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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서드】욕설금지(辱說禁止)
함창석
- 1308
- 2021-07-15 17:28:21
성경: 마태복음 5장 21-24절
설교: 욕설
욕은 남을 저주하고 명예를 더럽히는 말(reviling)이다. 남을 조롱하고 수치를 주며 낙심시키고자 하는 모욕이나 비난과 책망이다. 성경은 욕을 욕으로 갚지 말며, 주의 이름으로 욕을 먹으면 복되다고 가르친다. 개역개정판에서는 ‘모욕’, ‘능욕’, ‘수치’로도 번역하였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말로 온갖 악담을 할 때에 너희는 행복하다. 하늘에서 큰 상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전의 예언자들도 이런 핍박을 받았다.(마 5:10-12)
욕은 크게 보아서 대가리(머리)·주둥이(입) 등의 비속어 및 남녀의 성기며 성행위를 지칭하는 따위, 또는 개와 같은 짐승을 가리키는 따위, 쌍스런 표현이나 ‘뒤져라’, ‘꺼꾸러져라’ 따위 사나운 표현으로 남을 흠집을 내고 욕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같은 욕이라도 애칭으로 쓰이거나 농으로 쓰이는 것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욕에는 공격성이나 가학성을 앞세운 비사교적인 부류가 있는 반면, 역으로 사교성에 이바지하는 부류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욕의 언어적 기능의 다양성은 사용하는 현장 내지 맥락의 다양성과 대응하고 있다. 독백이 그 맥락인가 하면 대화가 맥락일 수도 있다. 허물없는 농판(농지거리 판)에서 흥을 돋우는가 하면, 준엄하게 벌 내리는 꾸중 판에서 서릿 기운을 돋울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아수라장 같은 싸움판에서 독을 뿜는가 하면, 장거리의 흥정판에서 저울대 구실을 할 수도 있다.
이 같은 맥락 속에서 욕은 흔히 욕쟁이라고 일컬어지는 화자의 마음의 앙금이나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 화며 분을 삭이면서 억제된 공격충동을 대상해서 충족시키는 구실을 다한다. 흔히 “속 시원하게 (욕)한판 했다.”고 할 때 바로 이 같은 욕의 대상기능이 지적된다. 심지어 마음에 상처받은 자의 자기치유 행위라는 면도 욕의 기능에 함축될 만한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욕이 피해의식과 직결되고 상처받은 자의 심성과 연관된 언어활동임에 대해 시사를 하는 것이다. 이 점이 강조된다면 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가하는 역공의 언어라는 면목이 잡혀질 것이다. 그 가해가 부당하고 부정하고 왜곡된 것일 때 욕의 역공성은 더한층 증폭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다시금 부분적으로나마, 욕이 윤리감이나 정의로움을 소극적으로나 우원하게 표출하는 언어활동임을 포착하게 된다. “억울해서, 화가 나서, 분이 치밀어서 욕을 한다.”는 표현은 실제로 많이 쓰이고 있다. 가령, 김삿갓이 수다한 욕시와 탈춤 판의 말뚝이며 취바리의 욕설을 보기로 든다면 이 점은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상처받고 시달린 대표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상습적인 욕쟁이의 입에 붙은 욕을 통틀어서 피해의식의 발산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욕은 정반대로 부당하거나 도가 지나친 언어적 가학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에 “뒤져라.”느니 “망해버려라.”느니 또는 “염병을 앓아라.”느니 하는 사설이 껴드는 것은 욕의 가학성을 극대화하게 된다. 굳이 피해나 상처의 대상 내지 보상이라기보다 당연히 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남녀의 성·성기 그리고 성행위에 달라붙게 되다. 이것은 욕이 쌍소리를 겸할 때 리비도(libido : 프로이트가 규정한, 모든 행위의 숨은 동기를 이루는 근원적인 잠재의식하의 욕망. 곧 성욕 및 경쟁에너지의 본체)의 무게만큼 폭발하고 리비도의 깊이만큼 솟구치는 것이라는 명제를 이끌어내게 유도한다. 쌍욕은 억압된 리비도의 반작용인 셈이다.
그래서 다윗은 들에 가서 숨었다. 초하룻날 축제가 시작되었을 때 왕은 평소 때와 같이 벽을 등지고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으며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다. 그러나 다윗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날 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다윗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그가 의식상 부정하게 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여전히 다윗의 자리가 비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어째서 다윗이 어제와 오늘 식사하러 오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그때 요나단이 대답하였다. "다윗이 나에게 베들레헴으로 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기 가족이 모여서 제사 드릴 일이 있다고 그 곳으로 오라는 형의 명령을 받았다기에 내가 보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왕의 식탁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 네가 네 자신의 수치와 네 어미의 수치도 모르고 천한 이새의 아들 쪽을 택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녀석이 살아 있는 한 너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가서 그를 끌어오너라.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삼상 20:24-31)
모세의 법에는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면 누구든지 재판을 받게 된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고, 자기 형제를 어리석다고 욕하는 사람은 법정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이 미련한 놈아!" 하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 5: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