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차별에 대하여 2 -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아모스 조"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김경환
  • 1407
  • 2021-07-05 23:18:26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감리회 모임>에서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아모조 조"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혐오와 차별에 대하여 ②】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아모스 조

▶건강한 토론문화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창간 정신에 맞춰 감리회 안에서 갈등 요소가 되고 있는 '성소수자'(동성애자)에 대한 이슈를 자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장을 마련하기로 한다. 이동환 목사의 인천퀴어축제 축도를 계기로 감리회 안에서 뜨거운 공방이 일었지만 정작 신학적인 논쟁이나 이론의 '주고 받음'은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얕은 성경구절이나 감정으로 대립의 구조를 만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건강한 토론문화를 통해 상호 신학적 입장이나 성경해석에 대해 충분히 '주고 받음'으로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을 높이고 '이해와 존중'의 틀에서 일정부분 합일된 입장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뜻을 품고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모임>에서 네 차례에 걸쳐(주 1회) 본지에 기고문을 보내기로 했다. 이에 대한 반론을 환영하며 기다린다. 비록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글을 통한 토론'이지만, 한층 발전적인 토론문화를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될 줄로 믿는다. 특별히 <거룩성 회복을 위한 모임> 측의 적극적인 반론 제기를 기대하며 기다린다. 지난 14일 첫 번째로 게재한 변영권 목사의 글을 많은 독자들이 읽었는데 반론 제기가 없어 아쉬움이 있었다. 오늘은 두번째로 아모스 조의 글을 게재한다. 반론 제기나 토론의 글을 기대한다. 아모스 조는 고려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감신대와 한신대 대학원에서 성서비평학을 전공했다.<황기수 기자 주>


1. 나는 소위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차별을 말하며 그 근거로 성서를 드는 것에 대해서 불편하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고 내가 아는 성서는 그 어디에도 인간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특히 그 종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근거로 대는 사사기의 이야기와 로마서의 이야기를 보면 나는 그들의 공감능력과 시대상에 대한 억견에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성서에 기술된 여러 이야기와 사건은 그 글을 쓴 자가 살고 있던 시대적인 정황 그리고 읽는 자의 개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글은 저자의 가치관 그리고 그 가치관을 형성한 시대적인 의미망이 속에서 해석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누구는 이것을 ‘주석’이라 하고 누구는 ‘해석’이라고 한다. 이는 이미 성서의 본문 그 자체가 갖는 언어의 장벽 그리고 그것이 쓰인 시대에 대한 이해 없이 문자 그대로 성서를 이해하는 것이 갖는 왜곡과 윤색의 가능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성서를 해석할 때 이러한 본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은 다양한 번역의 역사이고 또한 그 번역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용례들일 것이다. 이 용례에 대한 이해 그리고 특정한 단어가 동시대에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성서 의미를 사적인 언어에 박제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우리가 성서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먼저 그 언어의 시대적인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사적인 언어로 즉 자신의 좁은 경험과 표피적인 사회적인 담론의 수준으로 해석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이와 같은 작업을 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올바른 해석이야말로 신앙의 모범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목회자들은 성서의 텍스트가 쓰인 시대적인 맥락과 그 언어의 차이에 대한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카더라 통신’에 대한 확증편향적인 사고를 확대 재생산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논의가 되고 있는 혐오와 차별 금지를 위한 차별 금지법에 대한 보수교회의 반대가 거센 것이 나에게 큰 의문과 회의를 갖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의 공생애의 삶이 이 땅에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삶을 살고 가셨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율법적 관점으로 인용하여 이 차별이 마치 신앙의 길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나는 그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 말씀의 중핵은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 아닌가?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는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새로운 계명이라는 것은 구약의 십계명을 포월하는 중핵으로서의 계명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러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사랑이 아닌 차별과 혐오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고 하다니 이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들의 논리라면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의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이라는 말은 거짓인가? 혹은 그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인데 교인들을 현혹하기 위해서 아낌없는 사랑이라고 립 서비스를 한 것인가?

2. 특히 이 혐오와 차별에 대해 극명한 이견을 보이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교회에서 늘 강조했던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의 피조차도 ‘그 죄’는 사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들의 말대로 성소수자들의 성적 취향을 죄라고 가정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성적인 죄(?)를 사하는 것도 예수의 보혈이 아닌가? 게다가 이 보혈은 값없이 즉 대가 없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유독 성소수자들의 죄(?)는 교리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원죄를 넘어서는 죄인가? 그들의 논리라면 성소수자들의 죄는 그저 자범죄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일진데 왜 유독 ‘그 죄’에만 천착하는 것인가?

물론 성소수자들의 취향은 당연히 죄가 아니다. 성서의 어디에도 그들의 취향을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단언 할 수 있는 것은 보수교회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비난을 할 때 늘 인용하는 성서 <로마서 1:26~27>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전 6:9> 이하의 텍스트가 주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정죄에 이용되는 구절이다. 인터넷의 포스팅 글들을 보면 위의 구절을 나열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 또한 적시되어 있다.

“보십시오. 얼마나 성경은 동성애를 가증스러운 것으로 저주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신약에서는 동성애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성서 텍스트는 바로 그 성서 저자가 시대의 언어로 기술했기 때문에 그 텍스트는 필히 콘텍스트(상황)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문자주의자가 아니라면 위의 텍스트는 그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를 통해 동성애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최악의 죄로 다뤄지고 있다. 그런데 당대의 시대적인 정황을 보면 그리스의 문명권에 속해 살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석하지 않거나 다른 죄와 연결해 해석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현대적인 인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그 죄의 속성과 범주를 오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관례적인 사고와 본인이 속한 집단의 통상적인 인식이다. 이를 편견 혹은 억견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편견과 억견을 통한 해석은 오히려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제기를 배제하고 왜곡된 이미지만을 확대 재생산 할 뿐인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의 언급한 내용은 그러한 죄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전제로 해야 한다.

3. <로마서 1:26~28>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2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욕정 속에 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자연스러운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꾸고 28. 남자들도 또한 그와 같이 여자와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버리고 서로 그 정욕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여 그 잘못에 대한 댓가를 스스로 받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이 비판한 대상은 바로 그들이고 비판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거슬렀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그들’은 누구이며 ‘자연스러운’ 즉 ‘순리’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현재의 언어로 이 말씀에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당대의 언어의 의미와 그 언어에 대한 시대적인 의미망에 대한 이해 없이 통념과 상식을 통해서 말씀을 해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면상 결론부터 말하면 위에서 말하는 그들은 바로 부패한 귀족들이며 순리 혹은 자연스러운 관계, 당대의 시대적인 관점에서의 순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때의 순리에서 어긋난다는 것의 의미는 남자들 간의 관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의미에서의 강제적인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있다면 그리고 문자주의적인 오류에 빠져있지 않다면 이는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자주 인용되는 말씀은 바로 <고린도전서 6:9~10> 말씀이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질이나 탐람하는 자는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성소수자들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지 못하는 죄인이라고 말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이다. 바울은 위의 죄목들을 기술할 때, 교회에서 말하듯이 그와 같이 고도의 학적인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휘를 기술할 때 일련의 규칙을 전제로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고 설교자들은 그러한 인식하에 남색을 죄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맞다. 이러한 구절에 대한 역사의 흐름에 따른 다양한 번역을 보면 그 의미는 좀 더 명확해진다. ‘탐색’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 ‘μαλακοί’와 ‘남색’이라는 의미의 단어 ‘άρσενοκοιται’는 현대어 번역에서 각각 ‘미동, 계집애처럼 유약한 자, 소년 남창 심지어 여성스러운 남자’그리고 ‘동성연애자, 남색 하는 자, 아동 성범죄자, 변태 변태동성애자, 변태성욕자, 파렴치한 습관을 가진 자’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사회적인 편견의 변화에 따른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인 이 두 단어의 진정한 의미인가? 바울처럼 학식이 있는 저자의 어휘사용은 소위 어휘의 층위에 유념해야 한다. 또한 그 어휘는 적어도 그가 쓴 성서에서는 유사한 방식의 기의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색이라는 단어의 ‘άρσενοκοιται’는 <디모데서전서 1:9~10>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때 함께 쓰인 단어를 보면 살인, 노예매매, 위증과 같은 단어 등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6:9>에 보면 함께 쓰인 죄와 관련된 단어는 경제적인 착취 혹은 강제적 행위와 관련된 죄인 것이다. 이를 통해 위의 번역어 중에 그 시대적인 정황과 연결해서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동 성범죄자, 변태동성애자, 변태성욕자’인 것이다. 즉 바울이 정죄한 것은 단순한 동성의 관계가 아니라 당대의 타락한 지배계층의 강제적인 성적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서에 대한 해석은 당대의 상황 즉 공시적인 정황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해석 즉 통시적인 개념의 변화에 내재된 의미를 전제로 해석을 해야 텍스트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4.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성소수자들의 죄에 대해서 가장 강경하게 말하는 것은 바로 동성애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심각한 죄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논의를 보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고 가정하고 성소수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죄를 회개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하는 것이 오직 동성애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6:9>을 보면 분명히 ‘음란한 자, 우상숭배자, 간음한자, 도둑질 하는 자, 욕심...술주정... 중상모략 하는 자’도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왜 교회는 유독 성소수자에게만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강변하는가? 교회 내에 만연한 성추행, 맘몬에 빠져 자본의 욕심에 허우적거리는 자들, 사랑이 아니라 증오와 차별을 외치는 자들! 이러한 자들에게는 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이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본다. 나는 여전히 성서 어디에서도 차별과 증오를 말하는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유독 성소수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협박하는 이유도 여전히 알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은 값없이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말씀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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