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없는 구원의 완결성 - 예수 그리스도는 소수자를 구원하실까?/진미리 목사"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김경환
  • 1347
  • 2021-08-17 17:21:37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감리회 모임>에서 당당뉴스에 실린 진미리 목사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예외 없는’ 구원의 완결성
- 예수 그리스도는 소수자를 구원하실까? -

진미리 목사


“예수님은 소수자도 구원하시나요?”


이것은 머지않아 우리에게 흔하게 다가올 질문이 될 것이다. 우리 목회자들 중 그 누구도 앞으로 이 질문을 피해갈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드러내고 더 많이 사회에 등장하게 될 것은 자연스러운 역사적 흐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담론의 주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암흑 속에 묻혀있었을 지라도, 결국은 자신의 존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성은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정체성이자 당당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소수자들은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생성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단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받지 못했기에 같은 하늘 아래 없는 사람처럼 살아왔을 뿐이다. 우리 역시, 같은 하늘아래 같은 동네를 걸었을지라도, 그들에게 무관심한 사회적 체계 속에서 그들에 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라왔다. 단지 ‘우리와 부정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사회가 제시한 메시지를 교육받으며 그들을 막연히 미움의 대상으로만 그려왔다.

여성들도 없는 것처럼 암흑 속에서 산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구약성서는 여성들이 얼마나 사회의 주도적인 주체들(주로 아버지와 남편)에 의해 정체성과 신분이 좌우되었는지를 도처에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딸은 아버지에 의해 노예로 팔릴 수 있었고(출 21:7), 결혼과 이혼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남성들에만 주어진 권리였다(신 21:14; 21:1-4). 여성들은 소유물이자(수 1:14; 삼상 30:22; 삼하 19:5) 전리품(삿 5:30; 21:14, 21; 삼상 30:2-3, 5)이었고, 강간이나 살인의 대상이었으며(삿 19), 심지어는 제물(삿 21:21-23)로 바쳐지기까지 하였다. 여성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임신, 불임, 그리고 월경과 같은 고유의 신체성도 부정당하기 일쑤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구약성서 속의 여성차별은 가정 내로 치부되는 아버지와 남편과의 개인적 관계의 차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대의 여성차별은 사회적 약속이자 문화적 체계였고, 모든 사람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 종교적 보편성이었다.

여성이 사람이 아니었던 이러한 슬픈 잔재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역사를 떠나지 않았다. 역사를 지나오면서 여성은 성적 타락의 원인이었고 이것은 원죄의 실례로 여겨졌다(어거스틴). 인간인 남성에 비해 덜 인간화된 것으로 태어난 존재가 여성이었고(토마스 아퀴나스), 그런 여성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했다는 이유로 500년 동안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종교개혁 때에도 역시 여성은 죄의 결과로 남성보다 열등하고(마르틴 루터), 남성에게 복종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로(존 칼뱅) 자신의 정체성을 안고 살아야 했다. 19세기에 와서도 여성은 가정부나 세탁소 같은 극히 제한된 노동만을 할 수 있었고, 아주 적은 임금은 법적으로 남편의 소유였다. 양육권조차 없었던 가여운 여성들의 삶은 ‘이성과 자유가 만개했던’ 근대시대의 민낯이었다. 이 모든 꿈과 같은 사실들이 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일까? 여성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을 상호적 주체로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는 이렇게 끔찍한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학과 신앙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지금 보아도 너무도 훌륭하고 위대한 신앙의 유산들이 왜 끔찍한 그림자를 동반하였던 것일까? 신앙과 신학은 인간의 이해와 맞물려 있기에, 시대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상호적 관계를 형성했느냐에 따라, 그들이 해석하는 하나님과,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는 다양하게 정립되었다. 예수의 말씀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기억하였던 초대교인들은 예수의 삶을 가장 잘 재현한 사람들이었다. 예수에게는 구원의 대상이 구별되어 있지 않았다. 예수는 당대의 사회적 상식으로 볼 때 사람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던 여성들과 아이들도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요 주체로 대해 주었다. 초대교인들은 이러한 예수의 사람에 대한 의식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시대가 다 초대교회와 같지는 않았다. 초대교회의 영글지 못한 신학에 비해 월등하게 세련되었던 중세는, 누구보다도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찬미에 열심을 다하였다. 역사적으로 그들이 구축한 신앙과 신학은 가히 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완벽한 신학은 왜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소외자들을 양산했던 것일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그들의 신앙의 열심은, 왜 500년 동안 여성들을 불태워 죽이기까지 하게 되었을까? 필자는 그들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 그들은 이 두 사랑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에게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인식하고 찬양할 수 있는지에만 몰두함으로써 세상과 구별되려고만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은 그들의 눈에는 없는 존재, 지극히 세속적인 존재, 거룩한 하나님에게서 떼어내야 할 죄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한 판단의 몫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보편성에 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기독교적으로 가장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 독생자를 선물로 받는 ‘세상’은, 구별된 누구도, 특별하게 우월한 계층도 아닌,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천국 문을 두드릴 수 있는 특권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가능한 것이고,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결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남녀노소, 신분과 정체성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픈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현대의 신학은 갈수록 타인에 대한 관심을 다루지 않으면 수긍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여성에게 가했던 것처럼 죄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기본적이고도 보편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다시금 회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기로에 놓여있다. “회개하고 돌아서면 구원해 주실 거야.”라고 누가 답을 한다면, 필자 역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회개할 것이 많은 사람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은 그 모든 회개의 제목들을 초월하여 나에게 조건 없이 임하셨다. 그러기에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다.

소수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한 번 얘기를 들어보라고 손 내밀고 있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구는 수십 년 전부터 우리 교회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 온 분일지도,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일생에서 가장 은밀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불안하고 무섭지만, 가장 신뢰하는 여러분에게 고백하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수자들은 우리 모두가 땅 끝까지 가야하는 증인된 여정 가운데 반드시 만나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결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어떤 관점과 평가가 있을지라도, 구원이라는 기적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싶은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의 도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오히려 경계하고 그들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기독교의 근본이념을 부정하는 것이자,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협소하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소수자들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처음 만나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오히려 사회나 공동체에서 공유한 많은 이야기들로 인해, 두려움이나 혐오로, 그들에게 마음의 장벽을 미리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한 차별은 편견에서부터 시작되고, 그 편견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면서 억압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과거에 지독한 차별을 당했던 것은, 당대에 여성이 누구인지를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 인류에게 죄를 드리운 원흉이 바로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서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는 수천 년에 걸쳐 내려온 편견을 오늘날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혹시나 있다면 부끄러운 일임). 당장은 소수자들과의 만남과 이해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들어왔던 많은 이야기들을 예수의 십자가를 담보로 잠시 내려놓고, 그들이 직접 말하고 보여주는 것들을 경청해 보기를 바란다. 이 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를 과거의 여성사처럼 억압의 역사로 꾸릴 것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기하면서 모든 이웃들을 하나님 나라의 잔치자리로 초대하는 진정한 기독교의 역사를 건설할 것인지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다양하고 각자의 개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적으로 필자는 사람들은 거기서 거기인 존재들이라는 생각 역시 하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개미들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죄인인 소수자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아무리 백번 생각하고 생각해도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보면 알 수 있다.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것을 보면 답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고 싶고 만나고 싶어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누가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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