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보다도 더 우매(愚昧)한 이들이다.

오재영
  • 1384
  • 2021-07-14 22:12:42
미국 연방정부의 고위 관료이자 주(駐)서독 대사였던 아더 번즈(Arthur Burns)는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중간 정도의 키와 은빛 곱슬머리 그리고 파이프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아이젠하워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이르는 수많은 대통령의 경제자문관으로 활약했다. 그의 의견은 무게 있게 다루어졌고 워싱턴정가(政街)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더 번즈는 유대인이었는데, 1970년대에 백악관의 비공식적인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을 때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사실상 그 모임에서 모두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으며, 매주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마무리 기도를 했는데 번즈는 거기에서 줄곧 면제되었다. 존중과 조심스러움이 섞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번즈의 예외적인 조치를 모르는 새로운 참석자가 모임을 인도하게 되었다. 모임이 끝날 때가 되자 그는 아더 번즈에게 마무리 기도를 부탁했다.

몇몇 참석자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의아해했다. 그런데 번즈는 손을 내밀더니 둥그렇게 둘러선 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아더 번즈의 기도는 워싱턴에서 전설적인 일화(逸話)가 되었다.

그는 신선하고 단도직입적인 기도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기독교’를 향해 중요한 일침-정기적으로 반복할 필요가 있는-을 가했다. 이것은 소명의 진리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부각시켜 준다. 말씀의 진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이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생애 동안을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 도’를 따르는 자로서 길(道)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오스 기니스 소명, P173인용).

구도 길(道)에서 필수인 지도와 방향 잃은 사람들.

여러해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교단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모습들은 성별(聖別)을 전제로 하는 구도자집단이라면 거론조차 부끄러운 모습들이다. 거론되는 이들마다 지난날 본인들이 뱉은 말들이 허언(虛言)이 될 뿐만이 아니라 점점 더 늪에 빠져드는 모습들이다. 이들 중에는 지난날 미래의 영적 지도자들을 양육해야할 神學校에서 명색이 교수라는 직으로 록(祿)을 받아 살아온 이들을 비롯하여 현재도 神學校에서 그 직(職)을 유지하는 이들과 각 교회에서 순진한 성도들을 현혹하여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뿌려대는 가라지의 씨앗이 현장의 심령들의 황폐함을 어찌 감당하려고 이리추태들을 부리고 있는가? 너나없이 모두가 주님의 엄위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행하는 궤변과 요설은 자신의 죄업(罪業)만 쌓아갈 뿐이다. 오늘 우리교단이 처한 심각한 문제는 이처럼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들의 경박스러운 행태를 “이것 역시 결국 지나갈 것이다”라고 간과할 수 없다는데 있다. 지나온 시대마다 세속의 타락된 문화가 교회를 뒤흔들 때마다 당사자들은 비참한 소멸을 당함으로 종말을 고했으나 이후로 순수한 복음을 따르는 이들이 감당해야했던 아픔들은 오랫동안 그 흔적을 남겼다.

노쇠한 노병(老兵)의 자연적인소멸과 달리 본질에서 일탈한 신앙의 낡은 표현 방식과 낡은 종교 기관들이라 해서 쉽게 사라지지를 않는다. 오히려 수단방법가리지 않는 집요함으로 그 부끄러운 생명을 연장해간다. 이미 본래의 목적을 망치고 왜곡하며, 심지어 그 목적과 모순되는 산물로 자신이 속한 집단과 그 땅을 가득 채우면서도… 지난 2천여 년에 걸쳐,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한 가지 걸림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떠나 생명력을 잃어버린 명목상의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의 추악한 모습들이다.

소명자가 의식해야 할 유일한 청중(聽衆).

언제나 거대한 세속의 물결 속에서 하향곡선을 그으며 기존의 모든 것들이 미끄러지고 허물어지는 와중에서 그를 보호해주고 지탱해주는 것은 각자 자신이 소유한 분명한 소명이다. 추상적인 이론이나 막연한 개념이 아닌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려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에만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다. 환언하면, 그리스도로부터 부름 받은(‘calling’또는 ‘vocation’)후에 지난날 자신이 따르고 귀중히 생각하던 흠모의 대상들을 내려놓고 그분만을 따라 걸으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 때 비로소 진정한 제자가 된다.

주님께서도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에게 지적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이처럼 그리스도와 모순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그는 그분의 소명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다. 이 땅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목표’, ‘야망’, ‘성취’, ‘평가’등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그 와중에서 사람들은 자신 앞에 계신 유일하신 한분의‘청중’을 쉽게 간과한다. 누구나 남들 앞에서나 수많은 군중 앞에서 뽐내는 것, 다른 사람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것들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북소리에만 맞추어 행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까닭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의 능력과 관계없이 수많은 청중들의 찬사를 생각하면서 일하는 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자신이 얼마만의 청중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가 어떠한 청중을 의식하고 그 자리에 서느냐 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그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유일하신 한분의 청중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식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하)말씀하셨다. 그 음성 뒤에는 하나님의 눈이 있고 그 눈 뒤에는 얼굴이 있으며 얼굴 뒤에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관계없이 ‘코람 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미래에 만나 뵐 오직 최후의 한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다. 기독교사에 한 획을 그은 청교도신앙인들도 이 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유일한 청중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인간을 섬기고, 인간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긴다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소명가운데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저 청교도식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닌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사는 삶 이었고, 그러한 삶은 그들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감당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평안을 유지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 기울이면서 산 인생은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내고 단 한분의 청중 - 유일한 청중 -앞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세계적인 명작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28세에 진보적 단체에 가입한 죄명으로 사형직전에 죽음을 면하고 수용소의 유배생활에서 말씀으로 자신을 채웠다.

그가 고백한 말,
“만약 누군가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성경이 거짓임을 내게 증명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사람의 말보다 그가 거짓말이라고 단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尊貴에 處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滅亡하는 짐승 같도다.(시49편 50절)”
사람이라 하여 누구나 겪는일 아니나 깊은 산중에서 거대한 대호(大虎)를 만나 생의위기를 겪어본 경험자에게는 그 이후로 누군가가 호랑이에 대하여 하는말을 듣노라면, 저이가 지금 실제로 호랑이를 만나고 하는 말인지, 누구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인지, 아니면 병풍 속 그림이거나 꾸며낸 이야기인지를 느끼게 된다.
-언제나 주님의 엄위(嚴威)앞에 더욱 자신을 성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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