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를 존귀케 하자 cf. 예수를 동성애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최세창
  • 1296
  • 2021-05-23 05:53:05
(설교 동영상 : 유튜브)

<사도행전 20:17-27>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1. 시작하는 말

사람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보다 나은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 모두가 후회 없이 한 해를 보내고, 또한 남은 평생을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 유념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4:15을 보면,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간에 모든 사람의 목표와 계획은 생사화복과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님을 존귀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목표와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밀레도에 간 바울 사도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급히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2. 주님을 존귀케 한 바울의 생활과 각오

바울 사도는 밀레도에서 사람을 45㎞쯤 떨어진 에베소로 보내어, 장로들을 초청해서 이별 인사를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의 행정 구역인 소아시아에 속한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에 들어온 첫 날부터 그때까지, 항상 에베소 교인들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그들도 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언제나 한결같은 자신의 복음 전파와 복음에 합당한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벵겔(J. A. Bengel)은 “자신의 생활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말을 시작할 수 있는 바울은 행복한 것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바울 사도처럼 값지고 보람되고 행복한 생활을 하려면, 바울 사도의 고백인 빌립보서 1:20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를 존귀히 되게 하기는커녕, 동성애자라고 주장하거나, 동성애자인 것처럼 교묘한 속임수를 쓰거나, 동조하는신학자와 교역자와 일반 교인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일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무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바울 사도처럼, 우리 자신의 신앙 인격과 직무 수행과 실생활에 의거해서 호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신앙 인격과 신앙생활은 무언의 설교가 되어야 하고, 교인들의 신앙 인격과 신앙생활은 무언의 전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고린도전서 11:1의 바울 사도의 권면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바람피운 것이 들통나서 곤욕을 치를 때, 워싱턴 타임스지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켄터키 주에서 7년을 복역한 윌리엄 아서 버체트라는 은행 강도가, 대통령에게 감형 탄원서를 냈습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이나 그나 통제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으로 죄를 지어 몰락하게 됐다는 점에서 한 배에 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은행을 턴 것은 바람피운 것 때문에 이혼한 아내가, 돈이 있는 줄 알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 가관인 것은 “성경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라고 하며 거듭 사면을 촉구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자신의 생활을 네 가지로 되새겨 주었습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렌스키(R. C. H. Lenski)는 “모든 겸손이란 참된 주의 종인 사람의 참된 내적 지각이다. 겸손은 언제나 바울의 성격의 특징이었고, 사람들에게 매우 다양한 면에서 드러났다.”라고 주석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풍성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갈라져 나온 교인들이 개척한 교회들에서 목회하면서 강단을 빼앗기는 등의 상상을 초월하는 환난과 고통을 겪었고, 또 다른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다른 교역자들의 얘기를 들은 제가 얻은 결론은, 교회에 하나님 아닌 하나님들이 있다는 겁니다. 주님 안에서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일해야 하는 교역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교인들과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들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남들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면 심히 언짢아하는 것입니다.
둘째, 눈물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박해와 핍박, 그리고 안타까움과 괴로움과 슬픔 등이 바울 사도의 복음 선교의 삶의 특징이었습니다. 물론, 사사롭고 사치스러운 감정의 눈물이 아닙니다. 지옥 불못을 향한 삶을 살면서도 알지 못하고, 영생의 주 예수님을 배척하며, 전도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입니다. 때로는 외롭고 힘들어서, 때로는 죽을 정도로 돌팔매질과 채찍질을 당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눈물 중 눈물은 구원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교인들 때문에 흘리는 눈물일 것입니다. 빌립보서 3:18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나 이웃을 영생의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보셨습니까?
셋째, 섬김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전파하는 것을 반대하며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해 당한 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의 간사한 꾀와 박해를 무릅쓰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또, 그 동족 유대인들에게 사사로운 원한을 품기는커녕,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려고 끈질기게 복음의 섬김을 하는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 바울 사도의 동족애가 로마서 9:3에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바울 사도는 주님을 섬겼고, 주님 섬김의 일환으로 사람들에게 그 영생의 주님을 전파하는 복음의 섬김을 했습니다.
넷째,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한결같은 선교 활동에 대해서,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세상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데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두란노 서원이나 개인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거리낌 없이 전파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로 대표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으로 끄는 죄의 사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성결한 삶과 영생 구원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전파했습니다.
우리 모두 주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겸손과 눈물, 섬김과 복음적 교훈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는 복음 선교의 삶으로 주 예수님을 존귀케 해야 합니다.
그 동안의 복음 선교의 삶에 대해 설명한 바울 사도는, 이어서 현재의 자기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시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 붙잡혀서 박해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사도가 되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성령께 붙잡혀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 안에서 성령께 붙잡혀 행동할 때가 많습니까, 세상 안에서 내 감정이나 원한이나 욕심이나 죄에 붙잡혀 행동할 때가 많습니까?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괜한 고민이나 자기 과시가 아니라, 성령께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한 교인들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불행을 당할 것이라고 계시하신 것입니다. 물론, 바울 자신도 같은 계시를 받았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복음 선교를 위한 바울 사도의 각오입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0:23 이하를 보면,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천하를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존귀한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완수를 위해 매진하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을 말하면서, 그 동안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에, 들은 모든 사람이 멸망의 심판을 받는다고 해도 자신은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3. 맺음말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는 어떤 목표와 계획이 있습니까? 바울은 여러 계획과 목표 달성을 거치면서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에 정통해진 상태에서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도가 되어 복음 선교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생사를 초월한 복음의 투사가 된 바울 사도는 죄악의 확신을 막고, 정신문화의 발전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성결한 삶의 확산과 영생 구원이라는 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비결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하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긴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 선교를 위해서 겸손과 눈물, 섬김과 복음적 교훈의 생활을 하여 주 예수님을 존귀케 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설교집 28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이전 오재영 2021-05-23 존 웨슬리 회심 283주년의 기독교대한감리회.
다음 송충섭 2021-05-23 웨슬리언주의 - 세계는 나의 교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