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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환 목사와 그를 옹호(擁護)하는 이들에게...
오재영
- 2074
- 2021-06-30 17:35:52
20여 년 전,
정확히는 2004년 5월 31일. 30대 초반의 김선일 이라는 청년이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팔루자로 트럭으로 이동하다 '자마앗 알타우히드 왈지하드'(JTJ) 대원에 납치됐다. 이 단체는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주둔한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그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했으나 한미동맹에 근거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던 정부로서는 이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피랍 22일 만인 그해 6월 22일, 팔루자 인근 도로에서 참수당한 시체로 발견됐다.
그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아랍인선교를 위하여 다시 대학에 진학하여 아랍어를 전공하고 선교(宣敎)를 위한 목적으로 미 군납업체의 직원으로 전쟁 중인 이라크로 갔다. 테러단에 납치되어 피살되기 전, 자신의 구명을 외치는 그 동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상에 그대로 있다. 오늘 목사라는 신탁(神託)을 감당하는 그저 요행을 바라는 임기웅변의 사역이 아닌, 본인들이 진정 한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할 성직자로 부름 받았다는 인도자로 생각된다면 참고하기를 바란다.
“나는 살고 싶다”(I want to live) "나는 죽기 싫다”(I don’t want to die), 테러단원들의 위협 앞에서 목이 쉬도록 절규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은 비단 기독교인들뿐만이 아닌, 미래의 선교대상들인 온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같은 시점에 그 테러단에 의해 살해당한 일본인들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외국인들의 마지막 모습의 영상들도 세계의 모든 이들이 지켜보았다.
그들도 자국정부나 국민들에게 자신의 구명을 호소하긴 했지만 그 누구도 김선일 청년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들 중 선교사(宣敎師)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생업을 위하여 이라크에서 일하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모습들은 김선일 청년에 비하면 오히려 초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모두가 그의 품은 열정에 비하여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때 참여하므로 미래선교의 유능한 청년이 조기 요절(夭折)한 것이다. (이재철, 매듭짓기 참조).
오늘 우리가 목회자로 사역하는 현장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변화의 속도가 가파르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보수적 신앙보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사회와 야합하려는 얄팍하고 경박스러운 지도자들로 인하여 사역의 현장은 소리만 요란할 뿐 점차 거듭남의 증거들이 희귀하여 사역지마다 황폐화되어 가는 모습들이다. 모두가 신앙의 정도를 벗어난 임기웅변으로 회의(懷疑)가 높임을 받으며 바른 믿음조차 불신하는 세속문화에 동화된 까닭이다.
거듭남과 함께 자기부인(自己否認)을 전제로 한 사역이건만 너나없이 헌신(獻身)을 비판하고 의문(疑問)은 칭찬한다. 누구나 생활 속에 대하는 신문, 잡지, 대학 강의, 텔레비전의 대중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라디오의 토크쇼까지 모두 세속화의 흐름과 함께 거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와 가치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와중에 기독교신앙의 핵심인 구원, 사단(귀신), 재림, 심판, 부활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라면 필연적인 생명력의 본질임에도 그에 대한 목사들의 분명한 정체성조차 점차 실종되는 모습들이다.
교회(敎會)란 무엇인가?
그러면 성경적인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고,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개인적 의와 상호 사역이라는 새로운 삶을 위해 죄(罪)로부터 자유롭게 된 이들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여 이루어진 아브라함의 신실하고 참된 씨이며 하나님의 전 재산을 유업으로 받으려는 소망가운데 살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죽으심과 장차 하늘에서의 삶이 이 땅에서부터 이미 활동하고 있는 부활의 공동체이다. 또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부활, 승귀(昇貴), 심판, 회개, 천국과 지옥, 성령과 악령의 싸움 등,” 이 땅의 유일하게 교회만이 지니고 있는 말씀들이 성령님의 임재 하에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 소명자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사명이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P.364).
이제 우리 각자가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채움이 없는 성숙이 있을 수 없고, 채움은 비움으로써 가능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비움은 먼저 나의 입을 다무는 것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비움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채움이 부어지고, 그 채우심의 터 위에서 나의 생각이 교정이 되고 마음이 정화되며, 마침내 신의 성품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祈禱)자체도,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 시키려함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내가 변화되기 위함이다. 이것을 깨닫고 아는 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동환 목사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한 청년이 강둑에 앉아서 밤을 새우며 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돌멩이를 집어 재미삼아 강물에 던졌다. 하나를 던지고, 둘을 던지고, 셋을 던지고, 그렇게 밤새도록 던졌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그는 남아있던 마지막 돌멩이를 던지려고 집어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손안에 들어 있는 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황금덩어리였다. 그는 밤새도록 그 귀중한 황금을, 아니 황금 같은 시간을 전부 강 속에 던져 버린 것이다. 바른 방향을 잃어 목적(目的)잃은 이의 삶이 이와 같다. 오직 목적이 분명할 때, 다른 이들에게는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조차도 당사자에게는 황금 같은 가치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동환목사를 옹호(擁護)하는 이들에게...
최근에 이동환 목사를 대하는 교단에 속한 일부인사들의 행태는 참으로 어이상실이다.
신앙의 기본이 구별됨이라는 것은 고상한神學者아닌, 평범한 목사와 정상적인성도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함부로 교단에 속한 자가 성의를 입고 ‘퀘어축제’에 가서 축복기도 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이제는 교단의 본부 앞에 텐트까지 치고 시위하는 이 모습이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오만방자함인가? 더욱 한심한 것은 일부 사역의 연륜으로나 인생의 나이로 그를 권면하고 지도할 위치에 있는 이들이 무슨 거리의 신학자니 하는 갖은 궤변과 요설로 그를 옹호(擁護)하는 경박스러움을 보이는 이들이다. 이들이 앞으로 미약한 한 젊은이를 얼마나 오도(誤導)할지는 뻔하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의 말이다.
“목사가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건강한 자기 자신이다.” 이 말을 확대 해석하여 적용한다면 온갖 부패 만연한 세상을 향하여 유일하게 교회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그 선물은 무슨 거창한 미담(美談)거리를 양산하는 것이 아닌 교회자체의 건강함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건강해야 본래사명인 온갖 부패 만연한 세상에서 상처 입은 이들을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의 과일도 때가 되어야 익는 법이다. 정상적인 목사의 길, 그 길은 자기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선택하는 길 아니다. 본인은 대단하다 생각할지 모르나 아직 더 배우고 노력할 때다. 교회의 간판 이름만 “영광제일”이라 하여 영광제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열악한 자신의 사역현장을 닫아놓고 광화문 광장에 텐트 치고 경박스런 이들 모으면 영혼구원의 없는 능력이 오는가? 속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말씀 앞에 자신을 성찰함이 구도자의 바른 자세다. 왜, 목사의 길을 선택하여 이 길에 나섰는지 초심을 돌아보면서...
글을 마치며...
70~80년대 초, 타종교와의 대화를 거론하며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인사들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본인들은 무슨 거창한 신학을 거론하며 합리화 하였지만, 그 대상이 불교를 말함은 생각 있는 이들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대화(對話)? 어디서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는가? 십자가의 심오(深奧) 한 진리를 말하기위하여 십자가위로 끌어올려 십자가(十字架)위에서? 아니면 고난이 힘드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결과적으로 구령의 열정이 희박한 이들의 궤변과 요설의 결과는 그들이 얼마나 복음의 핵심을 훼손했는지 생각 있는 이들은 모두가 안다.
영성이 희박하니 명예에 걸신들린 이들이 별 희한한 자기자랑에 여념이 없다.
무슨 정부로부터 상(賞)을 받았다며 어느단체의 자리에 오름을 나팔을 불어댄다. 생각 있는 이들마다 이 정부를 염려하는데, 본인들은 그들로부터 받은 그 칭찬을 자랑한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움이지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稱讚)하면 화(禍)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祖上)들이 거짓 선지자(先知者)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장26절). 중심 바른 이들이라면 오늘의 이 참담한 정부로부터 상 받음을 그리 널리 알릴일인가?
함부로 경거망동(輕擧妄動)하여 진리를 거스름으로 패망한자들의 실패의 모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각자 자기성찰에 더욱 힘쓸 일이다. -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