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역사와 교리중 역사 부분

민관기
  • 1338
  • 2021-08-23 03:46:10
제1장의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역사

[1]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19세기 말, 우리 민족은 봉건적 체제의 붕괴와 외세 침략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봉건적 사회체제를 이념적으로 지탱해 오던 전통 종교는 변화를 갈망하는 민족의 영적 윤리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여려 경로로 전파된 복음은 우리 민족을 죄에서 구원하였고, 새로운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다.

*. 기독교 복음은 19세가 말이 아니라, 18세기에 들어왔다.
*. 외세의 무슨 침략이 있었다는 건지? 병인박해에 대한 병인양요? 제너럴 셔면호에 대한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이 침략이었다고?
*. 조선 사회가 봉건적 체제였나?
*. 우리 민족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 전통 종교는 그래서 지금 멸족이 되었으며, 그 전통 종교에 의한 우리 민족의 삶을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라도 부정하는 것인가? = 이래서 기독교를 제국주의 첨병이라하는 것이며, 일본의 사상적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무엇이 다르냐는 결사적 비판을 받는 것임을 처절하게 깨닫고 반도 식민사학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하여, 탁사의 신학과 신앙이 중요한 것이며, 탁사를 대했던 미국인 선교사들의 입장이 중요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결단코 민족의 전통 사상을 부정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앗다는 그 증거가 탁사에 대한 배재학당에 한문교사 채용이다. 그는 개종과 셰례도 받기 전 선교사들과 함께 했으며, 탁사의 신학이나 사상이 전파되는데, 어떤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음이 뭘 말하는지에 대해 상고하라.

[2]엔
1. 복음 수용과 선교사 내한
19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던 한국인들은 이란 구절로 시작한다.

*. 참으로 참람한 말이로다. 뭘 누가 갈망했다는 것이며,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건가?
도무지 이해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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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이렇게 기술해 본다.

[1]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민족에 16세기경 병자호란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거기에 들어와 있던 천주교회의 신앙이 소현세자 등에게 전해지며, 서서히 북학파의 서학 바람을 타고 들어와 실학이 융성하고 실학과 양명학이 교유하므로 조선 사회에 새로운 학풍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민족을 향한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는 열풍이 몰아쳤다. 곧, 유학은 공리공론에 빠져있었고,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1,000여 년의 호국불교는 완전히 쇠락해 있었으며, 우리 민족 전래의 민족 사상과 종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상황에서 영/정조기의 문화적 융성기를 지나 새로운 학풍은 조선의 기호지방 일대에 열화와 같이 몰아쳐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하심으로 조선은 순/헌/철종기의 섭정과 극심한 세도정치 그리고 그로 인한 심각한 부정부패로 19세기는 민란의 세기라 일컫는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그 때에 기독교의 새로운 복음인 개신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래되기 시작하였는바, 1863년 고종 임금의 집권으로 쇄국정치가 개혁정치라는 명목으로 이어지다가 극심한 천주교 박해 사건을 1866년 격으며, 조선 사회는 격랑으로 빠져들게 된다.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뒤이어 고종은 고종의 비 민비와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친정을 선포하고 준비되어 있던 개화 선비들을 등용하였다.

일찍이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여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제침탈에 막대한 손해를 본 일본은 조선을 강제 개항시켜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200여 년의 개화, 개항을 위한 민족적 요구가 있던 터에 서구와 만날 준비를 일단 갖추게 되었다.

곧, 먼저 개화하여 근대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청국과 일본에 대한 소식과 정보가 신사유람단, 영선사 등을 통해 전하여진바 조선도 이제 구체적으로 서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나라 발전을 이루어갈 것 인지에 대해 거듭된 고뇌가 있었다. 미국과의 조미수호조규의 체결로 조선은 본격적 개화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드디어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체적이며 실체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미국의 감리교회는 중국과 일본을 필두로 일찍이 선교에 나선바가 있고, 조선은 미국의 공사관 설치에 보답하기 위해 보빙사절단을 미국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여기에 민영익이 단장으로 파견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특명은 미국 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과 더불어 미국 사회의 각종 문물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여 오는 것이었으며, 일찍이 일본으로 갔던 수신사들로부터의 정보인 일본 사회에 들어온 기독교의 상황에 대한 정보로 미리부터 알고 있던터, 민영익은 황제와의 교유 내용대로 기독교의 전파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가우쳐에게 전하였다.

이에 가우쳐는 미선교부에 이를 알리며 일본 주재 선교사인 매클레이에게 연통하여 조선 선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였고, 하여 매클레이가 내조선하므로 역사적인 기독교에 대한 “선교윤허 = 의료와 교육”가 조선의 임금 고종으로부터 1884년 7월 3일 매클레이의 내조선 10여 일만에 이루어져 감격적인 첫 예배도 드려졌다.

이는 전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결정이었다. 여타 식민지 제국에 대한 복음의 전래는 거의 다 식민지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강제 복음 전래나 강제 개종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나 조선에 대한 선교만큼은 조선의 주체적 판단과 요구에 미국은 미국 기독교가 19세기부터 불던 해외 선교의 열풍에 힘입어 조선에 대한 복음의 전래가 이뤄졌던 것이다. 곧, 조선의 요구와 미국 기독교의 준비가 조응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조선은 부국강병하며 자주자강하는 나라를 꿈꾸기 시작했고,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나타나있다.

이에, 미감리회 해외 선교부는 조선이 요구한 선교 영역의 필요에 따라 의료 선교사로 스크랜턴을 교육 선교사로 아펜젤러를 해외 여선교부는 메리 스크랜턴을 교육 선교사로 택하여 임명하였고, 이들은 목사안수 등의 준비를 겨쳐 미국을 출발하여 일본의 미선교부를 방문하여 매클레이와 조선 선교회를 회장 매클레이, 서기 ****, 회계 ****을 조직하여 준비를 마쳤고, 이수정이 일본에 와 신앙을 가지고 세례를 받고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을 들고 내조선하므로 그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다.

제 1진의 내조선은 아펜젤러 부부로 일본을 떠나 부산항에 입항 하루를 묵고,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으로 와 입경하려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여파로 여성에 대한 위험의 지적으로 선교를 위한 입경에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제 2진으로 스크랜턴 단독으로 내조선하고 입경하여 그 역사적 선교의 발판을 놓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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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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