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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회개해야 :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최세창
- 1331
- 2021-07-07 03:15:14
(누가복음 17:3-4)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1. 시작하는 말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이 있고, 죄를 짓는 사람이 있고, 죄인을 용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믿음의 형제나 불신자에게 사랑으로 타일러 주의시키는 경계를 하거나, 책망을 해야 합니다. 경계나 책망의 목적은 회개이고,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에 대해 한국어 사전에는,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잘못에 대해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 주는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으면 잘 마무리됐다고 생각들을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2.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용서를 해야 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많은 용서가, 바늘 도둑을 소 도둑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바늘을 가져왔을 때에 따끔하게 타일러 주의시키는 경계나 책망을 하면, 소 도둑이 되기는커녕 바늘도 더 이상 훔치지 않을 것입니다.
할머니가 문 있는 곳에 둔 쌀을 퍼 가는 것을 본 목사님이 속으로 ‘걱정 말고, 마음놓고 퍼 가세요.’라고 한 후에, 계속 가져갈 수 있도록 그 자리에 쌀을 놓았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감동적이니 현대판 장발장이니 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목사님에게 감사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목사님이 들킬까 봐 불안해하며 훔쳐 가는 할머니를 만나서, 용서를 비는 할머니에게 필요한 분들을 위한 쌀이니, 필요하면 가져가셔도 된다고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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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일곱이 완전수이므로,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단, 회개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용서할 조건입니다. 죄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에게 성심성의껏 배상하는 회개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라면, 무한정 죄를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할 때에나, 용서 받을 때에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죄나 잘못을 그냥 덮어주면 죄나 잘못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죄나 잘못인 줄 모르기 때문에, 남들에게 같은 죄나 잘못을 저지르게 하기도 합니다. 분별없는 용서는 죄를 조장하고 확산시키므로, 남들과 사회단체에 폐해를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그 뚜렷한 증거는, 독재자들과 공산 독재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아부하는 정객들과 관리들의 대학살과 약탈과 인권 탄압과 언론 장악, 거짓과 비리 등의 죄악의 반복입니다. 서민 세계에도 분별없는 용서의 폐해가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라는 문제는 신중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참된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서는 몇 번까지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정말 깊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용서라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화신이신 예수님도 격노하기도 하셨고, 성전의 환전상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기도 하셨고, 위선자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해서는 저주라 할 수도 있는 질책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18:21을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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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까지”라는 질문 속에는 흥미 있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율법 박사라 할 수 있는 랍비들은 세 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딴에는 예수님이 랍비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시고, 게다가 사랑이 많으시다는 점을 감안하여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용서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외국 아이의 기도문입니다.
하나님, 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면서요?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요, 항상 착하지는 않아요. 하나님, 휴가 때에 계속 비가 와서 우리 아빤 무척 기분이 나쁘셨어요. 하나님한테 우리 아빠가 안 좋은 말을 하긴 했지만요, 제가 대신 잘못을 빌 테니 용서해 주세요.
ㅡ하나님의 친구, 그렇지만 이름은 비밀이에요ㅡ
용서란 죄나 잘못을 한 사람이 죄나 잘못임을 깨닫고, 다시는 안 하게 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제거하려는 유대의 지도층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끌로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돌로 치라고 하면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온 사랑의 구주로서 자가당착에 빠지고, 당신을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복음도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용서하라고 하면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무리의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것을 보고는 기세가 등등해진 그들은 묻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일어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어른들을 시작으로, 젊은이들까지 한 사람씩 떠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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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간음죄와 돌로 쳐죽이려는 무리에 의해 망신창이가 되고, 짓망신을 당한 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 그녀에게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8:11 후반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냥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언급하여 정죄 받을 죄임을 밝히셨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핵심은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첫 조건이 아닙니다. 용서를 가능케 하는 사랑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속죄 제물이 되시는 주 예수님에게서 극명해진, 하나님의 사랑의 용서는 선행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용서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보은으로서 행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답변이 마태복음 18:22입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횟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회개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자 하나님의 성육이신 예수님이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는, 대속제물이 되시려고 오신 구주시라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이 엄청난 용서는, 온 인류가 아니라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하나님의 성육이시므로, 그의 죽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대속 죽음이라는 사실이 이해될 리도 없고, 믿어질 리도 없습니다. 그 엄청난 사랑의 용서가 이해되기도 하고, 믿어지기도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후반을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좇아 회개하고 대속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용서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마태복음 18:23 이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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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종들과 회계할 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을 데려왔습니다. 일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이고, 일 데나리온은 당시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됐습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5만 원이라고 하면 일만 달란트는 9조 원입니다.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종에게, 주인은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했습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면서 다 갚을 테니, 참아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종은, 감사와 보은의 사랑과 용서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가서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종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사소한 잘못을 한 형제를 용서하기는커녕 난폭하게 대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료 종은 엎드려서, 갚을 테니 참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동료 종의 애걸은 종이 주인에게 한 것과 같았으므로, 종은 주인의 엄청난 은혜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걸하는 종을, 빚을 갚도록 옥에 가뒀습니다.
이 어이없고 기막힌 일을 전해들은 주인은 노하여 그 종을 책망하고,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
3. 맺음말
분별없는 용서는 죄에 무디게 하고, 남들과 사회단체에 해를 끼치는 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용서는 회개를 전제해야 합니다. 용서란 죄를 반복하지 않고, 바르게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용서가 어렵지만, 일단 용서하면 정신 건강에도 좋고, 화평한 관계도 만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속의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끄는 죄의 용서를 받아 성결한 삶을 살다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은혜를 받았으므로,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꼭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대속의 은혜는, 회개하고 믿는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설교집 28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