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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70회 a.마지막 재앙 b.이긴 자들의 찬양(15:1-4) cf.개개인에겐 죽음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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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6 17:55:01
여섯째 삽경인 최후 심판(14:1-20)에 대해 기록해 온 요한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앞서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가면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세 번 화가 있을 것을 큰소리로 외쳤다(8:13). 그 두 가지 화는 일곱 나팔 심판으로 끝났지만(11:19), 아직 한 가지 화는 남아 있다. 이 마지막 화는 일곱 대접의 심판으로 시작된다. 이 부분은 일곱 대접의 준비(15:1-8)와 일곱 대접을 쏟은 천사들(16:1-21)로 구성되어 있다.
가. 일곱 대접의 준비<15:1-8>
일곱 대접의 심판을 준비하는 내용은 마지막 재앙(15:1)과 이긴 자들의 찬양(15:2-4)과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15:5-8)으로 되어 있다.
a. 마지막 재앙<15:1>
요한은 새로운 환상의 계시에 대해, 【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고 하였다.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는 12:1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곱 ‘천사’(1:1의 주석을 보라.)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는,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의 심판이자 하나님의 진노가 마칠 일곱 가지 재앙을 일곱 천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곱 가지 재앙은 단순히 재앙의 종류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재앙의 강도를 나타내는 것이자(레 26:21)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의 재앙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휴스(P. E. Houghes)와 존슨(A. Johnson)은 마지막 때에 심판을 종결짓는 절정의 사건이라고 하였다.
b. 이긴 자들의 찬양<15:2-4>
요한은 또 다른 환상의 계시에 대해, 【2】[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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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 이하 4절까지는 승리한 성도들이 하늘에서 찬송을 부르는 광경인데, “13장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R. H. Charles).
[불이 섞인]에 대해 (1) 세례와 관련되는 것(고전 10:2)이라는 설(Victorinus),① (2) 유리 바다의 찬란함과 장엄함과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 눈부신 순결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설,② (3) 정복자들이 겪었던 피의 박해에 대한 언급 같다는 설(G. E. Ladd), (4)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로운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설③ 등이 있다.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이하의 내용과 성경에서 불이 심판을 상징한다는 점을 미루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4)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유리 바다 같은 것]은 4:6의 주석을 보라.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순수한 의의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짐승’(13:1의 주석을 보라.)과 ‘그의 우상’(13:14-15의 주석을 보라.)과 ‘그의 이름의 수’(13:16-18의 주석을 보라.)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는,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핍박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게 하는 것과 짐승의 수이자 표인 666을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게 하는 것을 다 이겨 내고 벗어난 순교자들(A. Johnson, G. E. Ladd, 김철손④)을 비롯한 성도들(박윤선)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은 말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라고 고백하였다.
그 믿음의 최후 승리자들이 서 있는 곳은 [유리 바다 가]이다. [유리 바다 가](ἐπὶ…)는 ‘유리 바다 위에’로도,⑤ ‘유리 바닷가’로도⑥ 번역할 수 있는데, 최종적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서 있는 장소라는 점과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이하의 내용을 보아 후자를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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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늘의 홍해라 할 수 있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을 건너서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는 것이다(G. R. Beasley-Murray, “Swete”⑦).
[하나님의 ‘거문고’(5:8의 주석을 보라.)를 가지고]는, 짐승을 이겨 내고 하나님의 존전에 선 성도들이 이기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권능을 찬양하기 위한 악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 거문고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점과 하나님의 하사품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거문고]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믿음의 최후 승리자들, 즉 하나님의 존전에 선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연주하며 부른 찬양에 대해, 요한은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종]은 1:1의 주석을 보라.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에 대해 서로 다른 종류의 노래라는 설⑧과 한 종류의 노래라는 설⑨이 있다. 전자는, 모세의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어린양의 노래는 짐승의 핍박과 적대 행위를 어린양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고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한다. 후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세의 노래를, 어린양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어린양의 노래의 예표로 보거나, 또는 모세의 노래나 어린양의 노래를 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최후 심판 때의 완전한 구원에 관한 환상의 계시라는 점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역사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후자를 취해야 한다.
어린양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 역사의 예표인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영도 아래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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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건너가게 하시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홍해에 수장되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한 것이다(출 15:1-21. 참조: 신 32장). “이 모세의 노래는 (1)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함(출 15:2, 3, 6)과 (2) 하나님의 왕권을 찬송함(출 15:18)과 (3) 하나님의 거룩을 찬송함(출 15:11)이다”(박윤선).
모세의 노래로 예표된 어린양의 노래의 주제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이다.
[‘주(퀴리에, κύριε)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는 1:8의 주석을 보라.
[전능하신 이]란 어떤 피조물의 능력이나 모든 피조물의 능력을 합친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대능(大能)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참조: 시 139:14)는 어린양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예표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셨고, 이제는 예표한 대로 어린양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를 구원하시니 실로 엄청나고 놀랍다는 뜻이다(15:1의 주석을 보라).
[만국의 왕이시여]는 온 우주의 영원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렘 10:7, 10, 딤전 1:7⑩).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16:7, 19:2, 신 32:4, 41, 시 145:17)에 대해, 박윤선 님은 “‘주의 길’은 행사를 의미하고, ‘의롭다 함’은 주님의 심판하시는 공의, 곧 죄를 벌하시지 아니치 못하시는 성품을 가리키고, ‘참되시다’ 함은 그가 약속하신 말씀대로, 일일이 다 이행하신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요한은 【4】[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대능의 구원자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마땅한 반응에 대해 노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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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누가 주의 ‘이름’(2:3의 주석을 보라.)을 ‘두려워하지’(포베테, φοβηθῇ: 14:7의 주석을 보라.)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는, 어느 누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느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참조: 렘 10:7, 시 86:9).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이유인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의 [거룩하시니이다]는 호시오스(ὅσιος)로서 {“대체로 하나님께 대해서 헌신적인 것”(J. E. Frame), “종교적 경건”(R. L. Thomas, p. 231), “종교의 의무를 준수하는 것”(A. Barnes) 등을 의미한다}(살전 2:10의 주석). 이 낱말은 이곳 외에 사도행전 2:27, 데살로니가전서 2:10, 디모데전서 2:8, 디도서 1:8, 요한계시록 16:5 등에도 나온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심판이 흠이 없고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유인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는 시편 98:2의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를 연상하게 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이유인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는 시편 86:9의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를 연상하게 한다(참조: 사 66:23).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주권에 대한 만민의 궁극적 순종을 가리킨다”(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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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in 김철손, 요한계시록.
2) P. E. Houghes, R. H. Mounce, A. Johnson, P. E. Houghes.
3) H. Alford, A. Barnes, W. Barclay, J. Wesley, C. L. Morris, R. Brooks, W. Hendriksen, “Swete”(in 강병도 편), G. E. Ladd,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4) 김철손, 요한계시록.
5) J. Wesley, J. A. Bengel, “Swete”(in 黑崎幸吉), 黑崎幸吉, AV.
6) H. Alford, A. Plummer, “Vincent”(in 이상근), H. Kraft, 이상근, RSV, NIV.
7) in 강병도 편.
8) G. E. Ladd, J. F. Walvoord, “Bousset”(in 이상근), A. C. Gaebelein.
9) J. Wesley, H. Alford, R. H. Charles, A. Plummer, “Vincent”(in 이상근), R. C. H. Lenski, W. Hendriksen, C. L. Morris, P. E. Houghes, G. R. Beasley-Murray, R. H. Mounce, 黑崎幸吉, 이상근, 김철손, 요한계시록.
10) 필자의 디모데전서 1:7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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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328-333.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다수의 논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