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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서드】전쟁평화(戰爭平和)
함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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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6 18:23:23
역전투쟁공평조화
力戰鬪爭公平調和
함창석
力자는 팔에 힘을 주었을 때 근육이 불거진 모양이다. 농구인 가래의 모양. 나중에 「일하다, 힘」의 뜻이다. 갑골문에 나온 力자를 보면 밭을 가는 농기구가 그려져 있었다. 농사일에는 고강도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본래 밭갈이용 농기구를 그렸던 力자는 ‘힘’이나 ‘힘쓰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力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힘’이나 ‘힘쓰다’와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力자가 ‘힘’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후에 耒(쟁기 뢰)자가 ‘쟁기’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戰자는 戦(전)의 본 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창과(戈 창, 무기)部와 음을 나타내는 單(단 식구들을 위해 밭에서 홀로 열심히 일함→전)이 합하여 「전쟁(戰爭)」을 뜻한다. 單자는 새총 모양으로 생긴 고대의 사냥도구를 그린 것이다. 이렇게 사냥이나 무기로 사용하던 도구에 戈자가 결합한 戰자는 ‘전쟁’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고대에 사용하던 대표적인 무기들을 나열해 서로 다툰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鬪자는 鬭(투)의 속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싸울투(鬥 싸우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착)으로 이루어진다. 尌자는 북을 세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세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鬥자는 머리를 흩날리는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싸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鬪자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鬪자는 단순히 豆(콩 두)자가 소리역할을 하고 寸(마디 촌)자가 손동작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를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爭자는 争(쟁)의 본 자이다. 손톱(爪)을 드러내고 손(又)으로 치며 싸운다는 뜻이 합하여 「다투다」를 뜻한다. 爪자는 ‘손톱’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손’의 동작으로 쓰였다. 갑골문에 나온 爭자를 보면 소의 뿔을 놓고 서로 잡아당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소뿔 대신 쟁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서로 다투고 있다는 뜻은 같다. 爭자는 이렇게 무언가를 놓고 서로 다툰다는 의미에서 ‘다투다’나 ‘경쟁하다’라는 뜻을 갖게 된 글자이다. 公자는 사사로운(마늘모(厶 나, 사사롭다, 마늘 모양)部) 일과 서로 등지고(八) 있다는 뜻이 합하여 그 반대의 의미로 「공변되다」를 뜻한다. 公(공)의 옛 모양은 무엇인가 닫힌 것을 여는 모양인 듯, 옛날의 쓰임새는 신을 모시고 一族(일족)의 사람이 모이는 광장을 나타내고 그 후부터 거기에 모셔지는 사람→일족의 長(장)→높은 사람이란 뜻이 되었다. 厶자는 팔을 안으로 굽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사사롭다’라는 뜻이 있지만, 갑골문에서는 八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사실 갑골문에 쓰인 口자는 ‘입’이 아니라 단순히 어떠한 사물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公자는 사물을 정확히 나눈다는 뜻이었다. 소전에서는 口자가 厶자로 바뀌게 되면서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나눈다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平자는 물 위에 뜬 물풀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수면이 고르고 평평(平平)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平자는 ‘방패’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또 사물의 모습을 본뜬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平자는 악기 소리의 울림이 고르게 퍼져나간다는 뜻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平자는 소리가 고르게 퍼져나간다는 의미에서 고르거나 평평하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고 후에 ‘안정되다’나 ‘화목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調자는 뜻을 나타내는 말씀언(言 말하다)部와 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뜻을 나타내는 周(주→조)로 이루어짐. 周(주→조)는 골고루 미치다→고르는 일을, 調(조)는 말이나 음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조율하다→음악의 가락의 뜻으로 쓰인다. 周(두루 주)자는 오밀조밀하게 짜여있는 밭을 그린 것으로 ‘두루’나 ‘세밀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세밀하다’라는 뜻을 가진 周자에 言자를 결합한 調자는 ‘(말이)친밀하다’나 ‘조화롭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고르다’나 ‘조절하다’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和자는 음을 나타내는 禾(화)와 수확한 벼를 여럿이 나누어 먹는다는(口) 뜻을 합하여 「화목하다」를 뜻한다. 禾자가 ‘벼’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口자가 더해진 和자는 먹고살 만하니 ‘화목하다’와 같은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龠(피리 약)자가 들어간 龢(화할 화)자가 쓰였었다. 龢자는 피리를 그린 龠자를 응용한 글자로 피리 소리가 고르게 퍼져나간다는 의미에서 ‘조화롭다’를 뜻했었다. 여기서 禾자는 발음역할만을 했었다. 하지만 금문에서부터는 소리의 조화를 口자가 대신하게 되면서 지금의 和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디지털 한자사전 e-한자)
Sandol Method
피땀눈물을 흘려 싸움을 하는 것만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서로 다투어 가면서 손톱이 닳도록 쟁기를 부려 터전을 가꾸고 곡물을 생산해 내는 것이 역전투쟁이다. 역전투쟁은 생산이며, 생산은 창조이며 창의, 효율과 능률성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생산된 곡물을 연 못 위에 넓게 펴 있는 연잎처럼 골고루 온 식구가 나누어 먹으며 화목한 모습을 이루는 것이 공평조화이다. 모두가 생존하는 복지에 있어서는 공평성이 우선이며 구성원이 다 같이 만족을 하는 Win-Win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한자의 사전적인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약한 자들의 집단 것을 강제로 죽이고 빼앗는 것이다. 평화는 자기 부족을 채우는 것이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공산주의에서 평화는 오직 세계 공산화가 평화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전 이류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세계가 진정한 복음화인가 하는 과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가 아닌가?
종교전쟁은 넓은 의미로는 종교를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전쟁을 가리키는데, 특히 서양사 분야에서는 종교개혁 후인 16~17세기에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두 파의 대립을 큰 원인으로서 일어난 일련의 전쟁을 가리켜서 이용되었는데 그 주된 것은 네덜란드 독립전쟁(80년 전쟁),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독일을 중심으로 한 30년 전쟁을 들 수 있다. 거기에서는 신교의 자유가 쟁점이 되었는데 유럽의 패권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 전쟁을 크게 확대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도 중동전쟁이나 인도 • 파키스탄 전쟁을 <종교전쟁>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종교적 대립이 반드시 참된 원인이 아니며, 거기에는 종교적 대립을 사회적 • 정치적 문제나 국제관계가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종교전쟁이라는 개념은 개개의 전쟁도, 또한 연속하는 일련의 것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종교전쟁, 종교학대사전, 1998.)
성경에서 ‘평화’란 단순히 근심이나 고통이 없는 평온하고 화목한 상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와 더불어 그 존재의 운명과 결부된 종말론적인 문제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매우 적극적인 의미의 단어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근거로 하고 그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사역에 의해서 이뤄진다(엡 2:15-16). ‘평안’, ‘평강’, ‘화평’ 등으로도 표기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솰롬’이며, 헬라어는 ‘에이레네’인데, 두 단어 모두 평온한 상태, 안전함(안녕), 조화와 일치, 교제, 만족한 상태 등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구약성경에서의 평화는 히브리어 ‘솰롬’은 무엇인가 결여되거나 손상되어 있지 않는 건전(건강)하고 충족(충만)한 상태를 말한다. 이 단어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로부터(창 29:6; 43:27; 삼하 18:29), 아무런 근심이 없는 상태(창 15:15; 26:29; 출 18:23; 시 4:8), 분쟁과 시비가 없는 화목한 상태(창 13:8; 시 133:1), 전쟁을 종식하는 화친(수 9:15; 왕상 20:18), 건강이나 안식(시 38:3), 삶에 있어서 평강(잠 3:2), 형통함(시 73:3) 등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참으로 건강하고 소망스러운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즉, 단순히 육체적 평안이나 정신적인 안정 상태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구체성을 띠는 복된 상태를 나타낸 개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평화는 온 세상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기초하는(사 45:7; 57:19), 하나님의 선물(은사)이다(레 29:6; 시 29:11; 122:6). 물론 구약성경은 이런 평화가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가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민 6:26; 25:12; 시 85:8; 사 26:3; 렘 16:5; 겔 34:25; 말 2:5).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내재되어 있는 불의를 일소하심으로써 평화를 구현하신다. 따라서 평화와 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시 72:7; 사 32:17).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평화가 불가능하기에 평화와 구원 또한 동등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사 5:7). 한편, 구약성경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참된 평화는 불의하고 악한 이 땅의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의 역사에 의해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는 구원으로서의 평화다(시 119:165-166; 사 53:5; 54:9-10). 그런 맥락에서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으로 이 땅에 이루실 평화롭고 복된 왕국의 실현(사 11:1-9; 호 2:14-20; 암 9:13-15)과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 인해 이뤄질 온 세상의 평화(사 2:2-4), 그리고 공의를 실현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심으로써 평화를 가져오시는 메시야의 도래(사 9:6-7; 슥 9:9-10)를 힘주어 선포하였다.
신약성경에서의 평화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솰롬’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분쟁(전쟁)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안녕(마 10:34; 눅 14:32; 행 12:20; 계 6:4)이나 무질서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화평(고전 14:33)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지 정신적(영적) 평안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에이레네’란 당시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아 분명 내면화되어 있는 개념이기는 하지만(롬 8:6; 15:13), 기본적으로는 히브리어 ‘솰롬’의 개념을 그대로 이어 인간의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의 단어로 쓰이고 있다. 특히, 신약 성도들은 구약성경(당시 유대교인들의 경우처럼)이 종말론적으로 대망하고 있던 ‘솰롬’ 곧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참된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된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다(눅 2:11, 14). 그리고 그러한 평화가 성도 개개인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확인되고 적용된다고 믿었다(마 5:9; 갈 5:22). 예수께서 이 땅에 가져온 것은 평화의 복음(요 14:27; 행 10:36; 엡 6:15)이요 참된 평화를 이루는 평화의 일 곧 평강의 길(눅 19:42; 롬 3:17)이다. 한편, 평화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죄로 인해 우리와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의 적대관계에서 화평한 관계로 회복될 수 있었다(롬 5:1-11; 엡 2:14-17; 골 1:20). 이 같은 하나님과 우리의 평화의 관계에 기초하여 인간 상호간의 평화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마 5:9; 엡 2:18-19; 골 1:20; 히 10:19-24; 약 3:17-18). 한편, ‘에이레네’가 ‘솰롬’처럼 인사나 축복의 말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단지 평화를 갈망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실현을 믿고 소망한다는 의미까지도 함축하고 있다(막 5:24; 요 20:19; 벧전 5:14; 약 2:16). 특히 바울은 헬라 문화권의 인사말인 ‘자비’(갈 6:16)나 ‘은혜’(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와 상호 보완적인 용어로서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인 ‘평화’를 함께 쓰고 있다. 그리고 당시 유대교의 전통적 기도나 축복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종종 ‘평화의 하나님’으로 일컬어지는데 그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로 인한 평화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롬 15:33; 빌 4:9; 살후 3:16; 히 13:20). 이처럼 구약과 마찬가지로 평화와 구원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사 9:6; 롬 5:1; 히 13:20-21). 실로, 그리스도 우리 구주 예수는 평화의 주시요 평강의 왕이시다(살후 3:16; 히 7:2). 신약 시대 성도들이 그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일(평화의 복음을 따라 사는 일) 또는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마지막 날 완성될 평화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로서의 마땅한 자세, 곧 종말론적인 신앙 자세다(롬 14:17-19; 고전 7:15; 골 3:15; 딤후 2:22; 히 12:14). → ‘평안’을 보라.(가스펠서브, 평화, 라이프성경사전,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