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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초하루
최천호
- 1135
- 2021-08-01 02:26:43
높게 솟은 산은
깊은 계곡에서
몸을 식히고
가볍게 하늘을 날던
새들도 몸을 숨겼다
아침 안개처럼
촉촉한 이야기들을
숨기고 있는 저 골짜기는
지금 누가 살고 있을까
팔월의 태양 아래
검은 그림자로 서 있는
붉은 소나무는
길 떠나는 세월에
허리가 굽었고
재를 넘는 바람은
거친 숨을 토하고 있다
중복에 자전거 타기
길을 막고 호령하는
염절, 화왕지절이다
순간에 지나치는 한 뼘의
가로수 그림자가 친근하다
뜨거운 볕에
변색된 옷차림으로
땅에 허리를 굽히신
검게 탄 아버지의
얼굴을 가려주던
밀짚모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뜨거운 바람만 남기고
빠르게 지나치는
미끈한 자동차,
오늘은 이 언덕이
왜 이리 높으냐
하늘과 맞닿은 저기에 오르면
힘들지 않게 내 달리는
내리막이 있을 거야
가슴에 안길 시원한 바람도
기다리며 쉬고 있겠지
곧게 길을 낸 이 들판을
소낙비로 달렸으면
눈물이 보이지 않겠지
장마
할 일이 없다며 눈을 감고
새김질만하는 누런 소 등 뒤로
바람도 없는 늦은 오후는
지친 듯이 늦은 걸음이다
갈매기 무리들은
수평선을 볼 수 없었다며
종일 날 생각도 하지 않고
해당화는 벌써졌지만 열매는
붉은 색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한 달 내내 맨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하얀 소금을 먹고 사는
염전 창고는
검게 타들어가는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데
아버지는 허리 굽은 황새처럼
누렇게 바랜 등만 보인 채
널따란 논을
두 손으로 휘저으며
길게 자란 풀들을 뽑아
멀어진 둑에 던지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의 슬픈 날
무겁게 내려앉은 이슬과
그 맑음을 쓸고 가는 촉촉한 바람
기억할 수도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의 슬픔처럼 쏟아져
가슴팍에 꽂히는 총총한 별들
보이지 않는 낮의 해와
새색시처럼 환한 얼굴을 내민 반달
젊은 엄마의 젖내 나는 가슴과
아이의 검은 눈망울
짙은 안개를 머금고
소리 없는 눈물 보이는 길고 긴 강과
길게 누워 오수를 즐기는 산과 들
산속으로 숨어드는 좁은 길과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꽃들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는 소나기와
그 뒤를 좇는 낮은 구름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이 깊은 바다와
그보다 더 깊고 깊은 하늘
지나쳐가는 시간을 붙들고 서서
그 아름다운 것들에 목이메인 나
갯벌
태백산 줄기가
힘차게 내 달리다
넓고 푸른 서쪽 바다에 안겨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부부의 연을 맺고
햇볕이 쏟아지는 하늘을 받아
몸을 열어 생명의 자식들을 출산한다
하루에 두 번
수줍은 옷깃을 풀고
밤새 불어난
통통한 젖가슴을 내놓는
몸을 낮춘 나의 어머니는 싱싱하다
소나기를 보며
창가에 기대서서
물방울 놀이를 하는 너를 보니
천진하게 놀아본 기억이 희미하다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져
웃음이 줄어들고
하고 싶던 꿈과 이야기들을
먼지 쌓여 읽지 못하는 책들처럼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하는데,
너는 나를 시원하게 벌거벗겨
퀴퀴한 냄새를 풍기던
오물 같은 체면들을 말끔히 씻기며
어린 아이처럼 웃고 있구나
물방울 놀이가 그리도 재미있니
나도 한번 끼워주려무나
너무 빨리 달리지 마라 미끄럽구나
솨악- 거리며 그만 재촉하거라
너에 비하여 나는 너무 늙어버렸다
네 가슴 어디에
이렇게 맑은 이야기들을 숨겨 놓았었느냐
눈물 보이며 슬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나는 네 시원한 그 하나만 보아도 행복하니
오늘은 종일 나와 함께 놀다 가려무나
여름날의 풍경
서둘러 길 나섰다
민얼굴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어드는 반달
내리쪼이는 햇빛 아래
행복한 꿈꾸는 키 작은 꽃들
깊어지는 숲속으로 걸음 재촉하다
외로움에 지친 오솔길
붉게 타는 저녁 하늘 아래
속 깊은 바다에 몸을 담근 섬들
근심처럼 철썩거리는 파도와
숨을 멈추고 지나가는 바람
밀려오는 졸음 참지 못하고
유성으로 내리꽂히는 별들
밤새워 소리 없이 흐르다
이슬로 내려와
가슴 적시는 은하수 강물
나의 여름을 붙들어 놓고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주름 깊은 이방인
팔월의 숲
바람 한 점 찾지 않는
팔월의 깊은 숲은
밤을 새우고
아침이 오도록 침묵하니
수많은 언어를
쏟아 내며 살아온 나는
변화되지 않고
감동 받는 이 없으니
공허만 가득하다
팔월 마지막 날
산모퉁이를 돌아
숲으로 숨어드는 이 길을
누가 처음 걸어갔을까
여기 머무는 깊은 외로움은
누구에게 배운 것이어서
저 끝까지 홀로 걷기만 하네
탐욕스런 여름이 기운을 다했으니
화려하지 않은 이 길가에도
조용히 열매들이 맺히겠지
태양은 뜨겁고 갈 길을 먼데
무더위를 이겨내고 곧게 서있는
사랑스런 꽃들이 나를 반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