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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과 환대의 공동체를 향하여/송진순 실장"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김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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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09 19:41:45
포용과 환대의 공동체를 향하여
송진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연구실장)
2018년 5월, 서울에서 성소수자 의제에 관한 국제회의가 있었다. “함께하는 여정: 포용과 환대의 공동체를 향하여”(Journey Together: Toward Inclusive and Affirming Ministry)라는 주제로 개최된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필리핀, 대만, 일본의 8개국의 개신교 관계자들이 참여하여 성소수자 문제에 관한 각 교회의 상황을 나누고, ‘포용과 환대의 공동체’를 향한 협력과 연대를 다짐했다.
독일복음교회(EKD)에서 온 카르스텐 쾨르버 목사는 “동성애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자유와 존엄의 문제이며, 생명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고 지적하면서 “독일은 교회의 지원으로 시민사회가 성소수자를 호의적으로 수용하고 포용했다”고 전했다. 필리핀에서 온 멘도자는 “필리핀은 보수적인 천주교 사회이기에 교회, 학교, 사회 어느 곳도 성소수자에게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2015년 성소수자 문제가 가시화되면서 사회가 이 논의를 수용할 수 있는가를 두고 회의와 우려의 소리가 컸지만, 지금은 방해받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수준과 구조가 마련되었다”라면서 자국의 상황을 공유했다.
나는 성소수자 당사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소리 내기 힘든 한국 교단의 인식과 구조에 대해 발표했다. 이야기를 들은 영국 성공회 신부는 “한국의 상황은 30년 전 영국과 닮아있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 역시 어려운 과정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들을 이루어 갈 것”이라며 격려를 보냈다. 30명의 참가자들은 각국의 상황에서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는 가운데서도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각 교회의 어려운 상황에 공감했다. 동시에 교회가 말하는 정의와 평화는 다른 이를 포용하고 환대하며 평등을 실천할 때 이루어진다는 점을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세계 교회의 협력과 평화를 다짐하는 회의는 그 의제가 성소수자인만큼 참가자들의 안전과 원활한 회의를 위해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몇 년 전 이 회의에 참여한 경험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면서도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진정성 있는 태도, 그것이 그리스도인 되기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사회 어디에도 서지 못하고 소리 낼 수 없는 이들이 존재를 부정당하는 고통을 넘어 자기를 정체화하는 이야기,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곁에서 대신 소리 내고 이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연대하는 이야기가 전 세계 교회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현실은 성소수자가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에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 그것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이들이 속한 삶의 터전과 생계에서 본인은 물론 가족과 친구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의 의제를 공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사회적 인식과 구조에서 우리는 어떻게 포용과 환대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차별과 혐오는 일상의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일상은 나이, 장애, 학력, 인종, 젠더 등 수많은 정체성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혐오는 단순히 한 개인의 말과 행위가 아니라 한 사회가 규정하고 지향하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에서 작동된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상과 보편적 가족상, 소위 정상성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규범은 물론 유무형의 제도와 구조를 형성해왔다. 이 점에서 소수자는 숫자와는 전혀 상관없이 권력적 열세에 있는 이들로서, 사회의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자들, 소위 우리와 함께하는 외국인 노동자, 여성, 장애인, 낮은 학력의 근로자, 동성애자/성소수자, 노인, 난민들이다.
사회의 정상성에 벗어난 이들은 차별과 혐오를 통해 열등한 존재 혹은 잉여적 존재가 되고 마침내 비인간으로 지워진다. 따라서 차별과 혐오는 타인을 차별하고 억압하면서 불평등한 위계구조를 양산한다. 이 점에서 차별과 혐오는 타인에 대한 폭력이다. 문제는 일상에서 보이지 않게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의 구조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차별은 한 개인의 다면적 정체성과 연결되는 다면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차별과 혐오의 피해자는 언제든 다른 상황에서는 가해자로 역전되기도 한다.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고 평등하다. 따라서 어떠한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제정될 이유는 명백하다. 헌법에 근거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사회가 빚어낸 정상성의 신화 그리고 이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과 인정 투쟁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분명한 한 가지를 우선으로 삼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다. 너로 인해 나의 일자리가 박탈당한다는 생각, 다른 학력과 다른 출신 지역을 가진 네가 나와 동등한 자리에 있다는 불쾌감, 인종과 종교가 다른 너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편견, 경제적으로 열악한 너는 게으르고 비굴하다는 시선, 신체적으로 불편한 너는 지적 사고나 의지가 약하다는 오만함, 성적 지향이 다른 너는 생활이 방만하고 죄인이라는 그릇된 재단과 정죄, 나이 많은 너는 잉여적 존재라는 비하감이 이 사회에서 타인을 어떻게 지우고 예속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인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쟁점화 되는 부분은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들은 “헌법이 존재하고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있는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한가? 동성애는 삭제하고 법을 제정하라”고 주장한다. 특히 일부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들은 동성애를 정죄하고 혐오하는 데 앞장선다. 차별금지법 철회는 물론 정상성 신화에 맹목적 수준으로 닫혀 있다. 이에 대해 한상희 교수(건국대 법학전문대학)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헌법은 자신을 구체화하는 법률을 매개로 그 기본 가치를 실현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인신의 자유는 이를 구체화하는 형사소송법을 필요로 하듯이, 마찬가지로 차별금지법은 헌법이 추구하는 평등원칙을 구체화하여 현실에 집행하는 법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법적 규율이 가장 절실한 필요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만 차별을 금지하는 법으로 결코 잉여의 법이나 옥상옥의 법이 아니다. 이것은 헌법과 개별법의 매개로서 차별이 일어나는 곳에서 우리 삶을 침탈하는 편견을 정면으로 다뤄 치유하는 기본법”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삭제한다면, 그것으로 가해지는 차별을 묵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차별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며, 또한 차별금지법이 다루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 차별에 대한 최소한의 예방과 금지를 저버리는 것이다.
수많은 씨줄과 날줄의 정체성이 교차하는 사회에서 일상이 된 차별, 폭력이 된 차별은 교육이나 법정 제재로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인간 존엄과 가치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 사회가 인간의 기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 치열한 논쟁과 대화 속에서도 서로 마주할 수 있는 하는 것은 그 사회 전체의 인식이자 삶의 실천 가능성의 문제이다. 이천년 전 예수가 과감하게 목숨을 내어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구원과 진리를 체화하고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예수는 자신이 마주한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폭력 앞에 스러지는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계를 온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율법적 형식주의와 정치 권력이 사회의 경계와 구별을 통해 인간을 타자화하고 위계적 구조에서 억압할 때, 예수는 경계와 구별을 뛰어 넘어 비인간 존재에게 먼저 다가가 인간다움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정상성의 신화가 아니라 경계와 차별을 넘어선 곳에서 임한다.
상황이 복잡할수록 생각은 단순해야 한다. 상대를 차별하고, 인간 존재를 무화시키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과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권, 법제화, 사회적 합의 등 모든 거대 담론이 지나는 곳에서 힘겨운 발걸음을 떼는 중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존엄하다. 그리고 평등하고 자유롭다. 헌법이나 세계인권선언문을 언급하기 전에 우리는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러니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어야 하겠는가? 수없이 정교하게 엮어진 정상성의 신화라는 거미줄을 걷어내고 내 옆에 있는 인간을 마주하며 친구로 이웃으로 그리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인간다운 삶은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상대에게 다가가는 한발 한박을 통해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 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존엄하듯, 너도 존엄하다. 내가 너와 다르듯이 너도 나와 다르다. 포용과 환대의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단순한 인식과 실천에서 시작된다. 차별금지법은 모두의 존엄한 삶을 위한 시작인 것이다.
*본 글은 기사연 리포트(2020년 10월)에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