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미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생명 그리고 사랑]

박온순
  • 1775
  • 2021-07-29 19:49:23
오늘은 (2021.07.29)퀴어축제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여러분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요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라는 안타까운 마음에 온 몸으로 저지하다 고소를 당한 탁 **목사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있는 날이다. 그런데 그는 왜 그러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개인적으로 어떤 유익이 있길래?

침묵하는 일은 참으로 편안하고 안전한 것이다. 점잖아 보이기도 하며 비난 받을 일도 없고 적개심을 품은자가 주변에 없을 것이니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참으로 편한 방법이지 않은가!

이 무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런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나 또한 불편한 삶을 자초하는, 어찌 보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일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죄”라고 여기기에 또한 “깨닫게 하신 이 앞에 불충한 일” 이라 생각하기에 또 다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이대 기독교학과 박경미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지난 글에서는 1.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하는 이들의 모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였으나 금 번 글을 통해서는 누가 진정 생명을 사랑하고 구하려는 것인지, 또한 신학교육의 방향에 어떠한 반성이 있어야하는지 이에 대하여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생명을 구하려는 자

박경미 교수가 본래는 성소수자 문제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으나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두 가지로 밝히고 있다. 금번 호에서는 한 가지만 소개하고 논하고자 한다.

박교수가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된 배경의 첫번 째 이유는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이 개신교 집단에 몰고 온 광풍과 퀴어 축제 때마다 벌이는 일부 개신교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고 또 한 번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성소수자들의 목소리에 대한 개신교 집단의 테러에 가까운 행동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박교수의 논리에 반박하는 나 또한 2014년부터 동성애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해 년 도에 서울시에서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위해 공청회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기독인이 아닌 시민으로서도 그 내용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일을 뒤로하고 공청회 장소에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삶은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양육하며 개인의 영성 생활에만 집중하며 살던 시기였다. 단순한 삶을 지향해 온 터라 외부의 일에는 정치적인 것이나 심지어 내가 속한 지방회의 일에도 전혀 관심하지 않고 살아온 삶이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서만은 ‘침묵하면 안 되겠다’라는 절박한 마음이 들어 공청회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날의 공청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동성애자들과 또는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들, 동성애를 반대하는 양측의 대립으로 전 서울 시장이었던 박원순 씨가 참석하기로 하였으나 불참하였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공청회를 열 수가 없었다. 다만 자유발언 형식이 취해졌다. 그 때 나는 앞에 나가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한 기억이 있다.

“서울시민으로서 두 딸을 둔 엄마로서 박원순 시장님께 다음과 같이 묻고 싶어 오늘의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시장님, 시장님의 따님이 여성을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면 시장님은 그 여성을 사위로 환영하며 기쁨으로 맞이하겠습니까? 아니면 너무도 당황스러워 인사도 받지 않은 채 그 여성을 돌려보낸 후 따님을 향해 ‘얘야,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 다시 생각해 보거라, 이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 따님이 남성과의 결혼을 위해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 따님을 위해 온 가족이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에 대하여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아버지로서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소리에 따라서라도 진정으로 동성애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더 연구하고 바른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진정 시민을 위한 것이거늘, 어떻게 이러한 일에 서울시가 앞장서 정상적인 가정을 해체하고 망국으로 가는 이런 일에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이라는 미명하에 교묘한 방법으로 악한 일을 도모하려는 것입니까? 이것이 시민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종교나 헌법 이전에 양심을 통해서 정상적인 것이 무엇이며 죄에 대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먼저 알게 하셨다. 살인을 저지를 때 왜 사람이 없는 은밀한 곳을 택하는 것이며, 도적질을 할 때 왜 주변을 살피는 것일까? 잘못을 저지르면 왜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는 것일까? 물론 한 번 두 번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상습이 되고 가슴도 뛰지 않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으며 그다음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 주장하려 할 것이다.

동성애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적인 상태를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스스로도 떳떳하게 여기지 못하고 누군가의 동의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지 내 소견대로 가르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연구하여 잠시 성적 취향에 빠져 있는 그들을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적인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진정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알지 못하고 그런다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일깨워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이 바른 길로 갈 수만 있다면, 영혼육이 건강하게 참된 자유를 누리며 안식을 누리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안내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것이 폭력이고 테러인가?

동성애의 문제는 생명과 연관이 되어 있다. 하나님이 죄라고 명하셨으면 죄인 까닭에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앞장서 성경을 왜곡하여 “죄가 아니다”라고 선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작금의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못해 안달을 하며 성소수자들을 위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목회자들이나 신학교 교수들을 보면 마치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영혼들을 사망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오히려 박교수는 말하기를 “주류 개신교 교단과 신학대학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선으로, 신앙의 실천으로 여기는 조처들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는 무엇보다도 한국 신학과 신학교육의 실패로 여겨진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신학자로서 위에 언급한 문제들에 대해 진솔하게 연구하고 자성하는 신학자가 있어 이를 소개함으로 목회자들과 신학의 방향이 어떠해야 할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 아래의 글은 본 게시판 번호 11473 “나는 어떻게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라는 박경미 교수의 글에 이경남 목사께서 댓글 “폐륜적 성 혁명의 들러리들”이라는 제목으로 곽혜원 교수의 글을 올린 글을 재인용한 것이다.

[너 자신을 억압적인 기독교의 성도덕으로부터 해방시켜라. 너의 성적 충동을 만족시켜라. 그래서 모든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라는 낙원을 창조하라.” 이 구호는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68혁명’의 모토였는데, 누가 보더라도 기독교를 집중 공략했음이 명약관화하다. 당시 68혁명 세력이 기독교를 향해 도발했을 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서구세계의 교회와 신도들은 방관하거나 침묵했었다.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과 가치체계의 전복이 심각하게 가속화되었다. 당시 교회와 신도들이 기독교의 성도덕을 포기한 것이 결국 50여 년 지난 오늘날 글로벌 성 혁명(global sexual revolution)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인류문명사를 연구하면서 성 혁명 세력이 최소한 200년 동안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다. 첫 번째 성 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오늘날 두 번째 성 혁명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검은 연기를 피우며 때를 기다려왔다. 높은 학식을 갖춘 지성인들(장 자크 루소, 어거스트 콩트, 샤를 푸리에,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 빌헬름 라이히, 알프레드 킨제이, 존 머니 등)은 성 혁명을 위한 철학적·심리학적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이들 외에도 많은 활동가 그룹이 성욕을 사상적·정치적 도구로 악용함으로써 섹스의 정치화, 정치의 섹스화를 암암리에 추진해 왔다.

이들 성 혁명 전략가들은 서로 다른 동기와 이해관계를 가졌지만,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의기투합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성규범의 해체-가정의 해체-기독교의 해체’였던 것이다. 이들은 세상적 명성을 얻고 사탄의 도움을 받는 듯 보였지만, 종국적으론 성적인 혼란과 깨어진 관계 속에서 스스로 망가진 인생을 살아갔을 뿐만 아니라(일례로 자기 자녀들을 유기했고 술과 마약에 의존했으며 광기와 절망 속에 자살로 생을 마감), 동시대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독교 교리를 파괴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는데, 이들의 집요한 노력으로 인류역사에 고상한 문명과 높은 도덕성을 부여했던 유대-기독교적 근본에 금이 가게 되었다.

지난 200년간의 흐름은 1960년대 말 반(反)체제-반(反)문화-반(反)기독교 운동과 합류하여 사나운 기류를 형성함으로써, 마침내 68혁명은 두 번째 성 혁명을 시작할 결정적 분기점을 마련했던 것이다. 68혁명 세력은 특히 중국 현대사의 대재앙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혁명을 벤치마킹함으로써 68혁명을 전 세계적인 문화혁명으로 확산시켰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당대 유럽의 사유체계를 패륜적으로 전복시켰던 68혁명 세력이 성장하여 글로벌 정치·경제·사화·문화·교육·언론·법률·종교계 전반을 장악한 오늘날 전 세계를 패륜적 성 혁명으로 뒤집어 놓은 현실이다.

68혁명 세력에 의해 수뇌부가 장악된 유엔(UN)과 유럽연합(EU)이 21세기 들어와 성혁명을 강행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때 유엔은 전 세계인들의 희망의 등불이었고 유럽연합도 평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열망으로 탄생했지만, 이들 모두 현재는 남성과 여성의 성별(性別)을 해체시키고 전통적 가족 및 결혼제도(한 남성과 한 여성의 신성한 결합인 일부일처제)를 파괴하는 젠더 주류화(=성주류화, gender mainstreaming)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성소수자들(LGBT)을 대변하는 권력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다. 불과 반세기 만에 인류문명의 근간이 허물어지게 된 것은, 유력한 국제기구와 주요 선진국들을 움직이는 파워 엘리트들(power elite)이 주축이 되어 ‘위로부터’ 성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전통적 가치체계를 전복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패륜적 성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인 서구세계에서는 성규범이 와해되고 도덕적·윤리적 기준의 해체가 강요됨으로써, 음란의 규범이 형법을 통해 강제화 되어가고 있다. 장구한 인류역사를 지탱해 왔던 강고한 성규범이 급속도로 풀려서 사람들이 점점 더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있는데, 특히 동성애(homosexuality)가 또 다른 대체적 쾌락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는 단지 시작일 뿐이고, 사실상 성혁명의 끝자락은 다수를 성적으로 편력하는 ‘폴리아모리’(=복수연애, polyamory)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게 필자의 진단인데,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폴리아모리가 그 음란한 실체를 드러내었다.

폴리아모리만이 아니라 친(親)동성애적인 행보도 계속해서 논란을 빚고 있는데, 특별히 신학대학에서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는 친 동성애 관련 사태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게 한다. 하나님께서 선민(選民)된 백성에게 주신 계명은 명백히 동성애를 통해 성별의 경계를 넘는 것을 엄격히 금하실 뿐만 아니라, 근친상간을 통해 혈연간의 경계를 넘고, 동물과의 성관계를 통해 생물 종간의 경계를 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한 거룩한 성 혁명으로서,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안에서 성적인 성결은 이의나 타협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확고부동한 하나님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성규범의 해체에 저항하는 거룩한 성 혁명은 항상 기독교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평신도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헌신하고 목회자들이 사생결단으로 동역하는 반(反)동성애 사역에 신학계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현실이 너무나 유감스럽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신학자가 교리를 굳건히 세워 영적·사상적 전쟁을 견인해 주길 기대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부끄럽다. 현재 신학계는 동성애 옹호세력에 점령당한 교육현장에서 눈치를 보면서 포퓰리즘에 영합하거나, 신성모독 수준으로 음란하게 성경을 해석하면서 동성애를 미화하는 퀴어 신학(queer theology)에 예언자적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성 혁명의 이론적 기반인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정부기관으로부터 연구비 수혜를 받거나, 글로벌 학술계에서 유명세를 타는 대세는 신학자들의 신앙양심을 마비시키는 사탄의 유혹이다.

우리나라는 대다수 국민 정서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무엇보다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귀중한 자산 때문에 서구교회와 달리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확신해왔지만, 신학자들 때문에 전체 한국교회가 분열하고 힘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제라도 한국 신학계는 동성애와 퀴어 신학에 올바른 비판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바로 이때를 위해 신학자로 부르심을 받은” 시대적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대를 선도하는 책임을 짊어진 학자는 결코 사사롭게 학문활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거시적으로 내다보는 혜안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살아있는 학자의 양심으로 시대 문명을 올바른 길로 이끌라고 그 직임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순교자 중에 신학자가 거의 전무한 상황 속에서 신학자들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는 사도 바울의 경고를 뼈아프게 되새김으로써,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예비성직자들이 올바른 신학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류문명사적 위기에 봉착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진리의 영으로 선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다음세대에게 인류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숭고한 가치체계와 건전한 문화유산, 신실한 신앙전통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20년 우리는 인류문명사가 대전환을 이루는 총체적 난국의 시대를 맞닥뜨리고 있다. 필자는 고뇌하던 청년시절 느꼈던 민족과 역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부담감을 다시금 절감하면서 새해 벽두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 이 위중한 역사적 국면에 왜 우리를 실존하게 하셨습니까? 왜 이 시대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까?” 그때마다 깨닫는 것은, 이것이 우리가 감당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깨달은 이상 무조건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적 사명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 신앙양심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오직 순종만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2000년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극소수의 깨어있는 이들에 의해 이뤄져 왔음을 깊이 확신하고 있기에,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명을 감당하는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다.

현재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인류문명과 서구세계를 대신하여 대리전(代理戰)을 치루는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서구세계의 복음적 교회들은 한국교회가 성 혁명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지 예의 주시하면서 중보기도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한국에 선교사들을 보내서 기독교 복음을 전했지만, 이제는 역으로 한국교회가 무너진 서구교회들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가 무방비로 성 혁명에 굴복 당했던 서구세계의 잘못된 전철을 지켜보면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성 혁명 세력과 일대 전쟁을 치루면서 거룩함을 회복하는 역사적 분수령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회복함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도 극복하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곽혜원 박사의 글 중에서 -

* 곽혜원 박사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세대와 장로회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 독일 퀴빙엔대학 조직신학박사(Dr. theol.)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21세기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연구공동체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Das Todesverständnis der koreanischen Kultur(한국문화의 죽음이해), 『현대세계의 위기와 하나님의 나라』,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자살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저작),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공저), 『관계 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공저), 『죽음 목회』(공저), 『과학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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