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때, 신앙빙자로 객기부리는 이들...

오재영
  • 1352
  • 2021-08-12 18:02:18
오래전,⌜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In His Steps)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어느 부흥하는 교회의 목사가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을 접함으로서 자신의 생활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자신의 교인들에게 일상의 문제 앞에서 먼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고 나서 모든 행동을 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문제는 이 책에서는 주님께서 어떤 자세로 삶을 사셨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다만 순간순간의 상황에서 어떻게 올바른 선택을 했을 지에 집중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올바른 선택을 하시는 그분의 능력이 그분 자신의 내면적 균형 및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채택하신 그분의 총체적인 면모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제시(提示)는 전혀 없다.

삶에서 갑자기 중요한 상황에 직면할 때, 단순히“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추상적(抽象的),피상적(皮相的)인 자문만으로는 우리를 주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 수 있게 해 주는 적절한 훈련이나 준비라 할 수는 없다. 물론 그것이 약간의 유익을 줄 수도 있고, 전혀 행함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런 행위의 도움만으로는 생의 위기에서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위기를 헤쳐 나가지를 못하며,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력한 긴장으로 인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쉽게 절망하게 된다.

신앙에 즉효 약(藥)은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필수적으로 유용한 원천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할 한 가지 분명한 교훈(敎訓)은 이와 같은 상태를 치료할 즉효 약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함에 접근함은 아픔을 동반한 경험의 반복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야 하는 길고도 긴 어려운 여정이다. 문제는 조급증에 걸려있는 우리는 이런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수많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의 체험 기록조차 잘못 인도되고, 그들이 오랜 세월을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인내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함으로서 그들에게 열매로 주어진 위대한 순간들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프란시스 드 살(Francis de Sales)은 비록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적절한 조언(助言)을 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통상적인 정화(淨化)와 치유는 수고하고 인내하며 한 단계씩 나아감으로써 아주 조금씩 이루어진다. 야곱의 사다리 위에 있었던 천사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날지 않았다. 그들은 사다리를 하나씩 오르내렸다. 이처럼 죄(罪)로부터 벗어나 헌신하는 영혼은 하루 중 새벽에 비유할 수 있다. 새벽은 어둠을 순간적으로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물리쳐간다.”

따라서 일부 기독교계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회심(悔心)도 자아(自我)의 변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길고 긴 경험의 과정이 요구되며, 이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새 생명에 접했을 때에도 해당이 된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 그는 반석이었지만 가끔은 반석(磐石)이라기보다 유사(流砂)더미 같았다. 그의 생애에 있었던 몇 가지 잘 알려진 장면들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영적 여정의 단계 : 시몬 베드로의 경우.

유월절 전날 밤, 내일이면 수많은 무리들의 환호 속에 왕이 될 것으로 마음이 들떠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잡혀 죽게 될 것임을 알려 주셨다. 물론 시몬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버리고 떠날지라도 자기는 결코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고 장차 죽음이 임할 때에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꾸짖는 말씀이 아니라 장차 그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완전히 알고 계시며 그러한 그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납해 주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심으로써 그들이 실수를 범하는 순간 및 그 후에 그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었다.

주님은 자신이 장차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예비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그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주 단호하게 자신의 신념을 피력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26:35).

시간이 흘렀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과 행위, 그리고 자신의 신념과 기대와 다르게 실제로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의 추이로 인해 마음이 혼란스럽고 걱정스러웠다. 제자들은 모두 다락방을 나와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요청하셨으나 그들이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셨다(눅22:45).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시고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26:41). 주님은 그들의 현재 마음속에 있었던 진실로 하나님을 향했던 요소, 곧 “영”을 올바르게 평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몸의 자연적인 능력들, 곧 “육”(flesh)의 능력들은 그들의 영과 연합하지 못했고, 그런 까닭에 육은 그들의 영이 진정으로 그리고 올바르게 지향하는 것에 대해서는 연약했다. 이윽고 병사들이 배반자 유다와 함께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 칼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때 그의 육이 강하게 활동하여 그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어버렸다. 예수님은 이 상황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 행동을 꾸짖으셨다. 이처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행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그러나 베드로는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는 실제로 다른 제자들보다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그 결국을 보려고”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마26:58). 그러나 그때에 성령이 그의 입술보다는 다리를 더 통제하고 있었음이 곧 드러났다. 무리들이 둘러 앉아 장차 벌어질 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예수와 함께 한 자(者)라는 심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그 사실을 부인했으며, 맹세와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마26:74).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불과 몇 시간 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예언하시고 경고하셨지만, 베드로의 지극히 성실하고도 선한 의도는 자신의 육신 속에 깊이 뿌리박혀 상황 따라 자동적으로 표출되는 성향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베드로는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죄의 정욕”(롬 7:5)을 직접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몬 베드로를 그대로 버리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반석”으로 만들 작정이셨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에 베드로는 지난 몇 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깨달은 것들을 종합하여 그의 육체의 주도적 성향들 속 깊이깊이 밀어 넣어 주는 체험을 했다. 그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위대한 선생의 죽음과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죽음을 초월하여 여전히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과 40일 동안 교제하면서 새로이 “내 양을 치라”, “나를 따르라”는 지상 명령을 받았다(요21:17,19,22).

그는 이제 비로써 자신과 교회가 인간적인 의미의 나라나 정부를 소유하는 것을 의존하지 않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비로써 이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자였기 때문이다(행1:6-8).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그 능력은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님이 저희 보는 데서 올라가신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임했다. 그들은 다른 사도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던 여자들,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열흘 동안 기다렸다(행1:13-14).

만약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충분히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전 인격에 그것이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으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견할 과정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해 보라. 자동적으로 칼을 잡았던 과거의 손, 도망하는 데 재빨랐던 다리,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일을 망각해 버리고 지난 삶 속에서 예수님과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저주하던 혐오스러운 혀, 등 모든 것들이 이제는 완전히 다르게 변했다.

“베드로는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행1:15). 지도력을 행사 했다. “하늘로부터” 임한 약속된 능력이 온 집에 가득했고(행2:2), 경건한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2:6) 성령의 역사가 베드로의 다리와 입을 강하게 하심을 목격했다. 그는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였고”(2:14), 예수께서 예고하셨던 것처럼(요14:12) 예수께서 친히 그곳에서 행하셨던 그 어떤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감당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1-47).이제 그는 이름대로‘반석(磐石)’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새 이름이다.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및 그의 나라와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살아가는 새로워진 교회는, 이제껏 자신들 스스로 세상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핍박이 일어났고, 거리에는 피(血)흘림이 있었다. 그리하여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행8:1).이제는 공개적 박해, 돌로 침, 투옥, 죽음의 위협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그 길에서 돌이키게 못했다. 갈라디아 2:11-14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 그는 아직도 신앙에서 완전한 평온을 찾은 것은 아니었으나 극히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의 육신은 성령에 의해 강하고 담대했다.

후에 로마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를 간청했다고 전해진다.
아마 자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똑 같은 자세(姿勢)로 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를 비롯한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속에서 우리 신앙의 여정(旅程)에서도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을 영적 생활 안에 있는 본연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것은 곧 땅의 유익 및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영광스러운 땅을 다스리라는 신적 소명(召命)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참고 서적.(달라스 윌라드. “영성 훈련”생명의 본질 참고, 인용).

글을 마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에 동참하는 교회(敎會)라면 성결교단이 아니더라도 성서의 선포된 정상적인복음을 ⓵중생, ⓶성결, ⓷신유, ⓸재림은 기독교가 보유한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이 핵심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거룩과 성별을 떠난 이단 사이비들이 위의 핵심을 자신들의 이익의 수단으로 삼아 큰 홍역을 겪었기 때문이다. (권신찬, 김기동,이장림 등등) 모두가 교활한 사단의 고단적인 술책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위에 거론된 신앙의 핵심은 참과 거짓,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는 기독교의 생명선(線)이다.


그러므로 본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각자 자신들의 언행(言行)에 주의해야 한다.
아무리 진수성찬(珍羞盛饌)도 개(犬)밥그릇에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목사를 비롯하여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과 성숙(成熟)도 주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정돈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침묵(沈黙)하는 시간의 깊이와 비례가 된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주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라! 지난 날. 남다른 위치에서 자신에게 은혜로 주신 기회들을 소명모르고 함부로 허비한 대가(代價)가 얼마나 참담한지를, 이후 주님 앞에서 보고해야할 그날도 두렵지만 현재도 후회, 참담, 탄식하는 초라한 군상(群像)들 널려있지 않은가? 그것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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