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감리교회의 비밀

유은식
  • 1371
  • 2021-07-04 09:35:32
7월 첫 주일은 고종의 의료와 교육(선교)윤허기념 주일입니다.

한국감리교회 시작은 1884년 7월 3일에 고종인 국왕의 선교윤허로 매클레이(Robert S. Maclay)에게 학교, 병원설립을 허락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선교윤허는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국왕의 선택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쇄국정책 시대인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로 6년간 8,000여명의 순교자를 낸 종교탄압과 1866년부터 제너럴셔먼호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등 연이은 외세침략 속에서 학교와 병원사업을 허락한 것이다.

전환점이 된 것은 일본이 강화해협을 불법으로 침략한 운양호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사과와 문호개방(개항) 그리고 수신사를 요구하였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명성황후의 역할로 개방정책을 펼쳤지만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외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수신사(단장: 김기수)를 보냈다.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돌아 온 수신사는 일본의 근대문물을 배워야한다고 했다. 이에 고종은 재차 일본에 수신사(단장 김홍집)를 보냈다. 일본의 근대적 개혁운동의 실상을 보고 온 수신사는 기독교는 주자학이나 양명학과도 같아 천주교회와는 다르며 부구강병을 위해서는 미국과 수교해야한다고 했다.

이에 고종은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펼쳤다. 중국에 영선사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다.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나 임오군란으로 부국강병의 길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인 김옥균과 이수정은 일본의 근대문물로 발전한 일본을 보았고 기독교를 접했다. 이때에 이수정은 마가복음을(1885)이 중국에서는 서상륜은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1882)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성서는 국내로 들어와 읽혔으며 세례 지원자들이 나왔다.

이어진 개화정책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이 체결되었다. 푸트(Lucius H. Foote)공사가 입국했다. 이에 고종은 미국에 조약에 대한 답례와 조선개화와 자강에 필요한 인적 물적 지원요청을 위해 보빙사절단 겸 견미사절단(단장 민영익)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기차로 뉴욕으로 이동하던 중 1883년 9월 12일 미감리회 볼티모어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를 만났다.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의약제조회사, 해군연병장,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항만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미국을 돌아보고 귀국한 보빙사절단 부단장 홍영식은 1883년 12월21일(양)에 고종을 알현하여 “기기의 제조 및 배, 차, 우편, 전보등속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급선무가 아닐 수 없고 특히 우리가 가장 중요시할 것은 교육에 관한 일인데, 만약 미국의 교육방법을 본받아 인재를 양성해서, 백방으로 대응한다면, 아마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보빙사절단을 만난 가우처목사는 미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선교착수 촉구했다.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에게 한국선교가능성을 모색하라고 했다.(1884년1월31일)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에서 감리회선교를 개척했던 매클레이는 1884년6월24일 내한하였다. 한양에서 한국 최초로 개신교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6월29일) 그리고 다음 날 고종에게 전할 서한을 김옥균에게 전했다.

고종은 매클레이가 준비해 온 의향서를 전달받았다. 이미 홍영식으로부터 인재양성에 대해 보고를 받았던 고종은 매클레이가 보내 온 서한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1884년 7월 3일에 ‘학교와 병원 그리고 전신부설사업을 해도 좋다.’고 윤허 하였다.(후에 역사학자들은 이를 ‘선교윤허’라고 함) 김옥균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매클레이는 일본에 돌아가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방한성과를 보고했다.

이에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과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를, 해외여선교부는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을 초대 한국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스크랜턴과 아펜젤러는 매클레이와 함께 1885년 3월 5일 제1회 미감리회 조선선교회(Korea Mission)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장로교회 언더우드와 함께 아펜젤러 부부가 제일 먼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입국하였다. 같은 해 스크랜턴, 메리스크랜턴 선교사가 입국하였고 병원과 학교사업을 시작하였다. 고종의 윤허에 의해 선교사들은 학교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병원으로는 시라돈(스크랜턴)병원, 보구여관(여성병원) 등을 세웠다. 이 이름을 황실에서 하사하였다.

이 자료는 고종선교윤허에 전후에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고종은 미국의 병원(의료)과 학교(교육) 사업에 대해(선교) 윤허하였고 이렇게 윤허한 사실에 대해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매클레이는 일본선교부로 돌아가 미 해외선교부에 보고하였고 이로 인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크랜턴과 메리 스크랜턴이 차례로 입국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일이 1884년 7월 3일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단순히 매클레이가 조선에 와 고종이 윤허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미래를 위한 큰 그림 속에 고종과 젊은 지식인들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지력을 가지고 선택한 것이며 최종적으로 국왕의 허락인 윤허를 내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한국감리교회가 시작되었기에 우리는 이를 기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미감리회가 시작되었고 10년 뒤 윤치호에 의해 미 남감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두 감리회가 1930년 까지 각 각 활동하다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2월 첫 주일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창립기념주일입니다.

이 두 기념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 속에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역사를 그리고 한국감리교회로서 대한민국을 세운 역사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역사를 모르기에 우리의 정체성을 모르고 또 뿌리를 모르니 앞으로 나아가기에 방향을 잃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역사를 바로 알고 또 바로 세워가길 원해 적은 마음 소개해 봅니다.

이전 차흥도 2021-07-04 Re:Re:이경남 목사님께
다음 현종서 2021-07-04 그리스도는 시저(가이사)나 종교통일이나 평화 이념 보다 더 크신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