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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감리교회의 관용정신과 차별극복의 전통 -홍승표 교수"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김경환
- 1483
- 2021-07-02 19:07:18
한국감리교회의 관용정신과 차별극복의 전통 / 홍승표 교수
정말 우리들 사이에도 저 하잘 것 없는 남과는 다른 나라는 것을 표시하려는 강력한 차별의 의지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원죄일는지 모른다.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은 세리와는 따로 기도하였다. 그리고 먼저 자기는 “다른 사람들”이나 “세리”와는 같지 않다고 기도하였다. 신앙이나 기도의 마당에 있어서 조차 우리는 남과 다른 나를 강조하려고 한다. 정녕 이 차별하려는 나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일까. (지명관, “차별하는 사회”, 「기독교사상」, 1977년 10월호, 99.)
1. 존 웨슬리의 관용정신
“세계는 나의 교구”(The World is My Parish)라고 외친 존 웨슬리의 신앙 유산은 성서, 전통, 이성, 체험의 가치를 균형 있게 조화하는 융합의 신앙 즉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축했다. 존 웨슬리는 영국국교회가 메소디스트(Methodist)운동을 광신적 이단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변증적 대응과정에서 당대 세계교회의 다양한 전통과 유산들, 즉 가톨릭과 성공회, 동방교부의 전통과 경건주의 운동 등 교파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성령 안에서의 일치의 정신을 추구했다. 존 웨슬리는 교파의 교리적, 제도적 차이보다 성서의 진리와 성령의 체험을 통한 다양한 신앙표현을 존중했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감리교 신앙의 개방성과 에큐메니즘은 그의 설교 “관용의 정신”(Catholic Spirit, 1750)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많은 견해들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한 편을 선택하도록 지시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선택해 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양심의 법을 따라 단순하고 순전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 자신이 선택한 빛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규범을 남에게 강요할 만큼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의 형제들의 양심을 주관할 권리를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판단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 웨슬리, “관용의 정신”(1750), 『웨슬리설교전집 3』, 대한기독교서회, 2020, 65-66.)
존 웨슬리는 교리적, 신앙적 입장과 선택은 각 신자들의 양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자신의 선택에 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앙과 표현이 초대교회와 사도전통에 가장 부합한다고 자부하면서도 자신의 믿음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와 규범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강하게 경계했다.
나는 내 믿음이 가장 초대교회와 사도 신앙에 적합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 믿음이 다른 사람을 위한 규범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사랑으로 연합하려는 사람에게 … (교회출석, 신앙유무, 교파적 경향, 신조, 성례방식 등)과 같은 질문들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저는 여러분이 세례나 주의 만찬 자체를 허용하는지 하지 않는지 조차 묻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제쳐놓고, 보다 좋은 시간에 이런 문제를 토의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진실한 것처럼, 당신의 마음이 나를 향하여 진실합니까?’입니다. (존 웨슬리, “관용의 정신”(1750), 『웨슬리설교전집 3』, 대한기독교서회, 2020, 67.)
웨슬리는 서로 다른 신앙의 입장들에 대해서 검열이나 논쟁을 하기 보다는 서로 충돌하는 점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토론도 모두 획일적인 의견일치나 규범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방법임을 강조했다.
‘내 손을 잡으라’는 말을 통해 나는 ‘내 의견과 하나가 되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나는 ‘내가 당신의 주장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리할 것입니다. 내가 내 주장을 가지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의 주장을 가지십시오. 당신은 내게 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내가 당신께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그러한 면에 관해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논쟁에 대해 한 마디 말도 더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주장들은 이편이든 저편이든 그대로 놓아둡시다. 그리고 단지 ‘내 손을 잡으십시오.’ (존 웨슬리, “관용의 정신”(1750), 『웨슬리설교전집 3』, 대한기독교서회, 2020, 70.)
웨슬리는 소위 “정통교리, 바른 의견(통속적으로 ‘신앙’이라고 불리는)이 종교라고 꿈꾸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이러한 모든 종교적 꿈 중에서 이것은 짚이나 나무 같은 것을 불속에 통과시켜 금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헛된 일”(존 웨슬리,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 『웨슬리설교전집 5』, 2020, 70.)이라고 비판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으로까지 성장하는 은혜로 인해 형성된 관계를 “금”이라고 표현했다.
웨슬리는 진정한 보편적 정신은 “자신의 종교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존 웨슬리, 『새로운 탄생』, 전망사, 1995, 207-208.)이라고 강조했으며, “사랑은 우리 모두를 연합하게 하며, 사랑이 식어가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로부터의 분리를 생각하게 되며, ‘사랑의 결핍’이야말로 분리(분열)의 실제적인 원인”(“분열에 대하여”, 『웨슬리설교전집 6』, 대한기독교서회, 2020, 246.)이라고 지적했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사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사랑 안에서 연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이러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서로서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존 웨슬리, 『새로운 탄생』, 전망사, 1995, 195.)
2. 한국 감리교회의 관용정신
이러한 존 웨슬리의 신앙 유산은 한국 감리교회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초기 개신교 내한선교사들은 교회 옆에 병원과 학교를 세워 당시 한국의 결핍된 의료와 교육, 근대화의 진보에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오랜 유교 문화의 인습과 문화적 배타성에 직면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선교활동은 이러한 문화와 인습의 부정적 측면을 타파하는 사회선교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기독교의 복음 선교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민평등사상을 실천했으며,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제도적 문화적 차별(신분, 성별, 직업 등)을 철폐하고 억눌려 있던 약자와 민중의 삶을 해방시키는 이데올로기로써 작동했다. 이러한 초기 감리교 선교의 비전은 초대 선교사 아펜젤러의 선교편지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드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해 주옵소서. (H. G. 아펜젤러,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 1885)
이러한 한국 감리교의 전통은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출범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남·북 감리교 합동전권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웰치(H. Welch, 1862-1969) 감독이 작성한 영문 초안을 양주삼 목사가 한글로 번역하여 상정된 기독교조선감리회 교리적선언의 내용은 한국 감리교회가 지향할 목적인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감리교, 진정한 조선적 교회” 즉 기독교의 보편성을 견지하면서도 감리교와 민족적 특수성을 존중하고 조화하려는 노력의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어 우리와 단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교리적 시험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함과 그를 따르려고 결심하는 것이다. 웨슬리 선생이 연합속회 총칙에 요구한 바와 같이 우리의 입회 조건은 신학적보다 도덕적이요 신령적이다. 누구든지 그의 품격과 행위가 참된 경건과 부합되기만 하면 개인 신자의 충분한 신앙 자유를 옳게 인정한다. (“교리적선언”,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 회의록』, 1930, 62.)
일찍이 배타적 교리의 규범성에 천착하기보다는 신앙체험과 표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신앙전통을 수립한 한국 감리회는, 그런 의미에서 분열주의와 이단시비에 휘말리며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을 겪는 어리석음을 매 위기의 시대마다 지혜롭게 극복해온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교리적 선언”의 정신은 이후로도 한국 감리교가 세계 현실 속의 다양한 차별을 극복하는 원리로 적용되고 실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송정율 목사가 1956년 「감리회보」에 연재한 감리교 교리문답의 내용이다. 감리교의 차별 없는 선행은총론과 실천신학이 엿보인다.
6. 하나님께서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 함이 무슨 뜻이뇨.
이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창조하시사 인종과 빛갈과 민족 국가의 차별이 없이 당신의 아들과 딸로 기르시고 인도하시며 지키시고 축복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류가 꼭 같이 존엄하고 신성하며 자유하고 책임을 지며 서로서로가 한 형제로서 피차 완전함을 이루도록 서로 사랑하고 돕고 협력하여야 할 것을 뜻함이니라.
7. 하나님의 사랑은 특히 택함 받은 자에게만 베푸시나뇨.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아무 차별 없이 넘치도록 베푸시나니라.
(송정율, “감리교 교리문답(1)”, 「감리회보」, 1956년 2월호, 4.)
3. 한국 감리교회의 사회선교 전통과 차별철폐운동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공교회적 목소리도 감리교회에서 처음 외쳐졌다. 1919년 미남감리회에서 “경제상 정리와 사회상 구원할 문제가 교회에게 도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개인적과 같이 사회적으로 주장”한다고 선언하며 16개조의 사회적 실천과제를 장정에 삽입한 바 있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할 때 채택한 13개 「사회신경」도 이러한 감리교 선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공감과 의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사회신경」이 주목한 당대 한국사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점은 바로 ‘차별’이었음을 천명하고 있다.
인류는 겨레와 나라의 차별이 없이 천지의 주재시며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의 같은 자녀임을 믿으며 인류는 형제주의 아래에서 이 사회를 기독주의의 이상사회로 만듦이 우리 교회의 급무로 믿어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회신경을 선언하노라.
1. 인종의 동등 권리와 동등 기회를 믿음.
2. 인종과 국적의 차별 철폐를 믿음.
3. 가정생활의 원만을 위하여 일부일처주의의 신성함을 믿으며 정조문제에 있어 남녀 간 차별이 없음을 믿으며 이혼의 불행을 알고 그 예방의 방법을 강구 실행함이 당연함을 믿음.
4. 여자의 현대 지위가 교육, 사회, 정치, 실업 각계에 있어서 향상 발달하여야 될 것을 믿음.
5. 아동의 교육받을 천부의 권리를 시인하여 교육에 힘쓰고 아동의 노동 폐지를 믿음.
6. 인권을 시인하여 공·사창 제도 기타 인신매매의 여러 가지 사회제도를 반대함이 당연함을 믿음.
7.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판매 사용을 금지함이 당연함을 믿음.
8. 노동 신성을 믿고 노동자에게 적합한 보호와 대우가 당연함을 믿음.
9. 정당한 생활유지와 품삯과 건강을 해하지 않을 정도의 노동시간을 가지게 함이 필요함을 믿음.
10. 7일중 1일은 노동을 정지하고 안식함이 필요함을 믿음.
11. 노동쟁의에 공평한 중재제도가 있음이 필요함을 믿음.
12. 빈궁을 감소케 함과 산업을 진흥케 함을 믿음.
13. 불건전한 오락과 허례 사치 등으로 금전과 시간을 낭비함은 사회에 대한 죄악임을 믿음.
위 신경의 내용은 1930년대 초 동아시아와 식민지 한국의 시대정신과 사회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오늘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정신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차별적 제도와 문화를 기독교 신앙으로 적극 개혁하고 실천해 나가겠다는 선교적 다짐이자 결단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4. 메소디스트인가 메너리스트인가
1960년 3.1운동 41주년을 맞아 「감리교생활」에 이환신 목사가 기고한 논설에서는 3.1정신에 기초한 애국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진정한 애국정신은 전체애(全體愛)의 정신이다. 적어도 그 국민 전체에 대한 사랑이다. 거기에 남녀의 구별이 있을 리 없고, 노소의 분간이 있을 수 없다. 빈부 간에 차별을 둘 수 없고, 계급 사이에 귀천을 말하게 안 된다. 그런고로 대동단결이요 자타협력이다. 이 정신을 보려는가! 삼일운동 당시를 회고하라.
기독교, 천도교, 불교, 사교, 무종교, 남녀, 노소, 유식, 무식, 부자, 가난뱅이, 서울, 시골, 아무 틈 없이 혼연일체가 되어 다만 운동에만 매진할 뿐이었다. 국민전체의 생존권을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는 죽으면 다 같이 죽고, 살면 다 같이 살자는 대동심(大同心)이 가슴에 불붙은 소이(所以)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과는 전연 어긋나는 상태였다. (이환신, “시사논설 – 애국정신과 기독교운동 : 3.1독립선언 기념일에 즈음하여”, 「감리교생활」, 1960년 3월호, 7.)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3.1독립운동을 통해 제국주의의 폭력과 차별에 짓밟히며 신음하던 지구촌 인류를 향해 거족적으로 목 놓아 외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구상은 모든 형태의 폭력과 차별이 불식되고 극복된 자유, 평등, 정의, 평화, 인도주의가 성취된 세상이었다. 그러하기에 이 운동은 특정 계층, 신분, 성별, 빈부, 세대, 종교를 초월한 무차별적 대동 한마당이 될 수 있었다. 100년 전 그리스도인들이 이 운동을 기꺼이 주도하고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3.1운동을 통한 차별 없는 세상을 성취함으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가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확신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와 인권적 기초는 이렇게 차별 없는 박애적 인류애와 인도주의를 천명한 3.1정신의 토대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환신 목사는 2년 후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에 취임했고, “다른데서 같은 것을 찾아 봅시다”라는 감독목회서신을 통해 존 웨슬리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별을 극복하는 관용정신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계승되어야함을 역설했다.
인간 내지 인간생활의 외면에만 주의를 두는 보통 관람객들과 같이 거죽에 나타난 사실로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것으로는 신앙적 태도 내지 생활이 바로 되지 못합니다. 어떤 극렬한 인종차별론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살갗이나 피가 변하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을 변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으로는 각양각이(各樣各異)한 것을 끝끝내 주장할 뿐이요, 거기에서 어떤 공통적인 생활근거나 원리를 발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무신론이요 불신앙인 것입니다. 신앙은 각각 개인의 다른 처지에서 크고 강력한 생의 원리를, 원동력을 발견하고 거기에 의하여 같이 활동하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의 태도요 생활일 것입니다. (이환신, “<감독의 말씀> -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찾아봅시다.”, 「감리교생활」, 1964년 9월 1일, 3.)
오늘 감리회의 모습은 경직된 교리주의와 근본주의적 규범성에 함몰되어 존 웨슬리로부터 이어온 관용과 다양성 속의 일치를 모색하는 에큐메니즘을 상실하고 있지는 않는가. 급격한 시대의 변화는 고정된 규범과 패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당연히 불편하고 어색한 일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신앙적 언어와 사유의 틀 안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메소디즘(Methodism, 감리교정신)은 변화하는 시대에 언제나 생동감 있게 대응하고 응답하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신앙 전통을 가졌다. 엄정하되 결코 경직되지 않는 관용적 신앙전통이 단순히 과거의 습관이나 교리주의에 함몰되어 패턴화 된다면 결국 본연의 정신을 상실하고 메너리즘(mannerism)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생동감 있게 시대와 호흡하고, 대화하며, 응답하고자 하는 메소디스트(Methodist)인가, 아니면 과거의 패턴과 습관에 안주하는 매너리스트(mannerist)인가.
“조선 교회의 꼴을 알려면 평안도의 것을 보아야 한다”고 진해(*이환신의 호)군은 말했다. 오늘의 조선 교회는 어떤 것인가? 도대체 평안도의 교회는 어떠한고? 교회는 신령한 은혜가 충만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의 선구자가 되어 모든 일에 선봉 노릇을 하여야 한다. 신령한 능력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생활을 개혁함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시무언 이용도 목사, 1929년 8월 28일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