는 장면도 ‘나그네’를 내어 놓으라고 하는 권력자들의 간악함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하느님이 심판하신 내용이 그 내용이다. ‘나그네’를 함부로 하고, 핍박하려는 자들은 ‘용서 없는’ 하느님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는 장면이다.
“일찍이 존재한 가장 자유로운 정신” “권력구조에 대한 역설” “읽어버린 인간의 천재성을 회복하려는 금세기의 정신적 영위와 공명하는 20세기의 고전”이라는 찬사를 받는 사람이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이다. 소위 사디즘(sadism)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장본인이다.
그가 ‘감옥(監獄)’에서 ‘사디즘의 종착역’이라 호명되는 12m에 달하는 육필원고 작품.「소돔의 120일」은 4명의 권력자가 수십 명의 젊은 남녀들을 유린하고, 즐기는 120일의 기록이며, 도발적 고발이다. 120일 동안 공작과 공작의 동생주교, 법원장과 징세청부인이 벌인, 폭력과 광란의 성도착을 상세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시대적 역작이다.
이 작품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신과 인간 등 모든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도착(倒錯)적 행동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권력과 돈’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까지 타락하고 부패하며, 가학적이며 위선적일 수 있는지 명증하게 고발하고 있다.
지배자들의 추악한 밑바닥까지 보여 주는 점에서 권력과 돈의 어두운 심연을 밝힌 노작(勞作)으로 평가 받고 있다.
소도미는 그 행위와 단어의 출발부터 하느님이 가증하게 여기는 자들의 소행(溯行)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의 가증한 행위에서 시작된 ‘소도미’가 성적소수자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 것은 추잡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담한 최후를 맞이하였는지,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반추(反芻)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근대와 현대를 지나며 부침(浮沈)이 있기는 하였지만 “2003년 6월에 미국 연방 대법원은 로렌스 대 텍사스 사건에서 "성인 사이에 합의한 비 상업적이고 사적인 동성 간 성행위를 주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할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으므로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시하였다.” 이 판시를 통해 성인 사이에서 합의된 비 상업적인 ‘동성 간’ 성행위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도, 혐오의 대상도 되어서는 안 된다 할 것이다.
물론 현대에도 남색(男色)과 수간(獸姦)을 일삼아 자행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며, 엄연한 탈법으로 무겁게 처벌해야 하는 “동성애 범죄”이다. 이 간악한 범죄를 구축(驅逐)하는 것은 전(全)지구적 합의 사항이다.
이것으로 ‘소도미’와 ‘성적소수자’는 명증하게 구분된다. 소도미의 논리로 성소수자들의 천부 인권과 그들의 ‘사랑’을 매장하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3. ‘야생의 사고(La Pensee Sauvage)’ 오늘의 감리회를 위해 호출되는 외침.

감리회의 목회적 동일성은 신학부와 대학원에서 훈련되는 목사후보들의 신학적이며 신앙적인 공부에 있다. 감리회의 목사를 양성하는 기관인 신학교에서는 ‘성서 비평학’을 공히 배우고 있음을 안다.
필자도 그렇게 훈련되어 성서를 해석하고, 시대적으로 적용하는 훈련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현대를 살아 내는 균형 잡힌 목회자가 되었다 자부한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Claude Levi Strauss)는 “야생의 사고의 목적은 세계를 하나의 통시적, 공시적 전체(全體)로 파악하려 하려는”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원시인들이 사용하는 논리 “하나의 구체적이고, 감지적이며, 심미적인 논법”이 당대의 서구의 자기중심적이고 2차적 사고-철학적 합리적 이성적 논리적-의 오만과 편협을 질타하고 대안적 사고이며, 이 “야생적 사고”와 ‘야생적 통찰’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오롯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al)이고,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al)인 사고’를 하고, 못하고가 ‘문명(文明)과 야만(野蠻)’을 나누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훌륭한 혜안이 오늘의 감리회가 미개로 야만으로 가는 ‘슬픈 감리회’ 나아가 ‘슬픈 한국 교회’가 되지 않도록 기여하는 한 가지 지혜가 되기를 기도한다.
아직, 문자주의적인 성서 해석에 저당된 된 채, 몰(沒)시대적이며, 탈(敓)현대적인 성서해석에 머물러 있다면. 시대를 뒤로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사드적 인간’들 일 것이다.
전근대적 사고인 문자주의를 외치는 인간들은 마치 몽고의 기마병이 한반도를 유린하고, 왜놈들이 한산도에서 수장될 때, 이미 침몰한 사고(思考)를 가지고, 21세기 인공지능과 사물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적 사람’들에게 그때로 돌아가자고 선동하는 자(者)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글의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혐오를 부축키는 것은 사탄과 협착하여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 엄중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차별을 조장하는 것은 마귀와 입을 맞추어 위로는 하늘을 부정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사람됨’을 저주하는 것이다.
오늘 감리회는 이 사탄과 마귀에 저당 잡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인간들과 간단없는 ‘영적 전쟁’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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