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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방향 잃은 전형적인 목사들이다.
오재영
- 1754
- 2021-05-27 20:44:18
사역(使役), 영적리더의 위치에서 영혼을 교도하는 그 일을 앞에서 이끌며 함께한다는 것 쉬운 일 아님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대부분 추상적인 무지개꿈으로 요행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욕망이나 야망으로 이룰 수 없는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순간순간 보호받고 인도받아야할 분야로 잘못하면 아론의 두 아들(레10:1-11).처럼 생을 마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모두가 정상적인 사역자로 나가기 전, 준비 부실한 무지(無知)에서 발생한 아픔들이다. 이것은 비단 구약성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역의 현장에는 아나니아, 삽비라, 마술사 시몬을 비롯하여 데마와 같은 동역자도 헤아릴 수 없다. 모두가 사역의 방향을 잃어 번,아웃된 이들의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세상의 수많은 이들 중에 믿음의 가문에 태어난 축복으로 神學校 선지동산에 들어올 때에는 누구나 나름의 열정을 갖고 신학교에 들어가지만 지나고 보면 첫 출발의 신학이론(神學理論)의 현장에서부터 참 스승보다는 敎授라는 위치에서 본인도 정확히 모르는 검증되지 않은 궤변을 나열하며 오히려 순진한 젊은이들을 위기로 내모는 신앙 아닌 인본주의의 불순한 이념(理念)의 악성바이러스를 전파시키는 이들도 꽤 많다. 모두가 고귀한 신탁(神託)이 아닌 영혼을 망가뜨리는 생업으로 그 직(職)에 있는 이들이다.
거듭났는가?
최근에 오랜만에 존-번연의 불후의 고전인 ‘천로 역정’ 이전에 고백한‘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뒷면의 ‘수감 생활의 유익’ 에서 “오랫동안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5년간 설교해온 나는, 이 나라의 선량한 사람들이 모인 집회에서 체포되었다. ... 이후에 열린 재판에서 나는 불법 집회를 모의하고 주관한 혐의와 영국국교회 예배에 따르지 않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판사들은 서로 논의를 한 다음 내게서 소명(疏明)을 들은 뒤 국교회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죄목으로 종신형을 선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간수에게 인도되어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통해 내게 어떤 일을 해주실지 기다리면서 지금까지 꼬빡 12년을 지냈다.
. . . .아내와 가엾은 자식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뼈에서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자주 겪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역경 속에서도 베푸시는 많은 긍휼로 위로와 용기를 얻은 것도 사실이지만, 내 가련한 식구들이 겪을 고생과 비참과 궁핍, 특히 더 마음이 가는 앞 못 보는 불쌍한 자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졌다. 그 아이가 당할 고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불쌍한 아이야, 이 세상에서 네가 당해야 할 슬픔의 몫이 얼마나크냐! 너는 세상을 살면서 구타를 당하고 구걸하고 배고픔과 추위와 헐벗음과 수없이 많은 문제를 겪어야만 한단다. 그런데 이렇게 모진 바람이 불어 닥치는데도 나는 조금도 그것을 막아줄 수 없구나. 나로서는 뼈를 저미는 것처럼 아프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너와 네 앞날을 하나님께 의뢰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내 처지가 마치 아내와 자식들 위로 제 집을 무너뜨리는 자와 다를 바 없는 것 같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내가 꼭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꼭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이때 송아지들을 뒤로 한 채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른 곳으로 운반해야 했던 암소 두 마리가 생각났다(삼상6:10).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이 시험을 이길 수 있었다. 그중에서 특별히 세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다음 두 성경 말씀을 상고 했다. “네 고아(孤兒)들을 남겨두라 내가 그들을 살려 두리라 네 과부(寡婦)들은 나를 의지(依支)할 것이니라”(렘4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렘15:11).”
은혜의 길에서 오만방자(傲慢放恣)한 사람들...
신앙인들 에게는 지켜야할 상식이 있고 선(線)이 있다. 함부로 경거망동하다가는 한 순간 천길 절벽으로 구른다. 각자 있는 자리에서 소임에 전심으로 섬길 일, 공연히 남 정죄에 의(義)를 가장하여 우쭐댈 일 아니다. 앞서 걸어간 이들 거론함 부담이지만 성도 2천여명의 교회가 은퇴 후, 월 생활비2천, 선교비 명목으로 3천, 운전기사기타 5백, 총5천5백 정상인가? 대깨문 의 시각으로 한번 생각이나 해보시라, 우리는 언제나 중심에 원죄(原罪)에 자유롭지 못하기에 누구든 오늘 괜찮다고 내일도 무난하리라 보장되는 것 아니다.
이OO목사 핑계로 자기 과시하는 이들 있으나 그도 7천여교회의 하나의 교회일 뿐이며 1만 여명의 목회자중 한사람일 뿐이다. 그러한 곳에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사신 귀한영혼을 붙여주시겠는가? 정죄하는 이나 변호하는 이들이나 모두가 영적 맹인들로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가련한 모습들일뿐이다. 오히려 각자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긍휼(矜恤)히 여기는 중보의 기도가 필요할 뿐이다. 교회와 영혼을 섬기는 일, 누구나 맘먹은 대로 되는 것 아니다. 김남준목사의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그 강의와 책을 읽고 당시에 많은 신학생들이 학교를 포기하고 고민했다 하지 않는가?
글을 마치며...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였던 프린츠 리스트(Franz Liszt,1811-1886)는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친구들이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목사, 무엇하는 사람인가?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마르틴 루터, 고난을 통해서 참된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깊은 진수에 들어가게 되었고, 수많은 변증과 영적싸움에 생을 바쳤다. 그는 말년까지 불같은 시련을 당했다. 신열이 나고, 고통 속에 있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하나님! 내 어릴 적 고향 아이슬레벤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으로 데려가 거기서 생을 마쳤다. 교회史에 주님께 부름 받은 정상적인 사역자들마다 모두가 두 가지의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그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셔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아 위대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셨고, 둘째는 주님이 쓰신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고난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그날 주님의 심판자리에 서게 된다. 미리 두려워하면 그날에 책망이 덜하고 욕망대로 살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