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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거부하고 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 박승복 목사"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김경환
- 1397
- 2021-07-13 00:28:08
혐오를 거부하고 차별을 반대하는 것은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 박승복 목사
▶건강한 토론문화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창간 정신에 맞춰 감리회 안에서 갈등 요소가 되고 있는 '성소수자'(동성애자)에 대한 이슈를 자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장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동환 목사의 인천퀴어축제 축도를 계기로 감리회 안에서 뜨거운 공방이 일었지만 정작 신학적인 논쟁이나 이론의 '주고 받음'은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얕은 성경구절이나 감정으로 대립의 구조를 만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건강한 토론문화를 통해 상호 신학적 입장이나 성경해석에 대해 충분히 '주고 받음'으로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을 높이고 '이해와 존중'의 틀에서 일정부분 합일된 입장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뜻을 품고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모임>에서 네 차례에 걸쳐(주 1회) 본지에 기고문을 보내기로 했다. 이에 대한 반론을 환영하며 기다린다. 비록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글을 통한 토론'이지만, 한층 발전적인 토론문화를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될 줄로 믿는다. 특별히 <거룩성 회복을 위한 모임> 측의 적극적인 반론 제기를 기대하며 기다린다. 오늘은 세번째로 박승복 목사의 글을 게재한다. 반론 제기나 토론의 글을 기대한다. 박승복 목사는 탄광사업으로 한때 사람들이 많았으나 현재는 '불모지'가 되어 버린 동부연회 태백지방의 하사미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황기수 기자 주>
혐오(嫌惡)와 차별(差別)의 기저(基底)에 흐르는 분명한 한 가지는 편견(偏見)이다. 편견의 다른 말은 선입견(先入見)이다. 또 다른 말은 맹목(盲目)이다,
“이해(理解)는 현실이 무엇이든 혹은 무엇이었던 간에 그것을 아무런 편견(偏見)없이 감연(敢然)히 맞서 이겨내는 것이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전체주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이해한다"는 말의 무게가 이렇게 상당한 내공이 요구된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용기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즉 이해는 용감하게 두려움 없이 그것에 맞서 직시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 개신교회가 맞이하는 여러 문제 중에 성(性)에 관한 담론들-특히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을 살펴보면 비겁과 나태, 무지와 몽매가 주류적으로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갈 수 없는 ‘뇌피셜’이다. 휘발성‘만’ 강한 아류들이 판을 치는 한국개신교회의 수준은 이미 저급하며, 추(醜)하디 추(墜)한 비겁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지혜와 힘을 모아 구축(驅逐)해야 할 악(惡)이다.
“바그너는 위험한가?”
수많은 음악 평론가들이 <죽기 전에 봐야 할 오페라 100선>에서 1위에 오른 것은 최근까지도 그 혐의(嫌疑)를 온전하게 벗지 못한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 5. 22,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고 1883. 2. 13 사망함)의 4부 연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이다.
바그너에 대한 혹평과 찬사는 현대에도 상당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 사람의 음악을 대하는 방식도 현저하게 논란의 중심에 놓여 있다. 바그너를 이야기하는 혐의 중 하나는 “원(原)파시스트(Proto-facist)”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 근거라는 것이 바그너가 오페라에 민족의 운명이나 정신(ethos)을 구상하는 과제를 부여함으로 오페라의 종결(closure)의 측면을 발명했으며 이런 식으로 결국은 미학자체를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기능으로 연출했다는 주장에 따른 것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바그너는 위험한가』에서 인용 이하 동.)
알랭 바디우의 시선에서 바그너를 이해하려면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바그너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그너에 대한 “배타적, 운명론적 민족주의와 또는 정치의 미학화와 아무런 상관없는 순수예술”로서의 바그너. 이곳에서 비로소 바그너에 대한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나찌 정권에 의해 독일 민족주의 시원이 되었던 바그너. 그는 자의적으로 동의하거나 협력하지도 않은 일에 호출되어 원(原)파시스트가 되어 최근까지 “미학적, 철학적인 경우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경우”로 취급 받아 왔다.
바디우는 “열려있음과 닫혀있음 사이의 독특한 상호작용”의 “예술이 역사를-절충적 종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재적 승인을 통해서-새로운 것 안에 편입시킬 수 있을 때 오직 그때에만 예술은 하나의 민족이나 국민을 대표할 수 있다” 고 말하며 “민족예술의 관념은 배타적・운명론적 민족주의와 또는 정치의 미학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것이다.
즉 바그너의 혐의는 후대에 의해 가혹하게 평가되었다는 것. 그 기저에는 편견으로 가득한 왜곡으로 파시스트적 저주에 동참하는 무리들이 가득하였다고 슬라보에 지젝도 지적한바 있다.
“바그너가 위험하지 않은 것처럼, 성소수자들도 위험하지 않다.”
오늘 한국 개신교의 성소수자의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바그너를 대하는 모양과 모습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성수주자의 문제를 재기하는 일방의 주장들을 나열하면 극우적 지각(知覺)-이런 것이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극진한 편견으로 사물을 경직되게 바라보며, 일관된 선입견으로 맹목의 시선. 그리고 가증한 자세와 태도에서 그 위험의 도가 가중되고 있다.
객관성이라는 상식도 없이, 대화와 논의도 없이, 자신들이 지극히 높은 자가 되어 스스로 판관이 된 오늘의 스스로 정통주의, 근본주의자라고 말하는 자(者)들은 스스로를 ‘이해(理解)’하기를 바란다.
지난번 본 필자가 쓴 글을 다시 인용하자면 "소도미(sodomy)와 성적정체성에 기인한 모든 성소수자들을 각별하게 분리하여 평가하고, 이 분별된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객관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체성에서 분리된 바그너를 읽듯이 편협한 시선으로 뭉뚱그려 재단하는 우(愚)를 더 이상 진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공멸(共滅)을 자초하는 첩경이다.
리키 윌킨스는 『퀴어, 젠더, 트렌스』라는 책에서 “바이섹슈얼, 유대인, 트랜스잰더, 아시아계 미국인, 남성과 같은 단어가 당신의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냐?” 고 묻는다. 이 지점에서 일(一)방향적 재단(裁斷)과 이해를 넘어서는 우리는 다시 공감과 연대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 스스로 내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21세기적 세상이다. “모두가 자유롭지 못한 세상은 누구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에서 우리의 미래가 그려진다. covid-19 이후의 세상은 서로에게 깊은 연대의 축과 공감과 협력의 축으로 새롭게 구성되기를 요청하고 있다.
참혹한 성적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소도미’와 성적 소수자의 문제를 동일 선상에서 취급하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맹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신(神)적 지위를 양위(讓位)받은 듯 위험한 칼날을 휘두르는 일부 극우 개신교 목사와 무리들의 위험은 임계점에 도달하였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이 자들은 명증한 이성과 합리성도 없고 무지하기까지 하다. 이들의 막무가네식 까탈은 한국개신교의 불안과 위험을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극렬하게 막아서고 있다.
“타산지석의 지혜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다.”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州)에서 각 정파(政派)가 수차례에 걸친 회의 결과 확정된 정치교육 분야에서의 최소 조건인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 협약의 세 가지 주요 원칙을 차용하여 오늘 한국개신교단 안에 일어나고 있는 성소수자 논의를 본격적이며, 공개적으로 논의 할 것을 제의 해 본다.
협약은 공동체의 공멸적인 극단 상황을 피하려는 칼 포퍼(Karl Popper)적 사고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한국 개신교가 공멸을 택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시금석이 되기를 바란다. 이 협약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을 골자로 한다.
첫째, 주입 또는 교화 금지 원칙이다. 사회적 쟁점사항에 대해 학생이 잘 모르는 상태에서 교사가 무엇이 바람직한 견해인지를 알려주거나 강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 스스로 독립적인 판단을 하도록 지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둘째, 논쟁 원칙이다.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은 학교에서도 논쟁을 통해 학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주입금지 원칙을 실천하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견해, 특히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의견을 균형 있게 제시하고 또한 이에 대해 토의와 토론을 하지 않으면 슬그머니 주입과 교화로 변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정치적 행위능력 강화 원칙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스스로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정치 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를 탐색해 보고, 또한 자신들이 그런 정치 상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다양한 수단과 방안을 탐색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협약의 원칙들을 한국 개신교회가 선용하여 극단적 주의와 주장이 아닌 이성적이며, 합리적·논리적 원칙들을 도출할 때 한국 개신교회의 미래는 자연스럽게 담보 될 것이다.
“삶은 콩은 심어도 싹이 나지 않는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사고가 저당되고 훼절(毁折)된 성도(聖徒)들이 사회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상식과 시대정신에 반(反)하여 오늘과 내일을 살아 내는 성도들이 정상적인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대단히 비(非)이성적이며, 폭력적이다.
적폐(積弊)가 되어 버린 한국 개신교회가 이제 ‘제대로’ 된 정신으로 편견과 선입견을 일소하고, 차별이 없는 교회, 혐오를 거부하는 교회로 ‘회개’하고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성도로 성숙되어야 한다.
'회개'[μετάνοια (metanoia)]라는 말의 의미는 현재의 인식과 관점에서 ‘돌아서라는’ 명령이다. 단순환 반성(反省)이나 반추(反芻)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에서 하느님의 방향으로 다시,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즉 완전한 돌아섬이다. 현재의 인식과 현재 삶의 태도를 그리고 가련한 저급한 품격에서 위대한 고급의 품격으로 삶의 자세와 태도를 근원적으로 바꾸라는 지상 최대의 명령인 것이다.
편견과 선입관으로 살해를 조장하는 모든 무리들과 거룩한 영적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믿음의 결기(決起)로 막혀있는 것을 털어내고, 일어나 하느님의 길을 가려는 믿음의 결심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굳센 결정이 되기를 기도한다.
날것의 개신교회를 위한 기도와 분투는 여전히 계속 될 것이다.
2021.07.05.
박승복 하사미 교회.
#추신
건전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논의는 늘 환영이다. 그리고 이 글은 인터넷에 올라가는 글이다. 가급적, 호칭과 명칭은 모든 이들이 조금의 불편함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호칭한 것이다.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을 운운하는 졸렬함은 접어두기를 정중하게 요청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감리회적인 사람이다. 각주로 인용하는 것이 여러 모로 불편한듯하여 각주를 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