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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회장 ‧ 감독들은 직(職)을 걸고 나서시라.
오재영
- 1956
- 2021-07-22 18:30:22
오늘 우리 교단이 처한 현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이 지난날의 사스와 메르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곧 끝이 이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다르게 여전히 우리들을 향하여 안팎으로 밀려오는 온갖 상서롭지 못한 예감(豫感)들이 이제는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상상조차 못했던 일상들로 매일매일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하나같이 ‘코로나19’로 인한 그동안 상상조차 못했던 일들이다.
문제 많은 시대일수록 시련과 고통이 닥쳐오면 너나없이 일상에 매여 미래를 생각지 못했던 이들도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할 지도자(職)에 대한 기대가 크다. 모두가 시대의 흐름을 보고, 미리미리 준비한 이들에게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회요, 준비 없이 겉만 치장하든 이들에게는 부끄러움당하는 길이다. 성경말씀대로 환경이 편안하든지 어렵든지 관계없이 세상의 빛이요, 산위에 있는 동네이며 그리스도의 弟子요 사도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우리들에게 두려움을 넘어 공포감에 짓눌려 있는 이 땅 선교의 대상들인 저들에게 선명한 길(道)을 제시해야할 신탁(神託)의 말씀과 그에 따르는 각오들은 준비되어있는가?
지난번의 글에도 인용했으나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의 지적대로 그동안 우리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미리 준비할 예언자(豫言者)다운 미래를 예측하는 총명함을 잃어버리고, “즐거움에 대한 열심이 타락한 기독교”가 되었고, 자신이 믿는 신앙의 내용을 대중화하려다가 이제는 스스로조차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가련한 우리의 모습들이다(히5:12절).
감독회장과 감독들, 장정개정 위원장과위원들.
2년마다 입법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의 근간이 되는 장정의 보완은 미래를 위하여 거금(巨金)의 비용과 시간을 들이고 있다. 금년에는 특히 연초부터 신임 감독회장을 중심으로 11개의 연회를 통폐합하기 위한 공청회(公聽會)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정리된 결과들을 보노라면 진정 이분들이 자신들의 교단을 위하여 각자 희생을 각오하고 헌신할 소양들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연회를 통폐합하고 감독의 임기를 차 차기로? 한다는 말은 도대체가 무슨 말인가? 우선 본인들의 임기와 다음의 임기를 보장한다는 이 내용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감독회장의 4년 임기와 감독(監督)명칭의 집착은 교단의 대 재앙(災殃)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최근의 과정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감독회장과 감독들이 1백 50여만의 영적 求道者들을 이끌고 나갈 영성과 품격을 갖추었다고 생각들을 하는가? 지난 감독회장 선거에 등장한 이들의 선택되지 못한 이후의 행적(行蹟)들을 보라. 그 후에 어떠한 모습들인지, 이들이 4년을 이끌어 간다? 자기 주변에 능력과 상관없이 논공행상(論功行賞), 전리품(戰利品)나누듯 신세진 이들을 등용하여 중직(重職)에 임명하고? 지금 교단을 향하여 소송중인 이들이 대부분 이들 아닌가? 그 영적안목(靈的眼目)으로 천거하여 등용했기에 천거한 본인과 등용된 이들 모두가 교단에 부담을 주고 불행에 빠져 헤매고 있다. 그 罪용서 받겠는가?
주변을 보라.
지금, 같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장로교의 통합측과 합동측은 교세가 우리보다 훨씬 많음에도 총회장 1명의 임기가 1년이다. 그 때문에 무슨 문제가 되는가? 언젠가 대한성서공회 사장의 직임을 맡은 분과 대화 중에 장로교단의 1년 직 총회장 은 20여명도 안되는데, 감리교회는 감독들이 수두룩하다고... 이제는 2년마다 12명의 감독들이 등장하여 어디가나 감독들 천지다. 이제 연회가 통폐합되면 연회장으로 명칭(名稱)을 바꾸어 섬기고, 임기마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지난 날 그 많은 감독들 중에 교단을 힘들게 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함부로 패거리지어 중직을 맡기므로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목소리높이며 온갖 패악질과 더불어 뚜쟁이 같은 행동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므로 교단의 위상을 허물었다. 한마디로 섬김과 상대를 배려하는 자기희생의 마음은 없이 오로지 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표를 구걸한 까닭에 피차 존경하고 존경받아야할 이들에게 치기만만(稚氣滿滿)하게 보인 탓이다. 성직에 고위직(高位職)과 하위직(下位職)의 구별이 있는가?
지금 우리가 각자 자신을 돌아보아야할 목적과 방향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합리성, 정상, 온전한 정신상태의 기준을 정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다. 다만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신 예수님이지 그 어떤 교수도, 학자도, 여론도 아니다. 오직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 외에는 모두가 자신의 미래의 삶만 허송세월하는 비참 할 뿐이다.
글을 마치며...
20대에 고향에 있는 금광(金鑛), 지하1천 미터의 지하갱도에서 착암기의 조수로 광맥(鑛脈)을 따라 굴진작업막장에서 수년간 다이너마이트를 취급한 적이 있다. 지하의 엄청난 잡석(雜石)에 비해, 광맥과 광석은 소량이다. 그러나 광부들은 그 소량의 광석을 캐내기 위하여 거대한 다량의 잡석을 지상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자신의 땀과 때로는 목숨까지 걸고 작업을 한다.
최근에 읽은 에드먼드 버크의 “어떤 한 가지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라는 말이 경고로 들렸다. 조지 맥도날드도 ⌜몽상가들⌟에서 동일한 경고를 했다. “영웅(英雄)이 되려는 사람은 거의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명인(無名人)일지라도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인간다움을 지니게 된다.”
그는 또 “그림자들”이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사물을 보는 참된 시각의 특징은 “잘못된 시각이 보통 그렇듯이 평범한 것을 그저 평범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으로 하여금 그 속에 있는 놀라운 것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비상한 시기에는 그 직분에 걸 맞는 고뇌하는 구도자다운 모습들이 요구된다.
성경이 말씀하고 이론으로는 모두가 공감하고 아는 내용임에도, 행하는 모습들은 너무 실망스럽고 안일하다.
- 보고 듣는 이들에게 울림이 있는 모습들을 기대하며 기도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