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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적 I.M.F.위기를 극복하려면...
오재영
- 1517
- 2021-07-28 05:53:54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이들에게는 1997년 말의 국가적 재난, I.M.F 사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아픔이다.
모두가 군사독재의 굴레를 벗어났다며 패거리지어 날밤 지새우며, 네 편 내편 갈라 온갖 야합과 다음 대권을 누가 잡느냐에 몰두하면서 입으로는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정부의 무능과 부화뇌동한 선동자들, 그들의 장밋빛 그림에 현혹된 민중들, 모두가 한패거리로 이미 1년 전 부터 동남아로부터의 위기를 말하는 소문에는 애써 외면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뤘다.
미처 준비 못한 안일함속에 그 소문이 사실이 되어 쓰나미로 밀려왔을 때 안팎으로 허세와 객기부리든 정부와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을 하고,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이 거리를 배회했다. 각자 생존을 위하여 지난 날 열사의 땅 사우디로 향했던 70년대의 아픔을 안고 또다시 머나먼 이국땅으로 흩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분수를 알아 미리미리 대비한 일부기업들은 소생과 더불어 오히려 위기와 함께 더욱 번창을 하고 가장을 떠나보내고 직장을 잃어버린 이들은 다시금 성전(聖殿)에 모여 눈물로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오늘, 우리가 처한 모습들이 24년 전의 그때와 다른 점이 있는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은 시대가 어떠하든지 우연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떠한 거창한 주장을 하여도 주님의 뜻에 어긋나면 모두가 사상누각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시대를 분별하는 정상적인 신앙인들마다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그분으로부터 부름 받은 분명한 두려움의 증거들이 있다. 소명(召命)이다. 이처럼 소명을 따름은 곧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면서 언제나“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헬라어로는 ‘모형’과 ‘역할 모델’이란 뜻이다-인 예수를 바라보는”것이다(히12:2).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
최근에 이 땅에서 역병의 와중에 일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좌, 우를 불문하고 횡행하는 선동과 증오, 막말의 거친 표현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구도자들의 행태에서 일탈된 광야를 방황하는 이들의 가련한 모습들이 아닌가? 말씀에 전념해야할 목사와 장로들이, 자칭 신학교교수들까지 합세하여 거룩과 성별의 구별을 무시한 채 자신의 벌거벗은 부끄러운 현재모습도 모르고(그러나 본인들 외에는 모두가 안다) 위치를 벗어나 목소리 높이는 허세와 객기에 전념하는 가련한 이들에게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인 “영혼 구령의 역사”가 일어날까?
아모스 선지자의 “主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饑饉을 땅에 보내리니 糧食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渴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飢渴이라”(아모스8:11절). 지금도 주님의 엄위를 모르고 함부로 경거망동의 대열에 있는 이들과 관계된 우리의 앞날이 심히 염려된다.
진정, 거듭남의 체험이 있는가?
크리스천 된 우리들에게 익숙한 오스왈드 챔버스, 당신은 편의 위주의 시대에 맞는 달콤한 복음에만 익숙해있는가? 혹은 하나님의 단호한 소환에 훈련이 되어 있는가? 챔버스는 그의 주님에게 버금갈 정도로 단호하게 쓰고 있다. “만약 우리가 상투적인 종교의 발에서 상투적인 종교의 신발을 벗고, 하나님께 다가갈 때의 합당치 않은 익숙함을 모두 떨쳐내는 경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앞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있는지 의심해 볼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볍게 대하고 그분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라면 실상은 그들은 그분을 단 한 번도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과제 중에서 선교의 대상들인 시대를 향하여 신앙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없다. 이것은 몇몇 무신론자들이 “신은 죽었다”고 외치고 엉뚱한 교리를 빙자하여 교회의 권위를 허물고 있는 "표리부동한 이들" 때문만은 아니다. 명색이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우리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문화 전체가 현대 세계의 선물에 너무나 의존한 나머지 실제로는 생활 양태가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필요 없게’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에대한 처방을 본질이 아닌, 자신은 배제한 채 강력한 기관이나 더욱 권위적인 리더십, 더욱 철저한 정통주의, 더욱 공격적인 정치운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결국에는 또다시 실망으로 끝이나고 말 것이다.
주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사람들...
오늘 우리 사회와 같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세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개개인이 실제로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함으로써 소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신앙의 권위를 회복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마르틴 루터는 이 점에서 본(本)을 보여 주었고, 주님께서 동행하셨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열린 첫 청문회에서 그가 카를 5세 앞에 섰을 때, 수많은 시선들의 눈에 띄도록 긴장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루터는 그답지 않게 망설이더니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기대와 달리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순간 그의 적대자들은, 광부의 아들에 불과한 이 평범한 수사(修士)가 오스트리아와 부르고뉴, 베네룩스, 스페인과 나폴리의 군주요, 함스부르크의 왕가(王家)의 아들이요, 대대로 내려오는 가톨릭 통치권의 상속자인 총명한 젊은 왕 앞에서 필경 겁을 먹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훗날 롤랜드 베인턴(Ro-land Bainton)이 루터의 전기 ⌜마틴 루터의 생애⌟(생명의 말씀사역간)에서 썼고 당시 그의 친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루터가 긴장한 것은 “그런 위대한 황제 앞에 섰기 때문이 아니라 루터 자신과 황제 둘 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대답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부르심을 받은 루터는 황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다음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내 앞에 계신 유일하신 한분의 청중이신 주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현대성의 힘과 유익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할 때에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현대 세계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결정적인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 그분의 소환에 너무나 강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루터와 더불어, “여기에 내가 섰노라, 나는 이렇게 밖에는 할 수 없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을 마치며...
소싯적, 몇 가정마다 우물을 파 사용하던 때, 4~5년의 주기로 가뭄이 들던 때가 있었다.
가뭄의 정도에 따라 건수와 함께 섞여있던 우물들이 점차 말라가고 마지막에는 생수의 근원에 닿아있는 우물만 존재하여 모두가 물동이외 물지게를 지고 나선다. 오늘 과연 우리에게 그 우물을 소유한 이들은 누구들이겠는가? (이사야 55:1~2, 요4:14,) (오스기니스의 “소명”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라. 인용).
-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