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령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 - 모르고 있는 것들]

박온순
  • 1734
  • 2021-08-03 21:47:18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의 김혜령 교수가 “성 소수자, 어떻게 예수의 이웃인가”라는 제하의 글이 2021년 08월 02일 자로 감리교 게시판에 올라왔다. 이는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모임/이하 혐차반모〉에서 주관하여 성소수자 문제를 시리즈로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서 당당뉴스에 게재하고 있는 글을 본 감리교게시판에 옮겨온 것이다. 그러므로 김혜령 교수의 글은 혐차반모와 같은 입장이기에 그의 글을 통해 감리교회에 기생하고 있는 반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지 이에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반론을 제기할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지만 감리교회 내의 동성애 문제는 단순히 동성애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창조주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느냐, 아니면 여러 신들 중에 하나로 보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 종교의 교주 가운데 하나로 보느냐, 아니면 인간에게 영생과 부활을 주시는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또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보느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들이다.

김혜령 교수의 글은 앞서 박경미 교수의 글과 마찬가지로 반박할 소지의 내용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본 글을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가운데 가장 오해되고 있고 목회자들이나 신학교 교수들이 왜곡하고 있기에 김교수의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지를 전개하여 반론하고자 한다.

1.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2. 강도는 누구인가?
3.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4. 우선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
5. 결론

김교수는 성서수자들이야 말로 예수님의 이웃이며 그들을 위해 고통 받는 “이동환 목사 혼자 40도 아스팔트 위에 혼자 남겨 두기에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정녕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글을 맺는다. 맞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를 아스팔트 위에 혼자 남겨 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야기 하나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하고 예수를 말하나 많은 영혼을 어둠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에 대해 통회 자복해야 한다. 왜 그런지 밝히겠다.

1. 강도만난 자는 누구인가?

강도만난 자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이다. 태어날 때부터 죄악 가운데 출생하여 선한 것이 전혀 없는 인생임을 알지 못하는, 죄인임에도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모든 인생들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모든 인생은 강도만난 자들이다. 다음과 같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 땅에 오셨던 성자 하나님께서 율법교사와 나눈 대화(눅10:29~)의 장면을 그대로 보는 듯 하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5-6)

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인가?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금수도 제 주인을 알건마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존귀하게 지음 받은 인생들은 하나님을 떠나갔고 멸시한다는 것이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귀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2-4)

김교수의 이론과 혐차반모 회원들의 문제는, 성소수자들이나 교인들에게 태어날 때부터 죄악 가운데 출생한 인생임을 직면하도록 참된 복음을 가르쳐주지 않는 다는 점이다.

특히 김교수는 1973년 미국의 정신의학회에서 동성애자들은 정신 질환자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그들을 질환자들로 정죄한다는 것이다. 김교수와 혐차반모 회원들이 성경의 진의를 알지 못해 곡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동성애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본래 죄악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만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라도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혐차 반모 회원들은 모든 것을 죄악시 하면서도 유일하게 동성애에 빠진 자들을 위해서 대변한다고 하며 그들의 영혼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그들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인데 말이다.

2, 강도는 누구인가?

강도는 죄악 가운데 출생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4-47)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또는 목사가 되고 신학교 교수가 되었어도 그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시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도 못 알아보고 못 알아들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결코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을 난도질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 앞에 교만하기 때문이다. 선한 것이 전혀 없는 인생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만 임하시는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3. 선한 사마라아인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짐승 취급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짐승 취급받으며 태어나셨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7)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1-12)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어야 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을까?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8:48)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짐승취급한 것이다. 귀신이 들렸다고 능멸하기도 한 것이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시닝 들린 것이 아니하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 하며 결국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8:59)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 때문에 짐승취급을 받으셨고 귀신 들렸다는 소리도 들으셨으며 온갖 모욕과 능멸을 당하신 후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여전히 능멸해서야 되겠는가?

4. 우선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

강도 만난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악한 원수 마귀에게 끌려다니면 마귀의 종 노릇하던 우리를 절절히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면 그 사랑에 겨워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마귀가 주는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지 않으면 미치광이처럼 살 수 밖에 없다. 이는 성소수자만이 아니다. 모든 인생이 그렇다. 목사도 예외가 아니고 교수도 예외가 아니며, 감독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교사와의 대화를 들어 보자. 그는 영생에 관심이 있는 듯했으나 그는 예수님을 믿고자 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왔다고 누가는 증언한다. (눅10:25)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왔을지라도 예수님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셨고 율법교사는 대답을 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교사 답게 성경전체의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하여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딱 부러지게 답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답하셨을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영생에 관한 것이다. 단순히 윤리나 도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짐승취급받으며 우리를 사랑하여 이 땅에 오신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5. 결론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생명처럼 여기고 인격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 첫 번째를 멸시하거나 무시하고 성소수자들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 하면서도 이 땅에서는 그럭저럭 사람들의 마음도 얻고 신문에도 나고 무탈하게 살 수는 있다. 밥벌이로 목사의 이름으로 또는 신학교에서 교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이름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또는 그럭저럭 살아갈지는 몰라도 영생과는 먼 사람들이다.

이것이 안타까워 오늘도 침묵하지 못하고 불타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한 영혼이라도 미혹된 길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을 담은 영혼의 탄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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